‘러시아는 볼세비키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군사들이 매일 800개의 팔굽혀펴기를 했다’
팔굽혀펴기를 800개? 그럼 혁명당시의 군사들은 전부 영화 ‘300’을 방불케하는 조각몸매의 가슴팍이 장난이 아니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100개만 해도 가슴은 표가 나는데, 800개면 완전히 나주평야만한 가슴 사이즈가 등장하는 것은 아닌지? 하하...그런 훈련과 노력이 있었기에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볼세비키혁명의 성공을 위한 전심이 들어있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의 주제는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께 향하는 자’는 어떤 친구들인가? 세가지 측면에서 한 번 나눠보고자 합니다.
1)전심의 질(quality)적인 측면
전심으로 하나님께 향했던 한 사람의 헌신은 100%헌신을 말합니다. 오늘 역대하에 나오는 이 말씀 또한 전심이란 말은 100%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2% 부족할 수도 있고, 95%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의 전심이 거의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100%를 제외한 98, 95, 90, 80...% 이것들은 전심이긴 하지만 full 전심은 아닙니다.
평상시에 우리는 전심을 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평안하고 건강하고 부족함이 없는 일상 가운데서는 전심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도 그저그런soso한 일상들처럼 soso합니다. 하지만 전시에는, 전쟁시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경우나 가정의 큰 재난, 사업의 부도, 자녀의 수술이나 부모님의 질병의 형국에서는 우리는 전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향하는 전심! 물론 비상시나 전시가 아니더라도 전심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대학부애들에게 신앙기초훈련을 하는데, 이 친구들에게 얼마나 우리의 일상이 먹는 것, 식사문제로 얽혀있는지를 느껴보게끔 하려고 일주일 한끼 금식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친구들중에 몇 명은 하루에 한끼씩 금식을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아침이 아니고 점심, 저녁중에서 말입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전시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영적 훈련을 미리 해놓으면 분명히 우리에게 영적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평범한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는 가랑비에 옷 젖는 것처럼 우리 가운데 임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 큰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는 전심이 요구됩니다.
왜 전심이 필요하고 요구됩니까? 왜냐하면 그 위기는 내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생명, 물질적인, 물리적인, 가정의, 교회의 생명, 나의 생명, 우리의 생명과도 연관되기 때문에 간절한 전심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문제가 없고 아쉬울 게 없을 때는 전심이 따라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상황이 다릅니다.
위기=위험한 기회!
7절에 보면 선지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말합니다.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다고 말입니다. 아사는 전쟁을 치르기 위해 무엇보다도 군사력, 숫자에 의존했습니다. 사람이 제일 놓치기 쉬운 대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보이는 것에 쉽게 쉽게 좌지우지 되는 인물! 특별히 일국의 국왕이라면 전쟁시에 군사력, 군사의 숫자에 크게 좌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아사왕이 그러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하였습니다,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사왕은 이웃나라의 힘을 더 크게 의지했습니다.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십니다. 믿는 자의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왕의 소유된 백성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선견자 하나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9절)
마치 이것은 하나의 공식인데, 아사왕은 그 공식을 져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향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100퍼센트 전심을 드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외면을,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중심이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애정과 관심을 드리십시오. 거기에 하나님의 세밀한 도우심과 보호하심이 있을 것입니다.
2)전심의 지속성(durability)적인 측면
이러한 전심을 질적인 면에서 전심이라고 하면, 또 하나의 전심은 지속성(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다뤄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을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제가 여기서 다루고 싶은 전심은 지속성의 차원이다. 여러분의 믿음을,
끝까지 믿음을 유지하라Keep the Faith
딤후 4:7-“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믿음을 지켰기 때문에, 지속성의 전심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선교의 미션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싸울 수 있었고, 마칠 수 있었고,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Keep the Faith
믿음을 지켜라! 끝까지 신실한 태도를 유지하라!
모든 것에 있어 중요한 것은 ‘지속성’durability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그말씀’에서 이런 에피소드를 남겼습니다.
거기에 보면, 오래전에 군목으로 사역하던 한 장교가 있었는데 병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는 병사들의 눈높이에 맞는 사역적인 눈을 가지기 위해 그 당시에 유행했던 시가Cigar를 같이 피웠다고 합니다. 설교를 하는 입장이지만 병사들의 애환을 달래고 위로하기 위해 시가를 같이 폈다는 것입니다. 당시 그는 병사들에게 엄청난 인기와 명성을 얻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그것은 철저하게 잘못된 것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시류와 인기에 영합하기 위한 천박하고 경박한 처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반짝하는 인기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로 ‘지속성’입니다. 인기도 지속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지속적으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성경 또한 전세계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지금도 인기가 있습니다.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성경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20세기 전에만 반짝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다가 사행길로 접어든 슬픈 소식이 아니라 온 인류가 온 세대와 시대에서 ‘지속적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Good News입니다. 신천지나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이단들이 혹여나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지속성에서 반드시 탈이 나는 것이 이단입니다. 영적 세력 가운데 '지속적으로'을 부흥하고 있고 역사가 일어난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말이다. 복음의 능력은 지속성에 있습니다.
최근에 한국의 영적 거장들이 벼랑끝으로 몰렸습니다. 불신자들이 교회를 비난합니다. 무엇보다도 정말 롱런할 만한 신실한 사역자, 목회자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입니다. 한국교회를 든든하게 버텨줄 기라성같은 영적 거인들이, 잠재된 거인들이 지금 깨어날 시점입니다. 그러한 영적 파워풀한 바탕을 가지기 위해선 일단 ‘내면적인 지속성’이 필요하다. 지속적으로 훈련된 내면세계가 필요하다.
잠 4:23 “그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키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잠언 저자는 하나님을 위한 많은 일을 하라고 하지 않고 마음을 지키라고 저자는 먼저 이야기합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이 마치 사라져 버리는 불꽃과 같이 끝나버리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많이 했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와 교제하는 데 시간을 많이 들였기 때문에 마무리를 잘 할 수 있으셨습니다. 전심을 다하는 지속성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과 더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 시간을 사용하여야 합니다. 삶의 여정에서 놀라운 일들을 이루셨지만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고 계속 지켜 가신 예수님처럼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Keep the Faith!
아사왕은 처음과 끝이 달랐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은 각각 40년씩 보위에 있으면서 나라를 다스렸다. 그 후에 연이은 왕들 중에서 처음으로 41년을 보위에 있은 왕이 바로 유다의 아사왕이었습니다. 정권이 길었다는 것은 그만큼 축복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15:16에 아사의 어머니가 마아가로 나옵니다.
근데 모친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옘’은 어머니 뿐만 아니라 할머니를 지칭하기도 합니다. 어머니가 일찍 죽고 어린 나이에 왕웨 오른 아사에게 할머니가 거의 어머니 역할을 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좋은 영향력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다고 나옵니까?
아사 왕의 어머니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목상을 만들었으므로
아사가 그의 태후의 자리를 폐하고 그의 우상을 찍고 빻아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니
자기를 금지옥엽처럼 키워준 할머니 태후 마아가를 폐위시키면서까지 우상파괴를 단행했습니다. 대단한 독한 인물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바른 일을 행한 아사왕에게 축복을 주셨는데, 먼저 평안을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으므로 그 땅이 평안하여 여러 해 싸움이 없은지라 그가 견고한 성읍들을 유다에 건축하니라(대하 14:6)
이런 평안과 안정의 이유는, 7절에 나옵니다.
아사가 일찍이 유다 사람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아사왕의 평안의 비결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아사는 이런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 오늘날의 에티오피아인 아프리카의 강대국, 구스왕 세라의 100만 대군(아사왕 군대: 58만명(방패와 창을 잡은 자/30만명, 작은 방패를 잡으며 활을 당기는 자/28만 명))도 물리치는 업적을 쌓게 됩니다. 그의 믿음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11절)
아사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재위 41년 동안 35년까지는 하나님을 잘 섬겼기에 성경에 그 동안은 전쟁이 없었다고 말합니다(15:19).
그런데 마무리가 좋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아사왕이 쳐들어왔을 때 아사왕은 이전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바아사와 동맹관계에 있었던 아람 왕 벤하닷을 돈으로 매수하여, 뇌물을 이용하여 용병을 이스라엘로 출병하게끔 만듭니다. 이런 그의 정치적인 책략은 굉장히 지혜로운 것 같으나, 결과적으로는 유다의 대적이었던 아람을 멸할 기회를 놓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늑대를 몰아내기 위해 호랑이를 끌어들여 큰 화를 자초한 셈입니다. 후에 아람은 유다를 공격하고 괴롭히는 화근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 지속성의 결여에서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작과 끝이 분명한, 한결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한 순간은 누구라도 반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적으로 일관된 믿음을 가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학입학때부터 대학졸업때까지 믿음이 한결같기는 쉽지 않습니다. 군대들어갈 때랑, 나올때랑 믿음이 지속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싱글일 때랑 더블일 때랑 믿음에는 또 차이가 있습니다. 결혼하기 전과 결혼한 후 믿음의 강도도 역시 차이가 있고, 애기를 가질때마다 생각과 신념은 바뀔 수 있습니다. 남자들은 군대, 여자들은 결혼이 믿음의 큰 시험대입니다. 거기서 승리하면 다른 부분에서는 승리가 오히려 수월해질 수 있습니다.
아사왕은 처음에는 35년 동안 너무나 잘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전심은 41년 중 35년까지만이었습니다. 그는 39년 말년에도 겸손하지 못하고 자신의 주제를 깨닫지 못하고 발병이 나서 죽었습니다.
아사가 왕이 된 지 삼십구 년에 그의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했으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16:12)
타락한 아사왕의 처참한 최후입니다. 탁월한 개혁가였던 그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은 그의 전심이 지속적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부흥과 성공과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겐 지속성이 문제였습니다!
에베소서 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전심으로 하나님께 향하는 자의 마지막, 세 번째 측면은 바로 ‘우선순위(priority)’입니다.
아사 왕은 믿음의 정상에 있을 때(재위 15년)는 전쟁의 전리품 중에서 소 700마리, 양 7,000마리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면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들은 대소 남녀를 막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독보적인 믿음의 대가였습니다(15:12-13). 하지만 그는 이제 하나님보다 사람의 도움을 의지하고 사람을 더 크게 의지하는 듯했습니다.
예배는 세상보다 크신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이다
몇 년 전에 제가 한 번은 심방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서 진동음이 계속 울리는 것을 보지 않고 살짝 닫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카톡메시지가 온 듯. 그래서 기도시간에 잠시 봤는데, 이런 문자가 있었습니다.
"딸아이(당시 2살)가 없어졌어!"
순간 너무나 충격을 받아 정신이 어리둥절했습니다. 그 문장이 장난으로 받아들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분명 내가 교회심방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연락을 한 것을 보면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 둘째가 없어졌단 말인가? 식은땀이 흐리기 시작했습니다. 기도시간이었기에 밖으로 나가서 전화통화를 붙들고 아내에게 소식을 전해듣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전화통화를 붙들다가 내가 아내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택시를 타고 시내를 가로질러 만약 어떻게 어떻게 간다면 적어도 30~40분은 소모될 것입니다. 만약 다른 상황이었다면 내가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예배시간이었다. 심방예배이긴 하지만 예배는 예배였습니다. 소식이 너무나 궁금했지만 참았습니다. 그 시간이 정말 엄청나게 길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너무나 조급하고 불안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인식적으로라도 생각하려고 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내가 지금 아내 옆에 없어서, 딸아이를 같이 찾을 순 없지만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고 우리의 생각보다, 우리 존재보다 더 크신 분이시기에 우리 딸을 찾아주소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면서 예배에 임했으나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습니다. 이성을 잃은 듯한 포스가 내게 임했습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파괴된 사나이'의 영상이 오버랩되는 듯했습니다. 그 영화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목사가 자기 딸을 잃어버리고 완전 패인이 된다는. 하나님께서 만약 우리 둘째를 데려가신다고 하신다면 나에게 무슨 훈련을 시키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단 말인가? 아들 하나만 잘 키워서 행복하라는 말씀인가? 다산은 네 본분이 아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정말 온갖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오늘따라 목사님의 설교가 더 길게 느껴졌습니다.
심방예배설교는 원래 간략하게 하시는데, 오늘따라 조금 더 길게 느껴졌습니다.
후에 목사님 왈,
"자기 혼자만 길게 느껴진 거네. 다른 사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하하하"
그랬습니다. 내 마음이 급하니 모든 게 그렇게 느껴진 것입니다.
예배가 무사히 마치고 급하게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서 통화를 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다시 두 번째로 통화를 시도했습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아내가 이제 겨우 애를 찾았다고 합니다. 처음으로 문을 열어놓고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큰 아들이 둘째 딸아이를 잘 본다고 생각하고 취한 행동인데, 큰 애가 둘째를 놓친 것입니다. 아들은 아파트15층에, 딸은 20층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어떻게 올라가긴 했는데, 내려오질 못해서 난간을 붙잡고 울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오! 정말 다행이다.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아내와 나는 감사의 말을 같이 나누고 전화를 마무리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보다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생각보다 크시고 넓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예배는 바로 그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입니다.
예배는 세상보다 크신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세상보다 크신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윤이를 찾게 하셨습니다.
우리 가정을 지켜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전심으로 제가 하나님을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세상보다 크신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할 때, 그 우선순위로 인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우선순위에 대한 탁월한 삶을 살았던 순교자, 선교사 짐 엘리엇!
28살에 사랑하는 아내와 딸 하나를 남겨두고, 살인부족 아우카부족에게 순교당한 그가 생전에 남긴 말이다.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지킬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He is no fool who give what he cannot keep to gain what he cannot lose)
올 한해 여러분의 시선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향하는 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비전인 한가족 새가족 축제 뿐만 아니라 모든 활동과 행사와 삶이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을 향한 전심이 느껴지길 바랍니다.
-질적인 측면에서!
-지속성의 측면에서 시작과 끝이 한결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탁월한 우선선위가운데 예배에 우선순위를 놓고 하나님을 향해 전심의 날개를 펴고, 열심의 달음질로 한 해를 달려가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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