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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역대상하

역대상 4장 9-10절, 야베스의 기도The Prayer of Jabez

by Message.K 2024. 3. 5.

한때 굉장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구약성경 역대상 4장 9-10절의 '야베스의 기도'에 대한 설교를 포스팅하고자 한다. 야베스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 알아보면서 그가 기도한 내용, 기도제목이 과연 어떠한지 해석해 보면서 영적인 유익이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역대상 4장 9-10절, 야베스의 기도The Prayer of Jabez 설교 썸네일
역대상 4장 9-10절, 야베스의 기도The Prayer of Jabez

 

 

 

 

그리스도인들의 혼동Chaos

우리는 날마다 기도하기를 원한다. 정말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마 7:7-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의 본문을 보면서 대단히 고무된다. 내가 원하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영락없이 그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을 숙지하게 된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지만 기도응답이 잘 되지 않는다. 왜 응답이 없지? 왜 하나님은 내 기도를 안 들어주시는 거지? 라고 생각하면서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날 성경을 펼쳤는데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약 4:3-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Ye ask , and receive not , because ye ask amiss , that ye may consume it upon your lusts‘

  

이 말씀을 보면서 자신이 구한 것이 다 정욕을 위한 것임을 누차 깨닫고 그렇다면 기도는 어떻게 드려야되는가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이 원하는 복, 자신이 구하고자 하는 복에 대해서 여러모로 생각하다가 주저앉게 되는 경우가 여러분의 삶에서도 얼마간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러한 경험을 한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 야베스의 기도를 살펴보면 대단히 이색적으로 기도가 출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복에 복’을 더해달라는 다소 개인적인, 심지어 기복신앙이 아닌가 하는 의아함을 품을 수밖에 없다. 차차 이 부분에 대해 같이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하는가?

 

 

 

  기도는 어떻게 드려야하는 것일까?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역대상의 그 수많은 인명의 물줄기들인 족보, 계보들 속에 유일하게 2절에 걸쳐 색다른 설명을 첨가하고 있는 야베스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의 기도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야베스, 그는 누구인가?

개역성경은 '야베스'라고 표기하지만, 히브리어로는 '야으베츠'다. 이런 차이는 히브리어를 우리말로 음역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개역식 음역방식이다.

 

야베스는 누구인가? 우선 '야베스는 남자인가? 여자인가?'를 묻고 싶다. 아마 대다수 사람들은 야베스를 '남자'라고 할 것이다. 다행히 우리의 예상대로, 히브리어 성경은 9절 맨 처음에 나오는 동사를 3인칭 남성단수 (와예히 <yhiyw>)로 사용했다. 그렇기 때문에 야베스는 분명히 남자다. 이렇게 해서야 비로서 우리는 야베스가 남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성경기자는 야베스에 대한 이야기를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였다'

 

라는 말로 시작한다. 성경기자는 야베스라는 이름을 누가 지어주었느냐는 이야기를 한다. 야베스는 어머니가 이름을 지어준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나타난다. 아들 이름을 지어주면서도 어머니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이다. 본문기자는 어머니 이름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두 가지 효과를 노리는 것으로 보인다.

  • 첫째는, 자녀들을 위해서 뒤에서 묵묵히 헌신하시는 어머니 모습을 보여주고,
  • 둘째는, 야베스 어머니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냥 어머니라고 함으로써 모든 어머니들을 본문 속으로 이끌어들이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히브리 문법에서 동사문장은 동사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주어가 나온다. '이름을 지어주었다 어머니가' 이런 순서다. 그런데 순서가 바뀌어 있다. 우리말 순서대로 어머니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이름을 부른다. 이것은 주어, 즉 '어머니'를 강조하는 것이다. 누가 이름을 야베스라고 지었는가? '어머니'가 이름을 불러주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어머니가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우리 정서에는 맞지 않는 일이다. 우리는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주지, 할머니나 어머니가 이름을 지어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할머니나 어머니가 이름을 지어주었다면, 그것은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살아 계시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혹시 야베스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태어난 유복자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야베스 어머니가 야베스를 고통 중에서 출산했다는 다음 구절을 이해하는 데 약간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야베스의 이름의 뜻은 무언가?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고 말한다. 야베스의 이름은 즉 ‘아픔을 주는 자’, ‘고통을 주는 자’라는 뜻이다. 이것은 야베스의 어머니가 아기를 출산하면서 대단히 힘든 고통을 경험하지 않았나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야베스를 출산할 때 야베스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거나 집안의 경제적인 환경이 벼랑 끝에 서 있거나 가문의 몰락이나 뭐 그러한 상상을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젠가 저희 어머니께서 ‘내가 너를 낳을 때 얼마나 힘들었지 아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왜?’라고 묻자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머리가 커서 출산하는데 얼마나 힘들었다고’고 응수하셨다. 그 때 어머니의 눈동자가 발개졌던 것을 목격했던 적이 있다. 야베스가 출산했을 때의 그의 어머니의 고통은 나의 어머니의 고통보다 더했던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하필이면 ‘기쁨을 주는 자’, ‘희락을 거머쥐는 자’이런 이름이 아닌 ‘아픔, 고통을 주는 자’라고 지었을까? 아무리 히브리인들의 사고방식과 우리나라의 사고방식이 다르다고 하지만, 아이의 이름을 그렇게 슬프게 지을 수밖에 없는 야베스의 어머니의 맘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야베스는 그렇게 수월하게 살아가지 않았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성경에 다른 언급이 없기 때문에 상상만 할 뿐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야베스가 세상에 눈을 뜰 때 그는 분명히 고통 중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름조차도 그리 밝지 못한, 어두운 이름의 주인공 ‘야베스’가 과연 어떠한 기도를 하나님께 아뢰었는지 살펴보자.

 

야베스의 기도The Prayer of Jabez의 기도이다.

 

1. 야베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하나님은 구하는 자를 더 선호하신다. 구하는 자에게 더 약하시다!!!

  야베스가 한 말이 직접화법으로 우리에게 전달된다. 10절을 야베스의 기도라고 해야할 것이다. 야베스가 드린 기도는 히브리어 '임'으로 시작한다. '...한다면', 즉 if 문장으로 되어 있다. 히브리어로 읽는 사람들은 야베스가 어떤 조건을 걸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해주기만 한다면, ....하겠다'나 아니면 '...해주기만 한다면 좋겠다'는 식의 문장이 나올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계속 읽어봐도 조건 절로만 끝나지 그 다음 문장이 나오지 않는다(-하였더니). 문장이 불완전하다. 야베스의 기도는 완결되지 않은 채 끝난다. 본 문장은 말하지도 못하고, 조건 절만 말하는 야베스의 모습. 이런 것에서 우리는 야베스가 얼마나 처절하게 하나님께 간구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만약 문장이 완결되었다면, 그 여운이 덜했을 것이다. 야베스가 단순히 몇 번 구하고 치워버린, 포기해 버린 기도의 제목이라면 결코 이 역대상의 족보들 가운데 갑자기 ‘존귀한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야베스였다’라고 기술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이 기도는 ‘야베스의 기도’라고 못박을 정도로 야베스가 평생 기도하였던 내용이었는지 모른다. 야베스는 어쩌면 자신의 출생의 불운과 슬픔과 우울한 기운, 이름에서 주는 비극적인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서 더 필사적으로 기도했는지도 모른다. 야베스는 끈질기게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아뢰었다. 비극의 운명을 운명 탓하지 않고 그는 기도로 희극의 운명을 개척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여러분 중에 운명 탓하는 분이 계신가? 야베스에게 위로를 얻어라. 그리스도인에게는 비극적인 운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비극을 희극으로 바꾸는 운명의 열쇠가 바로 ‘기도’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해 보라!

 

 

 

2.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야베스는 기복(祈福)신앙의 대표적인 선두주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복은 언제나 성경의 원천적인 주제였고 테마였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새해가 되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을 한다. 미국 사람들은 누가 재채기를 하면 옆에 있던 사람이 ‘God Bless You’라고 응수한다. 그러다 보니 복, 축복은 다소 ‘좋은 하루 되세요’라는 정도의 애매모호한 말,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말 정도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적인 의미에서 ‘복’이라는 말은 사람의 힘으로 얻지 못하는 초자연적인 은혜를 의미한다.

  하나님께 복을 구할 때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취할 수 있는 것에다 조금 더 보태는 정도가 아니다. 하나님만이 아시고 주실 수 있는 놀랍고도 무조건적인 은혜를 베풀어주시도록 부르짖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잠 10:22)

 

야베스는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었으며 그의 성품에 ‘복에 복’을 구하였다. 그것은 단순한 기복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과 목표와 뜻’이라는 거대한 강물 속에 자신을 던진 것이다. 야베스는 앞에서 말한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한’ 그런 기도를 드리지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10절 마지막 부분에 하나님은 분명히 그의 기도를 허락하셨다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야고보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 4:2)라고 못 박고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는 끝이 없는데 어제의 복을 우리가 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제 받았어야 했을 복을 다 받지 못한 셈이다. 그게 바로 문제다.

  

기도는 할수록 는다는 말이 있다. 야베스가 일년에 한 두 번 금요철야 기도회 참석하고 어쩌다가 대표기도 한 번씩 하고 그랬다면 그의 기도에 ‘복에 복’은 단지 ‘호화로운 저택과 그 앞에 넓은 정원과 푹 쉴 수 있는 풀장과 3500cc-4000cc의 멋진 자가용과 미모와 몸매가 출중한 아내와 쉴새 없이 불어나는 물질적인 복’ 뭐 이러한 것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베스는 끈질기게 하나님께 아뢰었다는 데서 야베스의 기도의 ‘복에 복’은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다른 풍성한 성질의 것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야베스는 기도의 초보가 아니라 기도에 있어 성숙한 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결코 야베스가 가난하고 궁핍하게 살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야베스가 구한 것은 단순한 그런 기도보다 더 탁월하고 초월적인 ‘복에 복’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기도의 깊이가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기도를 대단히 열심히 하다가 신비주의로 흐르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야베스는 기도와 말씀의 균형을 유지한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본성이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기도로 구하였고 그 응답을 삶 속에서 체험하였던 것이다.

 

출 33:18에서 모세는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기도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싶어하는 모세의 열정이었다. 모세의 이러한 철딱서니 없는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셨고 하나님은 얼굴을 보이시지 않고 ‘등’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등’을 본 사람은 유일하게 모세 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자(者)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모세가 전무후무한 유일한 목격자이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한 사람도 모세 밖에 없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풍성하신 복은 하나님의 자원이나 능력이나 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 때문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자신 때문에』 제한을 받고 있다. 야베스는 그 어떤 장애도, 그 어떤 사람도 혹은 그 어떤 주장도 하나님의 본성보다 더 크게 확대해 보지 않기로 하였기 때문에 복을 받았다. 복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이다.

 

 

 

3.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야베스는 큰 복을 달라고 간구하는데, 그것만을 원하지 않는다. 이어서 '당신이 내 영역을 넓혀주시기만 한다면...'이라고 말한다. 영역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게불은 영토를 말하기도 하고, 영역 또는 지역, 그리고 어떤 한계나 경계를 말하기도 한다. 영역을 넓혀달라는 것은 한계나 장애를 없애달라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야베스가 활동을 하는데 여러 가지 장애로 인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계나 장애를 없애달라는 말을 '지경을 넓혀달라'는 것으로 표현해서, 독자들에게 시각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처한 한계상황을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야베스처럼 하나님께 기도하게 한다. 여기에서 야베스가 어쩌면 ‘신체장애자’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니면 굳이 그렇지는 않을지라도 다른 어떤 부분에서 무언가 활동하기 힘든 한계가 없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도 있다-그것이 환경적, 신체적, 정서적, 물질적인 이유든지 간에-.

 

그런 것들을 접어두고서라도 야베스의 요청은 혁신적인 것이었다. “하나님, 제게 복을 주세요!”라고 노골적인 기도내용이 평범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 제가 더 많은 일을 하게 해 주세요!”라고 간구하는 기도도 흔하지 않는 것이다. 현대인은 너무나 바쁘기에 무슨 일이든-그것이 심지어 교회 일이든, 영혼을 위한 일이든- 덜 하기를 원하지, 더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야베스는 그걸 뒤집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연약함에다 하나님을 초청하고 있다. ‘내 활동반경에 장애가 없도록, 내 삶의 영역의 경계가 없도록’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우리 스스로 ‘경계’와 ‘한계’를 지워버리고 점점 우리의 ‘지경’을 좁히기에 힘쓴다. 그러나, 야베스는 달랐다.

‘기적을 일으키시는 주님, 저를 사용해 주십시오.
제가 더 많은 사역을, 더 많이 남기는 일들을 할 수 있도록 주십시오.’

 

-요한 웨슬레의 죽은 후의 시신 부검 결과-“모든 것이 다 닳아빠져 죽은 것이다-정말 말 그대로 기력이 소진될 대로 소진되었다는 말이다.

 

 

 

4.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야베스는 또 이렇게 기도한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히브리어로는

'당신의 손이 나와 함께 하게 하소서'

 

라는 말이다. 이 기도는

 

“손을 내밀어서 넘어진 자를 일으켜 달라는 간청”

 

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지쳐 쓰러진 야베스를 상상한다. 그의 연약함과 한계로 인해 쓰러졌거나 더 많은 지경을 위해 일하다가 낙담하여 넉다운 되었을 때, 기진맥진한 채 땅에 엎드러져서 간신히 얼굴을 들고 하나님께 도와주시기를 간구하는 야베스의 모습을 연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구절은 매우 시각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야베스에게 있어서 『주의 손』은 언제나 그를 도우고 위로하고 고무하고 박차를 가하게 하는 유일한 도움이요, 피난처였던 것이다.

 

 

 

5.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나님. 내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데, 제 힘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 가지 장애가 많습니다. 나를 가로막는 것들이 많습니다. 하나님. 그 장애물들을 제거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내가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주옵소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옵소서.

 

마지막 간구는 '나로 환란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이다. 여기서 '나로 환란을 벗어나'는 히브리어로는 '당신이 악한 일로부터 행하셔서'다. 악한 일, 즉 재난을 환란으로 번역한 것은 좋다고 본다. 그런데 '당신이 악한 일(재난)로부터 행하소서'는 불완전한 문장이다. '악한 일(재난)로부터'와 '행하소서' 사이에는 무엇인가가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 완전한 문장이 된다. '당신이 나를 악으로부터 구원하소서 그래서 내가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왜 야베스는 '나를'과 '구원'을 생략했을까? 때로는 이렇게 불완전한 것이 더 자연스러울 때도 있다. 사람들은 마음이 간절하거나 감정이 북받쳐 오를 때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럴 때는 말을 문법에 맞추어서 제대로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런 상황에서 말을 제대로 다 하면 가증스럽게 여겨지기까지 한다. 할 말을 차마 다하지 못하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오히려 야베스의 절실함을 더 생생하게 느낀다. 이런 불완전함이

'하나님, 가만히 계시지 말고, 제발 나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주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하실 수 있는 뭔가를 해주십시오'

 

하는 더 간절함을 표현해주는 것이다.

 

그런 다음 야베스는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데, 이것은 '내가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이다. '근심'보다는 '고통'이 뉘앙스가 더 강하다. 그런데 야베스가 고통을 없이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야베스가 현재 고통 가운데 있다는 것 아닌가? 앞에서 살펴보았던 대로, 여기서 '고통'(오체브)은 바로 야베스(야흐베츠)라는 이름이 나온 그 단어다. 그렇기에

'야베스'는 <고통 가운데서 태어나서 고통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고통을 없애달라는 것은 야베스에게서 야베스를 없애달라는 것이다. 야베스를 야베스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달라는 것이다. 야베스 없는 야베스. 고통 가운데서 태어나서 고통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그가 당하는, 그가 지금까지 당하면서 살아온 그 고통을 없애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야베스의 고통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엄청난 시련이었을 것이다. 그의 절규에 가까운 기도를 우리는 보고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야베스의 기도는 ‘주기도문’을 연상케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는 사분의 일에 해당하는 부분이 ‘보호’에 관한 것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6:13)

  

우리가 더 많은 복과 넓은 지경 그리고 더 많은 능력을 구하기를 바라시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악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하는 음성을 듣고 싶어하신다. 더 많은 복, 더 넓은 지경, 더 많은 능력이 주어졌다면 그 만큼 더 많은 유혹과 시험에 노출되기 쉽다. 유혹을 받지 않고도 죄를 짓는 일은 없다. 우리들 대부분 시험에 들지 않게 해주시기를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너무나 많은 유혹을 받게 되고, 그래서 너무 자주 죄를 짓게 된다. 하늘의 모든 군대를 지휘할 수 있으셨던 예수님께서도 보호해 주실 것을 기도하셨다. 그분의 모든 영적인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사단의 유혹적인 제안에 길게 얘기하는 것조차 거절하셨다. 기적적인 영역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경험을 하면서 죄와의 전쟁을 가장 효과적으로 다루는 방법은 유혹에 맞서 불필요하게 싸우는 일이 없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그렇게 되도록 그분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허락해 주실 것이다.

 

 

 

6....하였더니

앞에서 말한 대로, 야베스는 여기까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해주신다면'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내게 복에 복을 주시고, 내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해주기만 한다면'이라고 기도한다. 그리고는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시기만 한다면 어떻다거나 어떻게 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본문은 불완전하게 끝난다. 그런데 이런 불완전함이 독자들로 하여금 더 적극적으로 본문에 개입하게 만들고, 그럼으로써 야베스가 드린 기도를 더욱 감동적인 것으로 만든다.

 

 

 

7.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이제 본문 마지막 구절을 읽어보자. 본문은 이렇게 끝난다.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약속한 것을) 이루게 하다'는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이 ...로 하여금 ...하게 해주셨다','하나님이 이루어주셨다,' '하나님이 실현시켜 주셨다'

 

는 뜻이다. -'하나님이 (야베스가 원하는 일을 하도록) 허락하셨다'...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것은 '야베스로 하여금 그가 하기 원하는 것을 하도록 해주셨다'는 뜻이어서 하나님은 수동적이고 야베스가 주도적이지만, '하나님이 이루어주셨다'는 것은 야베스가 원한 것을 하나님이 나서서 다 이루어주셨다는 것으로, 하나님이 주도적이다. 하나님이 야베스가 그토록 간절하게 구한 것들을 직접 다 이루어 주셨다, 다 실현시켜 주셨다는 것이다. 야베스는 구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이뤄주시는 분이다.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야베스'를 우리 자신으로 대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야베스의 이름 대신 자기의 이름을 넣어보자)

 

  •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 And Jabez was more honourable than his brethren : and his mother called his name Jabez , saying , Because I bare him with sorrow .-수고로이 낳지 않은 세상의 아들, 딸이 어디에 있겠는가?
  •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 And Jabez called on the God of Israel , saying , Oh that thou wouldest bless me indeed , and enlarge my coast , and that thine hand might be with me, and that thou wouldest keep me from evil , that it may not grieve me! And God granted him that which he requested .

 

-야베스의 기도가 여러분의 기도가 되기를 바란다. 아침마다, 아니 날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구하는 자들로 세워지기를 바란다.

  •  하나님의 그에 대한 평가-‘야베스가 그 형제들보다 존귀한 자'
  •  ‘야베스는 존귀한 사람이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셨기 때문이다'...할렐루야

우리 다같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조목조목 잠시 ‘21세기의 야베스의 기도’를 하나님께 아뢰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

 

역대상 4:9-10의 본문을 가지고 '야베스의 기도'에 대한 설교를 포스팅했는데, 먼저 야베스는 어떤 인물인지, 이름의 뜻과 배경을 알아보았고, 야베스가 조목조목 기도했던 문장들을 심층적으로 한번 살펴보면서 해석한 내용을 담아 보았다. 우리도 야베스의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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