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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사사기.룻기

사사기 10장 1-5절, 돌라와 야일 He is there, He is not silent

by Message.K 2023.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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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사기 10-15절에 등장하는 소사사, 돌라와 야일의 짤막한 구절들을 살펴보면서 사사기의 분위기, 흐름, 이들의 존재감과 의미, 그리고 여전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는  포스팅이자 설교, 묵상이 되겠습니다. 

 

 

돌라와 야일의 이야기는 정말 그냥 그들이 사사로 있긴 있었다는 느낌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업적이 있었는지 구체적인 진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돌라와 야일: "두 폭풍 사이의 고요"

돌라에 대해선, '... 돌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1절)라는 구절 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야일에 대해선 구원에 대한 이야긴 없고 그냥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 사사가 되니라'(3절)는 말 밖에 없습니다. 이에 대해 McCann은 '돌라와 야일의 이야기는 마치 두 폭풍 사이의 고요라고 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두 폭풍은 기드온과 입다를 의미합니다. 

 

 

또한 기드온의 이야기가 '사사기의 전환점'turnning point를 맞이했는데요. 바로 기드온 이야기 이후로부터 사사 시대는 일종의 '내란'을 경험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기드온이 미디안을 물리친 다음 동족인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을 죽였다는 점, 아비멜렉이 세겜 사람들을 죽이고 데베스를 징벌하다 죽었다는 점, 그리고 잠시 후에 등장할 입다 역시 동족인 에브라임 사람들과 전쟁을 치르게 된다는 부분입니다. 입다 시대에 이르러 가장 큰 내란을 이스라엘이 겪게 된다는 부분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동족 간의 폭력 수위가 높아지고 죽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이 특이한 대목입니다. 

 

 

 

 

기드온은 숙곳의 장로 77명을 '들가시와 찔레'로 쳤고, 브누엘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들을 죽이고 데베스 사람들마저 죽이려 했습니다. 입다는 42,000명에 달하는 에브라임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내란에서는 베냐민 지파가 전멸하다시피 합니다. 내란의 규모가 점점 커져가고 있습니다. 

 

 

이런 내란들의 이야기 가운데 사사기 기자는 사사들의 평온한 시대를 끼워 놓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아비멜렉(6-9장) VS 입다(10:6-12:7) 이야기 사이에 돌라와 야일(10:1-5)

-입다(10:6-12:7) VS 삼손(13-16장) 이야기 사이에 입산-엘론-압돈의 평온한 시대(12:8-15)이 끼여 있다는 점입니다.

 

 

대사사들 틈바구니에 등장하는 소사사, 특히 제일 먼저 등장한 소사사는 삼갈(3:31)이었고,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 두 번째 소사사는 돌라와 야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입산, 엘론, 압돈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 소사사들의 숫자가 1-2-3으로 점층 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의 내란이 커지는 것을 암시하면서 동시에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 걸맞은 휴식을 주기 위함이라고 주석학자들은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사사, 돌라

돌라에 대해 설명하기를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사들 계보 중에 3대의 이름을 등장하는 특이한 구석을 보여주고 있는데, 돌라가 유일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돌라가 사회적 경제적으로 좋은 집안 출신임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돌라는 '지렁이'라는 뜻을 지닌 이름으로, 이전의 '아비멜렉'(Myfather is king)이란 의미와는 대조적인 겸손한 이름입니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돌라가 사사로 한 일에 대한 유일한 언급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라는 말만 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서 구원했는지도 언급이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비멜렉 사건 이후로 엄청난 혼란과 무질서가 야기된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해석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아비멜렉이 기드온의 70명 아들을 죽이고 자신이 3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그 모든 사건이 이스라엘의 붕괴 직전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의 아들, 배다른 형제들 70명을 죽이는가? 권력욕에 미쳐 날뛴 아비멜렉, 그는 여종이자 첩의 아들, a slave girl의 아들이기도 했습니다. 돌라가 이런 맨홀 속으로 깊이 빠진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시각도 나쁘진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이는 추측에 불과합니다. 그는 아비멜렉 사건 이후 이스라엘의 사사로 23년을 살았다고만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사, 야일과 30이라는 숫자

돌라의 뒤를 이은 사사는 야일입니다. 야일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빛을 발하시리라'입니다. 그는 잠시 후에 등장한 입다와 같은 요단 강 동편에 위치한 길르앗 출신입니다. 같은 지역의 출신이지만 둘의 통치와 라이프스타일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야일은 너무나 평온했고, 반대로 입다는 혼란과 갈등이 넘치는 시대였습니다. 

 

 

야일은 사사였다는 말만 하고 있지 구원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습니다. 그의 시대는 평화로운 시기였고 전쟁을 하지 않은 사사는 야일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는 22년간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굉장히 어색한 기술은 대면합니다. 그런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보았던 느낌, 바로 기드온이 부인이 많아서 아들들이 70명이었다는 대목과 겹치는 느낌입니다. 

 

사사기 10:4
그에게 아들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을 가졌는데 그 성읍들은 길르앗 땅에 있고 오늘까지 하봇야일이라 부르더라 

 

 

이스라엘의 사사 시대는 기드온-아비멜렉의 큰 풍파를 지나면서 돌라-야일 시대에 굉장히 평화롭게 지나쳐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곧 입다가 몰고 온 폭풍우가 기다리고 있는데요. 야일에게는 아들이 30명, 그런데 입다에겐 무남독녀가 있었다는 것이 대조적입니다. 입다의 출생 또한 특별하기도 하죠. 입다는 '기생의 아들'(11:1)이었으니깐 말이죠. 아들이 30명이었다는 것은 그만큼 풍요로웠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전쟁이 있었다면 그랬을까요? 기드온 사사통치 40년간 평화로우면서 아들을 70명이나 낳았는데, 야일은 22년 동안 아들을 30명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들이 어린 나귀를 탔다고 했는데, 아들들마다 자가용이 하나씩 있었던 셈이네요. 말이 흔하지 않은 시대에 나귀는 고대 근동 사람들에게 부와 권위와 평화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읍도 30개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은 아들 30명이 저마다 자기들의 성을 가지고 있었다, 영주처럼, 왕조처럼, 왕처럼 살았다는 말입니다. 엄청난 재력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평화도 야일이 죽자마자 암몬 사람들의 통치를 받게 되는 것을 볼 때 야일의 아들들은 아버지와는 비교할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나 봅니다.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살아온 자녀들에게 무슨 자생력과 내구성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자손이 많이 낳은 것은 구약시대에 하나의 축복입니다. 야일은 그런 번성함의 축복을 받은 인물입니다. 그만큼 풍요로웠습니다. 30명의 아들, 30마리의 나귀, 30개의 성읍... 요즘 말로 하면 자식들이 다 자기 집이 있었다는 말이고, 자기 차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게 단순한 집이 아니고 '성읍'이라고 했습니다. 자기들만의 성, 왕국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사사, 야일에게는 구원이란 단어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야일에게 '구원'이란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평화롭고 배부르고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것만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돌라에겐 아비멜렉 사건 이후의 이스라엘 멘붕을 해결했다고 추측이나 해 볼 수 있는데, 야일에겐 구원의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는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달아보실 때 무엇을 보실까요? 부자든, 빈자든, 잘 사는 사람이든, 못 사는 사람이든 간에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것은 '시간'입니다. 돈, 자산, 재산, 재력은 다들 소유의 크기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은 시간입니다. 그 인생이란 시간 속에서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체크하실지, 무엇을 달아보실지 한번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에 '구원'이란 단어가 존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야일의 행적이 어떠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순 없습니다. 그가 통치할 동안에 평화로웠다는 것은 그가 통치를 잘 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꾸어 생각해 보면, 역사는 항상 어제의 결과를 오늘의 열매로 성취해서 먹기 때문에 과거의 사사들의 처절한 영적 전쟁의 결과물로 이렇게 평화가 온 거이지, 야일이 잘 나서 그렇게 되었는가 하는 것도 한번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야일이 제대로 사역했다면 그의 사후에 또다시 이스라엘이 패역의 길로, 타락의 길로 가진 않았을 테니 말이죠. 그리고 평범한 출신이 아닌 아주 비범한 출신의 입다를 사사로 하나님께서 세우실 리가 없는 일 아닐까요?

 

 

 

 

He is there, He is not silent

이스라엘의 사사시대는 이렇게 혼돈스러웠다가 다시 평화롭게 되고 다시 또 무질서로 빠져들고 다시 평화롭게 되고 이런 사이클을 반복하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항상 평화롭지만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항상 위기, 리스크가 있었다는 것이고, 그 리스크에는 거기에 걸맞은 인물, 사사를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사사가 누구이든지 간에 이스라엘의 배후에는 항상 하나님이 살아계셨다, 거기 계셨다는 점입니다.

 

기드온의 죽음 이후에 부각되는 아비멜렉의 파괴적인 행동 앞에 사람들은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습니다. 잔인하고 비열한 그의 행적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사사기 9장에서 하나님은 3년 만에 아비멜렉을 심판하십니다. 

 

사사기 9장 
53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 던져 그의 두개골을 깨뜨리니
54 아비멜렉이 자기의 무기를 든 청년을 급히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 하니 그 청년이 그를 찌르매 그가 죽은지라
55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비멜렉이 죽은 것을 보고 각각 자기 처소로 떠나갔더라

 

감당할 수 없는 캐릭터를 어처구니 없는 방법을 통해 해결해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전쟁에서 거의 승리를 따 놓은 당상이었던 아비멜렉이었는데, 한 여인이 던진 맷돌 위짝을 맞고 죽습니다. 하나님은 사사 시대에 걸쳐 전방위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항상 위기가 있으면 평안이 있고, 평안이 있으면 위기가 또 찾아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주석학자는 이스라엘이 사사시대를 지나가면서 점점 더 하나님께로부터 등을 돌리는 횟수가 많아지고 인터벌이 짧아졌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게 바로 죄인의 모습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요. 

 

 

 

 

오늘은 사사기 10장 1-5절에 나오는 소사사, 돌라와 야일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았습니다. 평안하다고 너무 좋아할 것도 아니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늘 깨어있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본분과 책임을 느끼게 하는 설교, 묵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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