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구약성경 사무엘하 6장의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주인공인가? 들러리extra인가?'라는 주제로 설교한 내용인데요. 웃사의 죽음에 대한 이유를 고찰하고 이에 반한 다윗의 열정적인 예배의 모습, 그리고 미갈의 조롱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남, 녀 주인공이 나온다. 그런 사람들을 우린 주인공이라고 한다. 하지만 깜짝 출연이나 잠시 한 컷을 위해 출연하는 사람을 가리켜 엑스트라라고 한다. 엑스트라는 있어서도 되고 없으면 다른 사람으로 대치해도 되는 별 볼일 없은 역할이다. 우리 인생의 문제를 두고 보자.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공인가? 아니면 엑스트라인가? 들러리인가?
언제나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우리가 주인공이라는 의식이 들 때가 있는 반면에, 우리가 때로는 저만치에 팔짱을 끼고 앉아 수수방관만 하며 태연자약하게 방관자로, 구경꾼으로 있을 때가 있다. 오늘 이 시간 예배를 드리는 순간 조차도 우리는 주변인이나 아니면 구경꾼, 들러리로 앉아 있는지 아니면 주인공으로, 주인의식을 가지고 앉아 있는지 자문해 보는 것도 필요할 지 모르겠다.
중.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에 수업을 듣는 많은 학생들은 엉덩이를 의자에 걸치고 앉아 있지만 그 중에 수업을 열심히 경청하는 수업, 학업의 주인공이 있는 반면에 수업에는 관심이 없고 이리저리 딴청을 부리며 수업은 자신의 인생에 아무런 도약도,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는 식의 방관자가 있다. 직장생활을 할 때도 늘 ‘이건 내 인생이 아니야, 내가 원하는 푸르고 푸른 인생의 진면목은 이게 아니었어’, ‘다 누구 때문에 그래, 누구 탓이야’라고 하면서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들러리의 인생을 사는 사람도 있다. <진정한 주인의식>은 우리의 삶의 구석구석, 우리의 삶 전체에 심각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내가 지금 내 자신이 진정한 주인공으로 서 있는가? 아니면 남의 뒷꽁무니만 쫓는가? 아니면 상황과 환경과 여건에 치여서 고만고만하게 살고 있는가? 그런 질문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늘 던져야 할 질문이다.
무명한 제프 톰슨이 유명한 제프 톰슨이 된 것은 '주인의식'
제프 톰슨이란 사람은 30년 동안 자신은 공장에서 기름때를 묻히며 자신의 꿈을 포기한 채 생계를 위해 늘 고민하며 번뇌하며 찌들려 살았다. 자신이 하고자 했던 ‘작가’라는 꿈을 이루고 싶었지만 가족과 집세, 할부금, 세금, 세 아이, 고양이, 기타 등등의 모든 것들이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내에게 화학회사라는 탄탄한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하자 아내는 밀가루라도 뒤집어 쓴 표정으로 하얗게 질려서는 ‘그럼 뭘 먹고 살아요? 게다가 집세는 어떡하고, 만약에 사업이 잘 안 되면 어떻게 해요? 만약에…’ 제프 톰슨은 아내가 하는 말 ‘만약에’라는 단어가 서너 번 반복되는 동안 자신의 푸른 꿈은 하나의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곱씹어야만 했다. ‘그렇게까지 끔찍한 직장은 아니쟎아요. 조금만 더 노력해 봐요. 아버님도 공장에 잘 다니셨쟎아요.’ 그런 자신의 아내의 말에 제프 톰슨은 자신의 모든 야심과 꿈과 욕망의 싹은 잘려져 버렸고 스스로 되물었다.
‘도대체 왜 그래? 네가 뭐 대단한 인물인 줄 알아? 지금 다니는 공장이 뭐 어떻다고 그래? 수입도 그 정도면 됐고, 아버지도 잘 다니셨쟎아!’
그러나 제프 톰슨은 작가 외에는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자기 스스로도 작가가 되는 것은 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제프 톰슨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기름 때 찌든 공장에서 안주했다. 제프 톰슨은 그렇게 상황과 환경과 여건들을 탓하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상처럼 늘 반복되는 자신의 하소연을 듣고 있던 아내가 뜻밖의 대구를 했다. 그렇게 싫으면 그만 투덜대고 정말 좋아하는 일을 시작해 보라는 것이었다. 드디어 떨어진 아내의 허락에 놀란 그는 거의 뒤로 넘어질 뻔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순간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던 것은 아내가 아니었다. 자신이 끔찍한 공장에 묶여 있었던 건 아내의 탓도, 직장 선배나 동료의 탓도 아니었다. 전적으로 자신의 탓, 내 탓이었던 것이다. 그 길을 선택한 당사자는 바로 나였으니깐.
‘그 때까지 나는 현실을 회피하고 싶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비겁자였다’.
더 나은 삶을 선택할 수 있는데도 겁이 나서 머뭇거린 것은 순전히 내 탓이었다. 아내의 허락이 떨어지는 순간, 눈앞을 가리고 있던 막이 벗겨지면서 남을 탓하며 미적거리기만 하던 비겁한 내 모습을 똑 바로 알게 됐다.
그 후 제프 톰슨은 작가로서 명성을 단단히 얻었다. 나이트 클럽 경비원으로 근무했던 9년간의 경험을 담은 소설 ‘나이트클럽 경비원’, ‘뒤를 부탁해’, ‘문 앞에서’를 통해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는 유도가 1단, 가라테가 5단 검은 띠이며, 레슬링과 기타 무술 종목에서 수준급 솜씨를 자랑하면서 책도 몇 권 썼다. 연극, 영화, TV로 활동무대를 넓혀 대본과 데스티니 필름스에서도 제작중에 있다. 유명 TV프로그램에도 자주 등장해 인터뷰와 특유의 입담을 선 보였다. 그는 현재 멘스 피트니스의 고문이며, ‘프론트’의 칼럼니스트로 www.geoffthompson.com을 운영하고 있다.
제프 톰슨이 30년 동안 묵혀 썩었던 주인 의식을 다시 찾음으로 말미암아 그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진정한 주인의식과 주인공의식은 우리의 삶을 180도 다르게 구성하고 변화시켜 준다. ‘누구의 탓이며, 누구 때문이라는 식’의 변명은 우리의 자아를 더 갉아먹기만 하지 아무런 발전이 없다. 우리의 인생에 대해 찌들려 살아가는 듯한 패배의식과 실패감과 무력감은 제프 톰슨의 적이었고 원수였다. 한 사람의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가장 큰 동력과 힘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주인 의식’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들은 더더욱 그러한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죄의 문제도 그러할 뿐만 아니라 환경과 상황들에 노예가 되었다는 식의 변명과 핑계는 그리스도인 답지 못한 대구일 뿐이다. 정정당당하게 자신의 삶에 솔직하게 대면하여 부딪히고 싸워가는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믿음의 영역, 예배의 영역에 있어서도 우리는 제프 톰슨 같지는 않은가? 하나님과 나와의 진정한 만남이 있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예배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가? 아니면 아직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예배, 다른 사람들의 축제를 위한 들러리로 살아가는가?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주인공인가? 방관자인가? 주인공인가? 들러리인가?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인생에, 이 예배의 주인공인가? 아니면 구경꾼인가? 말씀을 들으면서 곰곰히 생각해 보길 바란다.
웃사의 죽음Dead Uzzah
오늘 사무엘하 6장의 처음은 법궤를 운반하는 일로 시작되고 있다.
법궤는 길이가 1.2미터 조금 안 되고 너비와 높이가 60센티미터가 조금 넘는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재질은 나무인데 그 위에 금이 입혀져 있다. 위를 덮는 판은 순금으로 되어 있으며 속죄소로 불린다. 속죄소의 양끝에는 두 그룹, 즉 천사 모양의 상이 각각 자리잡고 있으며, 날개를 앞으로 펴서 가운데 공간을 덮고 있다. 속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이었다. 법궤에는 세 가지가 들어 있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백성들에게 가져온 십계명 돌판, 광야에서 방랑하던 시절 받은 만나가 담긴 항아리, 싹이 난 아론의 지팡이. 이 물건들은 하나님이 그들 사이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상기시켜주는 증거였다. 그것은 하나님은 그들에게 계명을 주시며(돌판),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고(만나), 그들을 구원해 주신다(지팡이)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이스라엘 법궤는 그들이 경배하는 하나님의 계시된 성품에 분명하게 그리고 역사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일종의 구심체였다.
법궤는 마법의 상자가 아니었다.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살아계신 하나님은 상자속에 갇힌 마법의 일종으로 생각한 나머지 그것을 블레셋과의 전쟁에 들고 나갔다는 그들은 목숨을 잃고 법궤까지 빼았겼다. 사람들이 법궤를 비인격적인 마법상자 정도로 치부할때 선지자들은 사력을 다해 그들과 맞섰고 비인격적인 유물이 아니라 살아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을 섬기라고 도전하며 촉구했다. 법궤는 결코 사람이 두고 써먹는 마력을 가진 물건일 수 없었다. 돈으로 환산하면 금액이 엄청난 골동품이 절대 아니었다. 영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 나오는 그런 마법의 효력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와 통치와 임재의 상징이었고 증거물이었다. 다윗은 법궤가 어떠한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왕조를 시온, 예루살렘에 세우고는 시온은 단순히 인간 다윗이 통치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경배를 받으시는 곳이라는 사실을 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법궤를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원했다. 예루살렘에는 다윗이라는 인간의 왕의 보좌만 있는 것으로 충분치 않았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통치가 경축되는 곳,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어야 함을 알리기 위해 이러한 초점으로서 법궤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다윗의 위대한 점이다. 그는 자신의 왕권kingship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나라임을 알았고 그러기에 하나님의 왕권lordship을 초청한 것이다.
그런데 법궤를 되찾아 오는 길에 뜻하지 아니한 사고가 발생한다. 법궤 운반의 책임을 맡았던 제사장이 죽는 사고였다. 사고의 경위는 이러하다. 법궤를 끄는 짐수레, 짐수레를 끄는 황소들이 비틀거렸다. 그래서 법궤가 땅바닥으로 미끄러져 떨어질려고 했다. 이를 본 웃사 제사장은 법궤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문장이 나온다. ‘주 하나님이…그를 치시니, 그가 …죽었다’(삼하 6:7). 즉사였다. ‘끽’소리도 내지 못하고 말 그대로, ‘즉사’였다. 황당하기 그지 없는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다윗은 법궤 옮기기를 주저하게 된다. 9-10절에 그는 법궤 이송을 잠시 중단하고 오벧에돔의 집으로 가져다 놓게 된다. 요즘 같으면 웃사의 죽음, 제사장의 죽음을 조사하는 사건 전담반들과 형사들은 그의 사인, 죽음의 원인을 밝혀낼려고 안달했을 것이다. 과학적인 수사를 하기 위해 국립과학연구소에다 의뢰도 하고 시체도 부검하고 난리를 쳤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증거를 발견할 만한 사유가 그의 시체에는 발견될 수 없었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조사를 했지만 아무런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 목격자는 많았지만 피의자는 없었다. 단지 피해자만 남아 있다. 규명할 수 없는 살인사건이었다.
웃사는 왜 죽었을까?
성경은 7절에 ‘여호와께서…저를 그 곳에서 치시니’라고 말하고 있다. 왜 그를 치셨을까? 하나님은 언제나 생명을 주시며, 우리가 회개하도록 오래 참으시고, 끊임없이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며, 한결같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우리의 평소 생각과 이 일화를 조화시키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죽이셨다는 말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하나님은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까지도 아낌없이 죽임을 당케하시는 분이신데 사람을 죽이시다니…그것도 급작스럽게 사람을 쳐서 죽이시다니?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병을 주어 서서히 죽게 하셨다면 그가 회개하고 돌아 올 기회는 주어졌을 것인데 즉사를 시키셨다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같은 믿음의 조상들이 이 당시까지 만약 살아 있었고 그 당시에 신문이 있어서 웃사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면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는 그런 대목이었다. ‘웃사-수레의 법궤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막을려고 손을 내밀다 즉사’…
때때로 성경은 독자들에게 답변보다 질문을 줄 때가 더 많다.
수 세에 걸쳐 그리스도인들은 웃사가 죽은 깊은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상상력을 발휘했다. 그 중 반복해서 등장하는 한 가지 통찰이 있다. 웃사는 주제넘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하나님 관리 책임자 행세를 했다는 것이다. 법궤를 상자로 생각하고 치부하여 하나님 관리 책임자 행세를 하려 들면 죽게 된다는 것이다. 웃사는 하나님을 상자에 넣어 가두고, 세상 오물이 묻지 않도록 하나님을 지킬 책임이 자기에게 있는 양 나서는 사람이었다. 중세 시대에 수 많은 지도자들이 성경이 번역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거룩한 성경이 어떻게 번역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서 어려운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성경을 번역하는 것을 막았고 틴데일 같은 위대한 사람을 순교시키는 우를 범했다. 거룩한 성경이 죄인들이 들썩대는 세상에 어찌 그들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고 읽혀질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케케묵은 죄를 그들은 범했던 것이다.
웃사: 법궤관리자인가? 예배자인가?
웃사는 자신이 늘 맡아 관리했던 법궤이고 관리책임자로 당연한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마치 골동품상점이 주인이 자신의 고가품의 골동품을 마른 수건으로 닦고 걸레질하는 것처럼 그렇게 웃사는 법궤를 그렇게 대했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법궤를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그의 오랜 망상이 표출된 것이었다. 모세의 율법에는 법궤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관해 분명한 지시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법궤는 결코 사람의 손으로 만져서는 안 되고, 레위인들이 법궤에 부착된 고리에 막대를 끼워서 운반해야 했다(신 10:8; 출 25:13-14; 37:4-5; 대상 15:12-15). 웃사는 이러한 모세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무시했다. 대신 블레셋식 최신 혁신 기술인-황소가 끄는 수레, 새 수레(6 :3)-을 이용했다. 분명 편리한 황소 수레는 터벅터벅 걷는 레위인들 보다 법궤를 운반하는 데 훨씬 더 효율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비인격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구별된 사람들 대신에 효과적인 기계를 사용하는 것이었고 인격적인 수단을 밀어내고 비인격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웃사는, 거룩한 본질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턱대고 효과적인 방법론을, 실용적인 방법론을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수호성인(守護聖人) 격이었다. 웃사는 하나님을 책임 관리하는 담당자였으며-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계속해서 담당자 자리에 있고자 했다. 이러한 삶의 최종 결과는 죽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인간이 책임 관리하는 대상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상자에 넣어 보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듬은 나무, 깍은 돌, 훌륭한 사상, 멋진 느낌 등 그 무엇으로 만들어진 상자이건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신다.
웃사: 하나님을 주의하라!
웃사는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위험 표지판이다. “하나님을 주의하라”. 특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공부하는 장소에 그런 표지판이 꼭 필요하다고 유진 피터슨은 말한다. 우리는 교회나 학교에 들어가 하나님에 대해 배우고 지식을 얻고 순종과 기도의 훈련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는 얻고자 했던 바를 얻는다. 중심을 잡아주는 진리, 명령과 위로를 주는 말씀, 안정을 주는 예배 의식, 의미있는 사역, 힘을 주는 관계의 공동체, 자유를 주는 용서 등.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한다. 삶의 길을 바꾼다. 회개하고 믿고 따른다. 우리는 새롭게 발견한 의미와 소망을 중심으로 생활과 인생 행로를 바꾼다. 새롭고 놀라운 예배와 일의 세계에서 여러 책임을 맡아 간다. 점차 인정을 받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할지에 관해 조언을 해주는 위치에 서게 된다. 여기까지는 다 좋고 옳은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만 그 선을 넘어 버린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리에서 으스대고 까다로운 사람이 된다. 첫 사랑의 순수함은 온데간데 없다. 하나님 안에서 바르게 사는 길을 발견한 감격으로 신앙 생활을 시작해 놓고는 점차 하나님을 위해 그 분의 일을 대신 떠맡아, 사람들이 바르게 살도록 만드는 일을 담당한다. 우리는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장 중요하신 분의 곁에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야기한 우리는 ‘주의 노예’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놓치고서 말이다.
종교, 신앙생활은 이런 일의 온상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책임 관리하려 드는 사람들이 지도자 위치까지 오르는 일이 적지 않다. 오래 전 그들이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의 첫 마음, 즉 삼가는 마음과 경외감, 사랑과 믿음의 정신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부식되어 문드러졌고 마침내 흔적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 버린 것이다. 예전의 주인정신은 온데 간데 없고 주인인 체는 하지만 구경꾼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웃사는 하나의 경고이다. 만일 웃사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죽은 사람이 될 것이다. 영혼이 죽은 사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마치 죽은 물건인 양 대하는 죽은 사람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두고 ‘회칠한 무덤 같다…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마 23:27)’고 하셨다. 웃사는 급작스럽게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죽은 사람의 뼈 같은 ‘죽은 행위들’만 가득하고 찬양과 믿음과 경배의 영혼 내면 속에서 오래 전에 질식사한 사람이었다. 웃사가 법궤를 맡아 관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그는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익숙해져 버렸고 무슨 박물관의 관리소장처럼 하나님을 박물관의 명품 취급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계신다고 떠드는 명품, 골동품…그러기에 그는 쉽게 쉽게 행동하였다. 믿음이 죽은 성직자, 믿음이 고갈된 성직자였다. 그의 인생의 주인공의 인생이 아니라 들러리의 인생이었다.
다윗의 살아있음Living David
이번엔 다윗을 보자. 왜 다윗은 춤을 추었을까? 다윗은 법궤 앞에서 기쁨에 넘쳐 남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다윗은 하나님에 관해 웃사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무언가를 알았던 것이다.
다윗은 평생 위험 속에서 살았다. 사자와 곰, 깔보는 거인 골리앗과 살기 어린 왕 사울, 약탈을 일삼는 블레셋인들과 교활한 아말렉인들과 함께 살았다. 또한 황량한 광야의 동굴과 오아시스에 살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하나님과 함께 살았으며 하나님 안에서 살았다. 달려가고 숨으며 기도하고 사랑하며 말이다. 다윗은 결코 하나님 관리 책임자 행세를 하지 않았다. 그에게 하나님은 구원자와 주권자이시며 목자와 바위셨다. 하나님은 다윗이 돌보는 양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결코 길들여질 수 없는 분이셨다. 이러한 삶의 조건들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활짝 열고 그분을 신뢰하며 호연지기를 가지고 대범하게 사는 법을 배웠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았다. 웃사가 죽자, 다윗은 하나님께 화를 냈다. 그는 웃사가 죽은 것만 알았지 그가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지는 몰랐다. 다윗으로서는 황소 수레 옆에서 일어난 그 사건이 이미 수년 동안 서서히 진행된 웃사의 자살 행위의 끝이었음을 알 길이 없었다. 다윗에게는, 기쁨의 행렬이 중단되고 장례식 행렬로 변한 것이 보이는 전부였다. 하나님께 화가 난 다윗은 뿌루퉁해지고 삐쳐서 집으로 돌아갔다.
다윗은 하나님께 화를 내었지만 죽지 않았다. 다윗이 죽지 않은 것은, 화를 내는 다윗은 전에 찬양하고 있을 때의 다윗 못지 않게 하나님을 향해 살아있는 다윗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다윗. 그렇기에 살아 있는 다윗이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했다는 것이다. 물론 다윗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 불만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했던 것이다. 웃사는 결코 하나님께 화를 낸 적이 없었다. 그는 너무도 예의 바르고 깍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상자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없으니깐 말이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다윗은 시간을 두고 그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고, 석달 후 다시 행진 악단을 소집하여 거문고, 수금, 탬버린, 캐스터네츠, 심벌즈 등을 울리며 장엄한 행렬 가운데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왔다.
다윗은 춤을 추었다. 하나님 안에서, 다윗은 자신의 이해력과 통제력을 초월한 삶에 들어섰다. 그는 신비와 영광에 다가갔다. 그래서 그는 춤을 추었다. 제 힘으로 척척 해 낼 때 우리는 걷는다. 걷는 것은 우리가 몸을 움직이는 정상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사랑으로 제 정신을 잃을 때, 너무도 충만한 기쁨을 누릴 때, 자아 집착으로부터 해방 될 때 우리는 춤을 춘다. 다윗은 춤을 추었다. 만일 다윗이 단순히 종교적인 직무를 수행하거나 국가 예식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라면, 그는 근엄하게 법궤 앞에서 걸으며 엄숙한 모습으로 행렬을 예루살렘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직무 수행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이용해 예루살렘의 권위를 높이려는 정치적, 가시적 행동도 아니었다. 하나님을 높여 드리기 위해 수고스럽게 벌이는 종교적 활동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경배하며 살아계신 하나님께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휘감아 돌며 자신을 통하여 흐르는 하나님의 생명력과 생동력에 열려 있었다. 그 하나님은 법궤가 증언하는 대로 역사를 가로지르는 하나님, 구원하고 계시하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셨다.
종교 집회 장소와 시간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기쁨으로 자신을 여는 법을 연습하는 자리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열기 전까지는 결코 온전한 우리 자신일 수 없다. 하나님의 실재에 주목하고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일하심에 반응하며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까지 말이다. 예배는 우리가 자아 집착을 중단하고 하나님의 임재에 주목하기 위한 전략이다. 예배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주목하기 위해 따로 떼어 놓은 시간과 장소이다. 그 분이 그런 시간과 장소에만 계시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의 자기 집착이 너무도 뿌리 깊고, 우리의 죄가 너무나 고질적이어서, 그것을 의도적으로 중단시키기 위한 정규적인 시간과 장소가 없다면, 우리는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도 그 분께 주목할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예배 시간과 장소에서도 위험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런 시간과 장소가 정해지면, 때때로 우리는 멋대로 그 장소와 시간을 지배하려 들고, 감히 하나님을 그 시간과 장소 속에 가둘려고 들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21세기 웃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 여기 저기에 다음과 같은 위험 표지판이 붙어 있는 이유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조심하라!’
그러나 그 경고들은 우리더러 하나님 앞에서 몸을 움츠리고 살라고 하지 않는다. 다윗을 보면 그 반대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것들은 하나님을 우리의 취급 물품으로 전락시키지 않도록 지켜 준다. 종교활동을 하다가 죽음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예방해 주는 것이다.
미갈의 조롱Blaming of Michal
V.14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Then David danced before the LORD with all his might; and David was wearing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기본형 :
발음 : {kaw-rar'} : 카라르
어원(기원) : 기본어근
'춤추다'(즉, 빙빙 돌다) :- 춤을 추다(춤을 추는)
빙빙 돌다, 춤을 추다
기본형 :
발음 : {paw-zaz'} : 파자즈
'응고시키다'(정련하는 것처럼); 또한 '솟구치다'(사지가 '떨어져나가듯이'):- 도약하다, 강하게 되다
1)껑충껑충 뛰다, 민첩하다, 유연하다, 날렵하다, 도약하다, 민첩함을 보이다
다윗의 아내 미갈은 다윗이 법궤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광경, 하나님의 구원과 인도와 명령을 받은 사람들과 함께 흥겹게 어우러지는 광경을 지켜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업신여겼다. 왜 좀더 왕다운 품위를 지키지 못하는 것일까? 왜 다른 나라 왕들처럼 처신하지 못하는 것일까? 좀 더 근엄하고 화려하고 위엄있게 말이다. 그는 왕을 섬기는 신상을 세우고 화려하고 장엄한 궁궐을 짓고 그를 왕답게, 중요한 인물답게 보이게 해주는 종교를 조직해야 한다. 미갈에게 하나님은 단지 사회적 편의 장치, 정치적 지지물에 불과했다. 미갈은 다윗의 춤을 보고 처음에는 당황했고, 나중에는 경멸했다. 미갈은 다윗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한 처사이다. 미갈은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구경꾼이며 방관자이며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못한 여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화이트(Alexander Whyte)는 미갈에 대해 참 근사한 말을 하나 남겼다.
“귀먹은 이들은 언제나 춤추는 이들을 경멸하게 마련이다.”
미갈은 웃사와 함께 법궤 옆을 걸었더라면 흡족했을 것이다. 품위 있고 고상하게 염려스럽다는 듯 걷고 있는 웃사, 그러나 사실상 죽어 있는 웃사와 함께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법궤 앞에서 춤추는 다윗을 보고 경멸했다. 아무것도 개의치 않고 신경 쓰지 않고 염려하지 않고 그저 전심을 찬양하는 다윗, 참으로 살아 있는 다윗을 경멸했던 것이다.
다윗은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윗은 “충만하게 살아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이다”(Iranaeus)라는 것을, 하나님을 두고 염려하거나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근엄하고 고상하게 하나님 관리 책임자 행세를 하려 들다가는 죽음에 이른다는 것을, 영생이란 그분이 우리를 돌보시게끔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테(Dante)가 신곡에서 말한 것처럼 ‘남들로 하여금 너에 대해 말하게 내버려두어라 그리고 너는 너의 길을 걸으라’ 처럼. 미갈의 핀잔과 비난에 대해 다윗은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셔씅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표준새번역]삼하 6:21
다윗이 미갈에게 대답하였다. "그렇소. 내가 주 앞에서 그렇게 춤을 추었소. 주께서는, 그대의 아버지와 그의 온 집안이 있는데도, 그들을 마다하시고, 나를 뽑으셔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통치자로 세워 주셨소. 그러니 나는 주를 찬양할 수 밖에 없소. 나는 언제나 주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오.
[현대인의성경]삼하 6:22
내가 이보다 더 바보 취급을 받아도 좋소. 하지만 당신이 말한 그 하녀들에게는 내가 존경을 받을 것이오."
다윗은 자신의 길을 주인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참된 주인공으로 살았던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참된 예배자의 주인공으로 찬양하며 춤추며 노래했던 것이다.
당신은 주인공인가? 구경꾼인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주인공인가? 아니면 주인 인체 하기만 하지 주인의식은 없는 웃사 인가?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구경꾼인가? 방관자인가? 아니면 다른 이의 행위를 구경만 하고 핀잔만 주는 미갈인가? 아니면 주위의 모든 것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참된 예배의 주인공으로 서 있는 다윗인가?
여러분은 웃사인가? 미갈인가? 다윗인가? 잠시라도 우리가 한 번 기도했음 좋겠다.
오늘은 사무엘하6장에서 나타난 웃사의 죽음, 그 이유, 그리고 법궤를 옮겨오면서 열정적으로 찬양했던 다윗의 다윗됨, 하지만 그를 비웃는 미갈의 조롱에 대해 살펴보면서 '주인공인 예배자인가? 아니면 구경꾼인 엑스트라?'라는 질문을 던져보았네요.
*웃사의 죽음에 대한 소중한 통찰은 유진 피터슨의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이란 책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설교 > 사무엘상.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무엘상 8장 1-9절 묵상 해석, 우리에게도 왕을 주소서 (0) | 2023.05.03 |
---|---|
사무엘상 9장1-2절, 31장 3-6절, 누가 왕王을 죽였는가? (2) | 2023.04.18 |
사무엘하 12장 26-31절, 회복되는 다윗의 리더십 (0) | 2023.04.18 |
사무엘상 28장, 위기의 순간에 언제나 약점이 노출됩니다 (0) | 2022.08.24 |
사무엘상 26장, 사울의 목숨을 두 번이나 살려준 다윗 (0) | 2022.07.1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