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사무엘상 8장 1-9절의 본문을 묵상한 내용입니다. '우리에게도 왕을 주소서'라는 제목으로 묵상해 보았는데요. 개인적인 묵상과 해석을 자유롭게 하면서 기록한 포스팅입니다.
사무엘상 8:1-9 본문
1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2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3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8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9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
V.1 사무엘의 늙음
사람이 늙는다는 것은 실로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인간은 언제나 세월을 어깨에 걸머지고 시간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늙어간다.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은 늙음, 노쇠의 삶의 여정을 계속하게 된다. 어쩌면 인간의 삶은 출생하면서부터 시작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설가 하일지의 말처럼 출생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노화의 태엽을 감는지도 모른다. 사무엘이 늙었다. 그래서 사무엘은 사사의 배턴을 두 아들들에게 넘겨주었다.
V.2 요엘과 아비야
그들의 사역지는 브엘세바였다. 그들은 명백히 사사가 되었다. 제도적으로 아버지의 혈통을 이어받아 사사가 되었지만 아마도 이 두 사람을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는 바로 ‘사무엘’이다. 사무엘로 ‘사사시대’는 끝나지 이 두 사람에게는 아무런 언급도 없는 성경을 본다. 하나님의 말씀은 명백하다. 그들의 삶과 열매를 통해서 그 사람을 평가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감각과 사상과 독서량과 컴퓨터능력과 음악적 색채와 연예실력과 글쓰는 능력과 성격을 통해 보시는 것이 아니다. 인격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오로지 그 사람의 삶을 통해서 그 사람을 판단하시고 평가하신다. 그 사람의 삶....하나님과의 관계의 준엄성을 통해서 평하신다.
V.3요엘과 아비야의 삶
두 아들의 삶의 내역이 나오고 있다.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반하고-사상적인 측면-, 공의를 굽게 하였다-행위적인 측면. 그들의 맘은 내세적인 것이 아닌 현세적인 삶에 취해 있었다. 가장 천박한, 가장 비열한, 가장 비도덕적인 모습으로 서 있다. 뇌물을 수수하고 그에 따라 정의를 뭐 보듯하고, 공의를 엿같이 여기는 모습이다. 뇌물은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한다고 했다(신 16:19)
이 두 아들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사무엘의 그 순전하고 투명한 삶과 사역을 왜 본받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이렇게 불신앙적인 작태를 보이는가? 그것의 이유를 들어보자면, 일차적으로 사무엘의 지나친 사역으로 말미암은 부자간의 대화의 부족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사역에 너무나 치중하다가 결국 가정이 무너지는, 붕괴되는 현상이 적지 않다. 사무엘의 자식들도 이러한 군상(群像)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러한 나의 추측을 완전히 불식할 수는 없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사무엘과 사무엘의 아들 요엘과 아비야의 구원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성경이 증명이라도 하듯 보여주는 것이다. 아버지의 신앙이 아무리 뛰어나고 탁월하고 하더라도 그 아들은 그 아버지의 믿음을 본받을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상 그 믿음을 전수 받을 수 없다. 인간의 의지과 노력과 기도가 받쳐주지 않는 이상 사무엘의 믿음은 아들들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신앙은, 믿음은 혈통이 개입되지 못한다.
([개역]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Kjv]요 1:13 Which were born , not of blood , nor of the will of the flesh , nor of the will of man , but of God .).
요엘과 아비야는 충분히 아버지의 믿음을 ‘위대한 유산’으로 상속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길을 버리고, 자신에게 편한 길, 쉬운 길, 권력을 남용하여 정의와 공의를 짓밟는 길을 선택했기에 그들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가 되는 명예를 안기는커녕 단지 ‘악한(惡寒)’의 표상이 되어주기만 한다.
→나에게도 아버지, 어머니의 위대한 신앙을 물려받을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요엘과 아비야’처럼 그렇게 부모의 신앙과 반(反)할 수 있다. 충분한 여지가 있다. 선택권은 나에게 있다.
“하나님, 저에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위대한 믿음을 잘 되물려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V.4-5 백성들의 원성 '우리에게도 왕을 주소서'
백성들의 불평과 그 후의 제언은 두 가지의 이유다.
- 첫째, 사무엘은 늙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사람이고 선지자이고 사사이다. 그는 백성들의 준거점과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늙었다는 것은 그에게 사역할 수 있는 시간의 부족과 여러 가지 핸디캡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둘째, 사무엘의 아들들은 사무엘의 행위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성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는 지도자는 이렇다. 이스라엘의 일부의 장로가 아니라 모든 장로가 사무엘에게 나아왔다Then all the elders of Israel gathered themselves together.
이것을 보더라도 그 당시 요엘과 아비야의 악함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모른다.
백성들은 또 다른 사사를 구하기보다는 이방인들처럼 ‘왕’을 구하고 있다. 한 번도 시도해 보지 못한 제도이지만 그들의 눈에는 그것이 좋아 보였나 보다. 백성들은 ‘진정한 통치자’에 대한 갈망이 존재한다. 자기들을 온전히 다스리는 주(主)가 필요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시적인 왕a visible king'을 원하고 있다.
V.6 사무엘의 반응
사무엘은 심히 기분이 언짢았을 것이다. 아들들에 대한 분노와 자신에 대해 ‘늙음’이라는 이유로 백성들이 자신을 가벼이 여기는 그러한 분위기에 심히 기분이 안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 고민에 빠지지 않고 그 고민을 기도로 풀었다. 하나님의 지시direction를 받기를 구했던 것이다. 여기에 사무엘의 위대한 면모가 드러난다. 뼈를 깎는 아픔과 가슴에 비수를 꽂는 상처가 있을 때조차도 우리는 기도해야한다. 사무엘은 자신의 평생을 백성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사사로 헌신하였다. 그는 ‘나실인’의 삶을 한 순간도 버리지 않고 순결하게 살았던 사역자이다. 그런 그에게 백성들의 그러한 원성은 실로 상처가 아닐 수 없다. 내가 만약 사무엘의 입장이었다면 눈물을 흘리며 얼마나 비통해 했을까? 욕을 하였지 싶다. 백성들의 그 서운한 반응에 말이다.
V.7-9 하나님의 음성, 그의 대응방식
문제의 본질을 파헤치고 그 본질에 대해 정확히 지적하시는 하나님. 백성들은 사무엘에 대해 원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불평하고 있다. 자신들에게도 visual한 무언가를 달라는 것이다. 더 이상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실체보다는 visual reality를 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reject하고 있다. deny하고 있다.하나님은 인간들의 무구한 역사를 8절에서 압축하고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나를 버렸다”
wherewith they have forsaken me, and served other gods , so do they also unto thee
same to you...하나님에게 행한 동일한 행동을 너에게도 번복하고 있다고 사무엘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하고 있다.
[출 16:8]
모세가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니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삼상 10:19]
너희가 너희를 모든 재난과 고통 중에서 친히 구원하여 내신 너희 하나님을 오늘날 버리고 이르기를 우리 위에 왕을 세우라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너희 지파대로 천명씩 여호와 앞에 나아오라 하고
-후의 사무엘의 고백, 선언이다.
하나님은 참으로 자비하신 분이시다. 인간들의 그러한 반응에 화를 내시면서도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신다. 왕의 제도에 대해 알려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왕의 제도’를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스라엘의 무지(無知)를 스스로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이리라. 아무리 인간적인 지혜와 모략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누가 대신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realization을 obtain하기를 원하시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러한 suggest를 단호히 뿌리치고 윽박질러 내어쳐 버리지 않고 인간들의 마음을 받아주셨다. 그 받아주심은 ‘탕자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아비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말 하나님은 자비의 대가(大家)이시다.
사무엘상 8장 1-9절의 본문을 개인적으로 해석하고 묵상하면서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왕을 구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이지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를 들으시면서 참으시며 이스라엘의 왕정제도를 여시는 대목을 살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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