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6장에선 다윗이 두번째로 사울을 살려주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24장에서 첫번째로 사울의 목숨을 살려주는 장면이 나오고 후에 여기서 또 사울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기회였지만 사울 왕을 그대로 보내주는 장면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선하게 대우했습니다. 특별히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정말 나라가 파국으로 치달을 때, 3미터에 달하는 거인 장수, 골리앗으로 인해 나라가 위태로울 때 이 소년 다윗의 승리로 인해 그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했습니다. 사울이 귀신에 들려 두통으로 고생할 때도 다윗은 음악치료사의 역할로 음악을 연주하여 사울의 고통을 덜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사랑하는 아들 요나단의 절친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왕이 되기 전에 순수하고도 겸손하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모든 매력은 이제 온데 간데 없고 권력의 맛에 물들어 그 권력이 다윗의 손에 넘어갈까봐 불안해하는 군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인생에 섬뜩한 진리인 '토사구팽'
우리가 잘 쓰는 말로 '토사구팽'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냥꾼이 사울이 토끼몰이로 다윗이란 사냥개를 잘 사용해서 토기 골리앗을 잡았습니다. 그러면 사냥개를 더 높여주어야 하는데, 이제는 민심이 다윗에게로 더 치우친 것을 보고서는 눈이 돌아갑니다. 이젠 사냥개 다윗을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사람은 정말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붙들려면 엄청난 하나님의 영광스런 직분을 감당하지만, 반대로 인간의 탐욕에 물들면 자식도, 절친도, 충신도 온데간데 없습니다. 사람이 그처럼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사랑할 것처럼 대하다 가도 한순간에 돌아서서 남남이 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사랑할 존재이지, 의지할 존재가 아니다."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요? 물론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도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직분자와 인격들로 구성되어 교회가 나아갑니다. 하지만, 사람은 언제나 자기 안에 자기만의 소원과 욕심이 존재합니다. 자신의 입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다툼과 분쟁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등장한 다윗을 이렇게 대우하는 천하의 폭군, 천하의 파렴치한 군주가 어디 있던가요? 충신같은 사냥개, 다윗을 죽이려고 추격하는 사울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한 번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욕심에 꽂히면 이런 형국이 되진 않나요? 욕망에 눈이 어두우면 다른게 보이지 않습니다.
"속도를 줄이면 사람이 보입니다."
길거리를 지나가다 보면 경찰청에서 내건 현수막의 슬로건이 보입니다. 욕망의 속도를 줄여야 옆의 사람이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입장과 얼굴이 보입니다. 자동차의 스피드를 과하게 밟으면 시야가 좁아집니다. 우리가 욕망에 물들어 거기에 치우치면 다른게 보이지 않습니다. 사울만 그러했던가요? 다윗도 말년에 인구조사를 하라고 지시를 내리는 대목에서 요압 장군이 다윗의 그런 면모를 탐탁치 않게 생각해서 조언을 하지만, 다윗은 한 귀를 듣고 한 귀를 흘리면서 오히려 더 재촉하고 채근합니다. 요압도 다윗의 명령이긴 하지만 꼼꼼하게 인구조사를 하지 않는 자세를 보입니다. 다윗의 인구조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죠. 사울도, 다윗도 인간입니다. 그래서 욕망에 눈이 멀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가사에서 눈 멀어 타락한 영웅"
존 밀턴의 구약성경의 '삼손'에 대해서 묘사한 문장입니다. 가사의 기생에게 잘못된 로맨스에, 욕망에 찌들어버려 눈이 멀어버린 타락한 영웅이 바로 삼손이었습니다. 여자에게 눈이 멀어 버렸으니 결국 하나님은 그의 육신의 눈도 빼앗아버립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의 눈을 빼앗아 버리니 제대로 영적인 혜안이 열렸던 삼손입니다. 삼손만 눈이 멀었나요? 오늘 사울이 제대로 눈이 멀어 계속 다윗을 추격하고 있습니다. 부하들도 사울이 뭐하고 있나? 이스라엘의 군주가 뭐하고 있나? 한평생 사울이 싸웠던 민족이 블레셋 군대인데, 언제 또 전쟁이 날지도 모르는데, 다윗 한 사람, 충신 한 사람을 잡기 위해 이렇게 애쓰고 있네요. 어떤 대의명분이 있던가요? 다윗이 나라를 팔아먹었나요? 다윗이 사울을 배신했나요? 다윗은 충신이었고, 나라를 구한 애국자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이렇게 자신의 욕망의 노예가 되어 다윗을 쫓고 있습니다.
다윗은 오늘 이 본문에서 사울을 두번째로 살려주고 나서 자신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무엘상 26:20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
다윗이 자신을 '한 벼룩'이라고 표현합니다. 물론 현재 왕인 사울을 향한 과장된 낮춤의 표현이기도 합니다만. 어쩌면 다윗의 지금 심경이 계속 쫓아다니기만 하니깐 자신의 처지가 벼룩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 싶네요. 지긋지긋하지 않나요? 쫓겨다니는 신세가 얼마나 지겹고 힘겹고 피곤합니까? 다윗이 말년에 인구조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때 하나님의 사자가 3가지 제언을 합니다.
- 첫째, 3일간 전염병,
- 둘째, 3개월의 피난길,
- 셋째, 7년 동안의 기근.
다윗은 둘째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3개월 동안 피난길에 오른 것은 정말 신물이 날 정도로 고통스러운 행보입니다. 다윗은 왕이 된 후에 압살롬의 쿠데타로 인해 피난길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다시는 맛보고 싶지 않은 여정이기에 첫번째 3일간의 전염병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정말 '짧고 굵게' 하나님의 심판을 제대로 경험했습니다. 그 심판으로 인해 백성의 7만명이 죽었습니다.
악을 선으로 대하는 다윗
다윗의 인생전체를 통틀어 피난생활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든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인데요. 지금 다윗은 젊은 시절에 피난생활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와중에 또 다시 사울이 자신을 잡기 위해 십 광야로 3천명의 군사와 함께 등장합니다. 진영을 치고 쉬고 있는 사울의 진에 아비새와 함께 다윗이 들어갑니다. 아비새는 다윗의 고달픈 피난 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이야기하면서 아비새 자신이 사울을 죽이겠다고 이야기합니다(26: 8). 하지만, 다윗은 이렇게 대꾸하죠.
사무엘상 26:9-11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다윗이 또 맹세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대목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심판하는 것을 보류합니다. 그 대목은 자기가 할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기름부음 받은 왕이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을 폐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심판을 위탁하는 다윗 왕의 모습입니다. 자신을 토사구팽시킨 왕인데, 울분과 분노와 화가 몸을 가득 채웠다면 다윗은 분명히 사울을 쳐 죽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울분과 분노와 화는 다 어디에 있던가요? 그건 매일 다윗이 하나님께 나아갔던 시편 54편의 기도 가운데 드러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셀라)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
사람이 울분과 분노와 화가 가득차면 당연히 가득차 있던 부정적인 요소들이 밖으로 표출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오히려 원수와 같은 사울 왕을 선대합니다. 생명의 주권자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모든 것을 맡깁니다. 그러면 또 다시 다윗은 광야의 이곳저곳을 방황하면서 숨고 피하고 도망쳐야 할 신세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 길을 선택합니다. 그게 쉬운 선택은 아닙니다.
그리고서, 다윗은 사울의 물병과 창을 가지고 와서 사울의 진영을 향해 외치죠. 자신의 억울함과 답답함을 사울 왕에게 호소합니다. 그리고 사울의 장수 아브넬에게 호통을 칩니다. 그렇게 경비가 허술해서 어떻게 왕을 보좌한다고 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아무도 왕을 암살하고 도망쳐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죠.
남의 것을 중히 여긴 자는 하나님께서도 그를 중히 여겨주시리라
다윗이 26:23-24에서 자신의 고백과 믿음을 사울 왕과 군사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대목입니다.
사무엘상 26: 23-24
23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그의 공의와 신실을 따라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내 손에 넘기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
24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것'에 목을 맵니다. 자신의 것, 내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없으면 너도 없거든요. 하지만, 하나님의 법칙과 질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살기 위해 사울을 처리하지 않습니다. 충분히 처리하고서 차기 대권을 거머쥘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기름부으셨다고 해도 그는 서두르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감정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하면서 사울을 선대합니다.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마치 예수님의 주기도문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물론 그런 느낌이 완전 재해석할 순 없습니다. 뉘앙스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것, 나의 것, 내 것의 소중함을 알기에 남의 것의 소중함을 알았던 다윗, 이 대목은 정말 다윗이 성군으로 나아가기 위한 혹독한 하드타임의 광야생활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하나님께서 이 광야의 시간을 통해 오히려 다윗을 더 다윗답게 만들어가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심판은 여호와께서 속한 것이기에 그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는, 기름 부음받은 왕에 대한 판단을 하나님께 맡긴 다윗의 위대함은 그가 이스라엘의 최고의 별과 같은 왕, 성군으로 우뚝 설 수 있는 자질들을 다듬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일들에 대해 내 것의 소중함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남의 것의 소중함을 알고 심지어 우리의 원수에 대한 모든 판단과 심판도 하나님께 아뢸 수 있는 그런 다윗과 같은 믿음이 우리에게 부어지길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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