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민수기

민수기 11:31-35, 탐욕의 무덤(기브롯 핫다아와)-없어도 살 수 있는 것을 버려라

by Message.K 2023. 12. 4.
반응형

구약성경 민수기 11장 31-35절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 가운데 그들의 불평과 불만이 결국은 탐욕의 무덤이 되어 멸망하고야 말았다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본문을 해석, 적용하면서 우리에게 과연 어떤 마음이 필요한지 돌아보는 설교문이다.

 

민수기 11:31-35, 탐욕의 무덤(기브롯 핫다아와)-없어도 살 수 있는 것을 버려라
민수기 11:31-35, 탐욕의 무덤(기브롯 핫다아와)-없어도 살 수 있는 것을 버려라

 

 

 

내 마음은 무엇으로 가득한가? 없어도 살 수 있는 것은 버려라!

줄 베르네의 소설 ‘비밀의 섬’은 뜨거운 공기로 하늘을 나는 열기구를 빼앗아 포로수용소를 탈출하는 다섯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열기구를 탄 그들은 바람을 타고 대양 위로 떠올랐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수평선이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동시에 고도도 낮아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기구 속의 공기를 데울 방법이 없었으므로 기구에 싣고 있던 무거운 물건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신발, 코트, 무기 등을 주저해하면서 버렸지만 풍선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하자 모두 기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다시 위험할 정도로 파도에 가까이 내려온 것을 깨닫고 식품들마저 버리기 시작했다. 배가 고파도 공중에 떠 있는 편이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풍선은 또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고 이번에는 한 사람의 제안으로 타고 있던 광주리와 기구를 연결하는 줄들을 서로 묶어 그 위에 앉고, 무거운 광주리를 끊어 버리자고 했다. 그렇게 그들이 서 있던 광주리는 아래로 떨어졌고 풍선은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육지가 나타났다. 그들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물로 뛰어들어 섬을 향해 수영하기 시작해 목숨을 건졌다.

없어도 살 수 있는 것을 과감하게 버렸기 때문이다.

 

 

 

민수기 11장 31-35절의 본문

31 바람이 여호와에게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영 곁 이쪽 저쪽 곧 진영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32 백성이 일어나 그 날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열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진영 사면에 펴 두었더라
33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34 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으니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35 백성이 기브롯 핫다아와에서 행진하여 하세롯에 이르러 거기 거하니라

 

 

해석과 적용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탈출하다 싶이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에 다소 점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금방 갈 것만 같았던 가나안 땅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인지 아니면 뭔가가 잘못되어서인지 광야에서 뺑뺑 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들은 430년 동안 노예근성에 익숙한 자들이었고 어쩌면 해외여행경험이 전무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해외여행 경험이 없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광야, 끝없이 펼쳐지는 그 광야길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거기서 무슨 색다른 체험이나 경험을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광야길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불평과 불만을 토로했다.

 

11:4에서는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백성들 중에 가장 낮고 비천한 자들)이 탐욕을 품으매’라고 했다. 공동체를 허무는 것은 큰 것이 아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내뱉는 그 불평과 불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더 지치게 했고 마음을 더 불만덩어리로 만들어갔다. 그들의 불만은 어설펐던 노예생활 가운데 그래도 먹을 것은 먹었다는 식으로 과거의 추억이 과장되게 기억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상상력대로 기억하고 싶은 한 없이 과장되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은 한 없이 추악하게 기억하는 습성의 동물이 아닌가? 11장 4-6절에는 이들의 불만이 더 가중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민 11:4-민 11:6]

(4)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5)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6)이제는 우리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에는 먹을 것만 있으면 좋겠다는 그들의 바램이 이제는 ‘고기’를 먹고 싶다는 욕심으로 번지고 있다. 4절에는 그들의 불만은 감정적으로 비춰지는데 ‘다시 울며’라고 말한다. 어린 아이처럼 그들의 작태는 짜증스럽게 다가온다. 음식투정을 하고 있다!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감사가 사라지고 그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불평과 원망과 불만’뿐이었다.

 

그러한 그들에게 하나님은 31절에 와서 메추라기를 몰아주신다. 그렇게 고기를 먹고 싶어했던 그들에게 고기를 먹게 해주시는 하나님! 하지만 고기를 받아 먹는 그 백성들의 몸짓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너무나 형편이 없었다. 출애굽의 감격도, 감동도, 만나에 대한 감사도, 그리고 불평과 원망의 다리를 넘어 메추라기에 대한 감사는 커녕 비대해진 욕심만을 채우는 광경을 보라!

 

(32)백성이 일어나 그 날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열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진영 사면에 펴 두었더라

 

하루종일, 그리고 이튿날도 종일, 2일을 꼬박 메추라기를 모으는 것에 투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 최소한 못 보은 사람이라도 열 호멜이라...호멜은 약 2.2kl이다. 그러니깐 10 호멜이면 20kl를 넘는 메추라기를 거둬들인 것이다. 고기에 대대해 그렇게 집착을 하던 그들에게 하나님은 메추라기를 보내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감사의 몸짓도, 감사의 언어도 한 마디 없고 오로지 욕심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욕심덩어리(비계덩어리)에 불과했다. 하룻동안 내린 메추라기는 이스라엘 진영 사방으로 두 규빗쯤-1규빗은 45.6cm이니깐 1m 좀 더 되는 높이로 고기가 쌓였던 것이다. 고기에 완전히 눈이 돌아가 있던 그들은 모으고 모으고 또 모으고 그러했던 것이다.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진영 사면에 펴 두었더라’.

 

[표준새번역]

백성들이 일어나 바로 그 날 온종일, 그리고 밤새도록, 그리고 그 이튿날도 온종일 메추라기를 모았는데, 적게 모은 사람도 열 호멜은 모았다. 그들은 그것들을 진 주변에 널어 놓았다.

장사하는 것도 아닌데, 그들의 욕심은 진 주변에 널어 놓은 메추라기의 진열장 display 같았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먹는 것에, 음식, 고기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에 분노하실 수 밖에 없었다. 감사가 사라진 인생 가운데서는 불평만이, 원망만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11장 1절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진노가 일어났었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이 진노가 다시 불일듯 일어나서 마치 비극적인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성경기자는 33절의 말씀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그 탐욕의 끝은 너무나 절망적이며 비극적이다. 이것은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실이었으며, 과거 믿음의 조상의 후예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의 죄악이었다. 그 탐욕의 종착지는 바로 ‘무덤’이었다.

 

테네시 윌리암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보면 아래와 같은 문구가 등장한다.

 

욕망하는 자아들이 들끓는 사회 속에서 치이고 치이다.

결국은 그 사회 속에서 또 다시 방출되고 마는 블랑쉬의 초상화는

작품 초반에 볼 수 있었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서,

묘지란 이름의 전차를 갈아 탈' 수밖에 없는

비극적 운명의 여신의 모습 이다.

 

 

 

기브롯 핫다아와...탐욕의 무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같은 불경기 가운데 감사가 나올 여력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상황 가운데서 감사가 나오는 것이 바로 성도의 생이 아닐까? 그래서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한숨과 탄식과 울분과 불평이 우리를 압도할 때조차도 우리는 이 과거의 탐욕의 무덤의 한 장면을 거울삼아 우리의 욕심과 탐욕을 내리누르고 그것을 감사로 표현하는 지혜로운 인생이 되기를 소망한다. 할렐루야!

 

 

구약성경 민수기 11장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탐욕의 두번째 이슈는 바로 '고기'가 먹고 싶다는 것이었는데, 그 고기에 대한 집착과 욕망이 결국의 욕망의 무덤(기브롯 핫다아와)가 되었다는 장면을 해석하면서 영적 교훈을 마음에 담아 보았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