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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누가복음

누가복음 15장 1-10절, 잃어버린 자를 향한 긍휼

by Message.K 2022. 3. 17.

과거에 무언가를 잃어버린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잃어버리는 것의 아픔을 생각해보고 하나님의 측면에서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잃어버린 자를 향한 긍휼로 드러나길 촉구하는 설교하는 내용이다.   

 

 

중학교 1년 시절에 저는 심각한 농땡이도 아니었고 아주 너무나 평범한 학생이었다. 별로 표도 안 나고 조용하기 그지없는 학생! 모범생도 아닌 그냥 소소한 학생이었다. 그날따라 친구가 오락실에 가자는 말에 혹했다. 돈이 500원~1000원인가 있었는데 정말 모처럼 오락실엘 출입했다. 가방을 오락실 기계위에 올려놓고 한참 구경을 하다가 가방이 있던 자리로 다시 왔는데 제 가방이 없었다. 엄마가 중학교 들어간다고 사 주신 메이커, ‘프로 스펙스’였는데!!! 그 날 수업했던 책이나 공책이나 필기도구, 도시락 가방까지 몽땅 다 잊어버린 것이다. 그 때는 메이커있는 가방이나 물건이 요즘처럼 보편화되지 않았기에 좀도둑들은 상표 있는 것만 보면 훔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저는 교과서도 기타 필요한 학용품, 가방까지 다시 다 준비해야만 했다. 그 때 어머니한테 얼마나 꾸중 들었는지 모른다. 시골에서 대구로 좀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시키기 위해 보냈는데 아들이란 놈은 오락실에서 가방이나 잃어버리고 다녔으니 어머니는 그 때 완전 제가 빗나간 줄 알고 기도를 얼마나 해주셨는지 모른다. 회개하고 난리가 났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 돌아보니 그렇게 큰 잘못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제가 그 때 잃어버린 프로스펙스 가방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제가 잃어버린 것 중에 그래도 기억에 남는게 있다면 이 중학시절의 책가방 잊어버린 사건이라 소개해 본다.

 

 

 

저는 대학 4학년 때 어떻게 하다가 대학교에서 벌어지는 콘서트를 간 적이 있다. 그 때 저는 생전 처음 그런 곳을 갔기 때문에 사람이 그렇게 많이 모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경북대학교 대운동장에 사람이 개미떼처럼 많았다. 그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지나 콘서트를 보려다가 한순간 내 뒷주머니에 있는 지갑이 없어진 것을 알았다. 지갑에는 부모님이 주신 일주일 용돈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는데 지갑과 함께 그 많은 인파의 사람들과 함께 사라져버린 것이다. 지갑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정말 불편하고도 맘 아픈 일이다. 결국 그 지갑은 운동장과는 아주 거리가 떨어진, 동구에서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수성구 경찰서에서 지갑을 찾긴 찾았다. 돈만 빼가고 그래도 지갑은 찾았다.

 

 

   

  저는 어릴 적,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인지 모르겠다. 부모님을 따라 외갓집에 가려고 시외버스를 탄 적이 있다. 어린 저에겐 그 외갓집 가는 길이 굉장히 멀어보였다. 경산에서 의령이었는데.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어머니가 잠시 볼일 보러 가신다고 가고 저는 버스에 혼자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엄마가 ‘금방 올께’라고 하시면서 자릴 비우자 갑자기 ‘엄마를 다시 못 오면 어떻게 하지? 엄마가 오기 전에 버스가 떠나버리면 어떻게 하지? 이러다가 엄마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온갖 겁과 두려움과 불안감이 급증했던 기억이 있다. 내 사랑하는 엄마를 잃어버릴까봐 노심초사 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게 난다. 그 때의 감정이 강렬하긴 강렬하였나 보다.

 

 

 

 무언가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누군가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너무나 불행한 일이다. 소중한 물건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 바로 그 자리에 없거나 사라졌거나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정말 놀라기도 하고 당혹스러워할 것이다.

 

 

  몇 년 전에 단기선교사를 떠난 한 형제의 어머니가 자기의 허전한 마음을 이야기하는데 가슴이 짠 했다. 한 3년 정도 둘로스호를 타고 단기선교를 갔다가 오는 코스였는데, 늘 같이 있다가 3년 동안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니깐 그 형제의 어머니가 말하기를 아들이 떠나고 한 몇 일 동안은 정신이 차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믿고 의지했던 아들의 얼굴이 집안에 보이지 않자 엄마 당신의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겠더라고 하셨다.

 

 

  우리는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종종 우리 눈에 들어오는 문구, 광경이 있는데, ‘애완견을 찾습니다’ 모양은 어떻고 색깔은, 품종은 어떻고 무엇을 잘 먹고 마치 사람인양, 자식인양 강아지를 찾는 광고이다. 또는 ‘사람을 찾습니다’라고 하면서 길 잃어버린 자녀를 찾는 광고나 전단지 내용이나 신문의 기사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고당시 어떤 옷을 입고 있었고 어떤 신체적인 특징이 있으며 그 때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말투는 어떤 말투인지 등...그런 기사나 이야기를 우리는 아무 감정 없이 지나쳐가면서 보지만 당사자의 마음은 정말 뼈가 녹아내리지 않을까 싶다.

 

 

 

 

  잃어버린다는 것, 잃어버린 자,

  무언가 아니면 누군가를 잃어버리지 않고서는 우리는 그 상실의 아픔을, 상실의 크기를 잴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평소에 익숙하게 사용하던 볼펜 한 자루, 늘 즐겨 보던 성경책, 자주 신고 다니던 신발 등. 익숙했던 것을 잊어버렸을 때의 불편함은을 당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놀이터나 아니면 놀이동산에서 실컷 재미있게 놀다가 돌아보니 사랑하는 자녀가 행방불명되었을 때의 그 심정, 그래서 그 잃어버린 자녀를 찾기 위해 애타게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을 당하지 않고서는 어찌 알겠는가? 천안함 사건후 사랑하는 남편, 아들, 아빠의 시신이 장례식장에 들어올 때 오열하는 가족들의 마음은 우리가 텔레비전을 바라보는 시청자의 입장에서도 억장이 무너지는데 그 사람들의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정말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을 것이다.

 

 

 

  한 10여년 전이었나? 사랑하는 아버지를 먼저 보내드리고 장례식에서 돌아온 한 선배 목사님. 장례식을 마친 그 날 집에 들어왔는데 너무 허전하고 휑하고 허무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느낌은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다시 볼 수 없다는 느낌! 다시는 이 땅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절망감이 더욱 사람의 마음을 아픔의 늪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잃어버린다는 것에 대해서 잠시 여러 가지 각도에서 짤막하게나마 나누어보았다.

  오늘 본문에서도 100마리의 양 중에서 99마리는 지금 건강한 상태이고 양호하지만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린 목자는 ‘아직 99마리가 있으니 새끼 낳고 그 99마리 잘 돌보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는 그냥 눈에 보이지도 않게 잘 보충될 수 있어, 신경쓸 거 없어!’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환경에서 목자와 양의 관계를 안다면 그런 수학적인 환산으로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갈 순 없을 것이다.

 

 

 

당시 양 일백 마리는 양 한 우리에 해당한다. 목자들은 밤중에 양들의 숫자를 세어보곤 하였다. “들”이란 곳은 양들을 두기에 안전한 장소였다. 목자는 놀라고 두려움에 싸여 갈 길을 몰라 헤매고 있는 양, 어쩌면 몸을 다쳤을지도 모르는 잃은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온다(5절).

 

 

 

  8-10절: 여기서 잃어버린 것은 “드라크마”이다. 그 동전들은 신부의 결혼 지참금으로 항상 몸에 지니고 있던 것이었다. 여기서 그것이 현금이든 아니든 그것은 그녀가 가진 전 재산이었을 것이다. 그 여인이 자신의 재산의 1/1o이나 되는 돈을 잃었다가 찾았을 때 같이 기뻐하는 것은 능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여기서의 중요한 포인트는 “잃었다가...다시 찾았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잃어버린 자의 마음이 어떠했을까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잃어버린 자를 향한 시선이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바라보는 목자의 시선이며,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여인의 시선이다. 더 나아간다면 집을 나간 탕자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이다. 이 모든 것, 잃었다가 다시 찾는 목자나 여인이나 아버지의 마음은 말 그대로 ‘잃었다가 다시 찾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드러내준다. 깊은 슬픔과 깊은 절망과 통곡의 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다시금 되찾았을 때의 그 기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우리는 텔레비전을 통해서 아니면 다른 각종 매체나 경로를 통하여 소위 ‘잃어버린 자’에 대한 마음을 전해들을 수 있고 그들을 향하여 우리의 감정을 전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아이티의 재난을 당한 국민들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을 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없는 자, 약한 자, 가난한 자, 상실 중에 있는 자, 절망 가운데 있거나 사고를 당한 자, 아프거나 죽음의 고통을 지나고 있는 자 등등. 수없는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향해 긍휼의 눈치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잃어버린 자를 향한 긍휼!

  우리는 육체적인, 육적인 잃어버린 자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은 참 많은 것 같다. 인간적인 양심이 움직임에 따라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동정심을 가지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은 어쩌면 영적인 긍휼보다 쉬운 일처럼 보인다. 연말연시 불우한 이웃을 돕는 것처럼 아마도 그것은 무엇보다도 눈에 보이는 고통과 환경과 현실 때문에 마음이 더 잘 움직일 것이다. 육적인 아픔과 고통과 상처는 일단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려하고 건강한, 겉으로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그 사람의 몸 안에 감추어진 부위가 썩어가거나 병이 들었거나 아프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눈에 보이는 질병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질병이 더 무서운 것이 아닌가? 불치병의 징후가 우리의 눈에는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나타나는 이웃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과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저서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은 바로 ‘절망’이라고 했다. 사람들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을 가지고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소망의 약으로 이 절망의 병을 치유하였다고 한다면, 불신자들은 아직도 이 절망의 병을 가지고 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지금도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가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이다.

 

 ‘잃어버린 자를 향한 긍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10절)

 

 

 

  결론적인 메시지이다. 한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잃어버린 한 영혼, 원래 하나님의 형상이었던 인류가 죄로 말미암아 관계가 깨어진 사람,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한 영혼이 돌아올 때 천국의 모든 사자들! 하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덩실덩실 춤을 추신다는 것이다.

 

 

“하나님 기뻐 노래하시리 열방이 주께 돌아올때

하나님 기뻐 춤추시리 잃어버린 영혼 돌아올 때”

 

 

 

  성경적인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가 잃어버린 자를 향한 긍휼의 시선은 우리 자신에게도 유익하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다른 이들을 긍휼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선행될 때 긍휼히 여김을 우리가 조건반사적으로 누린다고 이야기한다.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바른성경) 긍휼히 여기는 자들은 복되다.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7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will be shown mercy.

 

 

  그런데, 이 사실을 더 명확하게 확증해주는 말씀은 주기도문에서 등장한다.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바른성경)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한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며,

12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우리가 다른 형제나 자매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도 용서는 국물도 없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는 우리의 다른 이들에 대한 용서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말씀을 아우르면 우리가 잃어버린 자를 향한 긍휼이 없이 우리 자신만을 생각하며 배부르게 안주하며 자기 앞가림만 하고 살아간다면 거기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긍휼하심이 없을 수도 있다는 무서운 말씀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배타적인 종교라고 한다. 독선적이고 자기 멋대로의 종교라고 한다. 그렇다. 진리를 외치는 면에서는 독선적이며 배타적이다. 종교다원주의를 거부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 진리의 측면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사랑이고 관용이고 포용이고 희망이요 소망이다. 끊임없이 타인을 생각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종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냥 가만히 누워서 떡만 입에 넣으면 되는 식의 구원과 종교가 기독교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기독교가 한낱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불안과 현세의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이전의 모든 종교들의 목적과 비슷한 하나의 종교철학이나 이데올로기나 안전장치가 아니다. 기독교는 타인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용서와 관용으로 도배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먼저 그리스도를 믿는 한 개인의 삶을 다룬다. 그 개인은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받는데 있어 그냥 자기만 받고 입 싹 닦고 치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과 용서와 화해와 능력은 공동체적으로, 타인에게로 확장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이다. 사랑은 전염성이 강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은 사람과 사람을 전염시킨다. 긍휼은 긍휼은 낳는다. 사랑은 사랑은 잉태하고 새끼를 치고 열매를 맺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의 빚진자이다.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는 말이다. 구원받고 천국가면 땡! 이면 참 양반같고, 참 선비같고 신사같고 좋을텐데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고전 1:21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 복음을 전해지는 것을 기뻐하셨고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셨다. 기독교는 끊임없이 활동하고 움직이는 동적인dynamic한 종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온 인류를 향해, 전 세대를 향해, 전 시대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다. 우리는 그 한량없는 십자자의 은혜를 가지고 주님이 찾기를 원하시는 잃어버린 자를 향해 긍휼의 마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여러분이 믿는 기독교는 과연 어떤 기독교인가?

  선택받은 자의 당연하고 고급스러운, 특정인물들의 전유물인가? 천국티켓을 받기 위한 하나의 매표소는 아닌가? 아니면 잃어버린 자를 향한 한없는 긍휼로 지금도 낮고 낮은 곳으로 흘러내려가는 평안의 복음인가? 잃어버린 자를 향한 긍휼은 우리의 빚인 것이다. 우리는 복음의 빚을 지고 있다.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 표독스럽고 고집스럽고 이기적이며 남에게 내어줄 줄 모르는 그런 변질되고 고집불통인 스쿠루지 영감같은 것이 기독교가 아니라 잃은 양을 찾고,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고, 잃어버렸던 아들을 찾는 하나님의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광주를 품고, 한국을 품고, 세계와 열방을 품으라! 그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나아가는 '잃어버린 자를 향한 긍휼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 교회 동역자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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