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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로마서

로마서 강해㉒ 8:10-11, 성령의 현재와 미래의 사역

by Message.K 2021.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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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복습:


A 영화에 대한 확신(5장)
  B 구원의 확신의 장애물인 죄를 다룸(6장)
  B 구원의 확신의 장애물인 율법을 다룸(7장)
A 영화에 대한 확신(8장)
5장과 8장의 차이는? 

로마서 5장
로마서 8장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구원의 확신을 강조
성령의 사역과 성령의 내주를 통한 구원의 확신을 강조

  성령의 사역이 곧 신자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근거이다. 

1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통한 구원의 확신의 근거(8:1-13)
2
양자되게 해 주시는 성령을 통한 구원의 확신의 근거(8:14-17)
3
신자를 위해 기도하시는 성령을 통한 구원의 확신(8:18-30)
4
강력한 구원의 확신에서 우러나오는 찬양(8:31-39)

 

 


 로마서 8장의 구조
성령을 통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1-4절)
성령 안에서 성령을 따라 사는 신자의 특징(5-9절): 
-그리스도의 영이 거함, 주되심 고백, 관심사(성령의 생각), 성령의 열매
*신자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현재와 미래의 사역(10-11절):

 

 

 


언젠가 명절 연휴때에 아내와 함께 ‘감기’를 보러 갔었다. 근데 영화를 보는 가운데, 전화가 왔다. 장모님께서 막내가 계속 운다고! 결국 나는 감기를 보다가 말고, 집으로 가서 막내를 달래고 얼르고, 그렇게 ‘감기’는 제게서  떠나가버렸다. 그 감기 바이러스로 말미암아 분당 폐쇄령이 내려진다고 보았다. 감기바이러스가 몸 속에 퍼진 사람, 감염된 사람은 모두가 그 감기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영화 ‘감기’는 단순한 감기를 재난적인 싸인으로 해석하여 영화를 재미나게 그렸다고 하더라. 감기바이러스가 소유한 사람은 죽어가는 것처럼, 반면에 신자는 성령을 소유하였기에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 

 

 



  지난주에 신자에 가장 중요한 특징이 성령 안에 있는 신분이라는 것을 같이 나누었다. 성령, 그리스도의 영이 신자 안에 내주하신다는 것이다.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성령의 사역을 말해준다. 
특별히 이 두 가지는 현재와 미래에 행하시는 성령의 중요한 사역임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은 10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첫째, 성령의 현재 사역: 신자에 내주하면서 현재 신자의 영을 살려주신다.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었다. 몸, 육체는 언제나 죽는다. 왜 죽는가?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죽는다. 신자나 불신자나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하였고, 죄의 결과, 최종 목적지는 죽음이다.

 

 

 

 

참 가슴 아팠던 죽음이 있었다. 대구에서 한 젊은 신혼부부였는데, 남편은 31세, 아내는 26세였다. 아내가 갑자기 암에 걸렸다. 머리가 빠지기 시작하더니만, 그 많던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몇 개월 후에 결국은 남편과 한 살인 아기를 남겨놓고 소천하였다. 제 교구여서 심방을 할 때, 그들이 이제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보였다. 아내는 딸아이와 남편과 함께 생애의 마지막을 여행을 하면서 보내는 것을 가슴 아프게 보았다. 그렇게 간절히 아내의 회복을 원했지만, 그 암세포를 소유한 그녀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젊거나, 늙거나, 믿음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사람은 죽는다.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또한 몸은 도덕적으로도 죄의 온상임을 보여준다. 몸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몸은 죄가 활동하는 주무대이다. 몸이 있는 한, 암은 보이지만, 죄는 보이지 않는 죽음의 바이러스라서 언젠가는 다 무덤으로 가게 된다. 그래서 신자가 몸을 가지고 있는 이상 이 세상에서 죄를 짓기도 한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신자의 영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즉 신자는 성령을 통해 새롭게 태어났다. 그래서 신자는 영이신 하나님을 즐겁게 예배할 수 있고, 찬양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도 있고,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반면에 불신자의 영은 죽어 있다. 그래서, 불신자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시체와 같다.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하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원수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영이 죽어 있기 때문이다. 불신자는 몸도, 영도 죽어 있다. 그러나 신자는 다르다. 신자의 몸은 여전히 죽어 있지만, 영은 살아 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소통이 되어서 맘껏 교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영과 영이 통하게 된 것이다. 찬양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눈물도 흘리고, 손을 들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기도 하고, 기도할 때 마음이 답답한 것들이 뻥 뚫어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내 영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잘나서?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성령의 법이 내게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세상적으로 보면 신자와 불신자는 다를 바 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신자는 산 자이나 불신자는 죽은 자이다. 

 

 

  사랑하는 청년. 대학부 여러분! 
  여러분은 믿음이 있기에 영이 살아 있는 자임을 기억하라! 성령께서 여러분의 영을 매일 매일 새롭게 하실 줄 믿는다. 

 

 


 둘째, 성령의 미래적 사역: 성령은 신자에 내주하시면서 미래에 신자의 몸을 부활시켜 주신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11절)

 


 신자는 영이 살아 있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신자의 죽은 몸이 부활할 때가 온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는 날에 모든 신자의 몸이 영광스럽게 몸이 부활할 것이다. 인성으로 오신 예수님이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몸처럼 변화될 날이 온다. 현재 우리 영이 살아 있는 것만이 아니라 죽은 우리 몸이 다시 부활함으로써 비로소 신자의 구원이 완성된다. 예수님을 살리신 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재림의 날에 우리의 죽은 몸이 살아나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소망이다. 우리가 부활하는 날에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얼마나 큰 지 온 천하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불신자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영위해야 하는 종교인이 된다는 차원이 아니다. 신자가 되면 종교가 생겼으니 심리적인 안정과 평안을 누리는 정도의 차원이 아니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현재 우리 몸은 죽었지만, 우리 영은 살아 있다. 미래의 주님의 재림의 때 우리의 죽은 몸도 살아날 것이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는 인간의 인생이 그냥 허무와 허망의 그 자체로 끝날 뻔 했는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육체를 부활시켜 주시는 것이다.

 

 

 

 왜 육체를 부활시켜주시는가? 죄많은 육체를 뭣하러? 예수님의 몸도 부활하셨다. 몸이 중요하지 않고 영만 중요하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의 몸이 중요한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리 신자의 몸도 부활할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어떤 식으로 부활할지는 모른다. 우리 인생의 가장 잘 나갈 때, 가장 멋진 모습으로(하나님의 기준에서 or 인간적인 기준에서) 부활될지 아니면, 내가 죽었을 때 바로 그 모습으로 부활될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바울은 에스겔 37장의 생명의 영이라는 문구가 바울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부활에 영향을 미친 그 수단은 바로 성령이었다는 것이다.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다!-여기서 ‘의’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신자들에게 선물로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의를 가리킨다. 부활의 근거, 부활의 원인적인 것 "디아 디카이오쉬넨“
 우리는 육신으로 인해 죽지만, 의로 말미암아 생명을 주시는 영 때문에 다시 부활한다는 것이다. 에스겔 37장에서 마른 뼈가 사방에 흩어져 있는 그 골짜기를 에스겔이 지나갈 때 그 뼈는 매우 말랐다고 했다. 에스겔에게 하나님이 묻는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주께서 아시나이다”

5절: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절: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몸의 부활은 성령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오신 보혜사 성령은 때마다 시마다 우리를 도우실 뿐만 아니라 우리 육신이 죽어 흙으로 돌아갔을때라도, 성자 그리스도가 부활하실 때 우리의 몸을 일으키시는 분이시다. 성령은 우리의 죽을 몸을 일으키시고 변화시키실 하나님의 ‘생기’이다.

 

 

 


  사랑하는 청년.대학 여러분!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멀게는 여러분의 미래가 소망의 미래이며, 부활의 미래임을 믿으시길 바란다. 좁게는 여러분의 인생이 얼룩져 있다고 생각하는가? 여러분의 인생이 뭔가 부족하고 연약하고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는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일으시키고 소생시키시고 회복시키시는 생기임을 믿으라! 

 

 


우리가 어떤 큰 수술이나 큰 슬픔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같은 어려움과 위기를 만났을 때, 우리는 목사님의 말씀이나 심방자의 위로를 통해 우리가 큰 힘을 받는다.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누군가 따뜻한 말 한마디가 내 마음에 꽂힐 때 그 말은 단지 흩어지는 메아리가 아니라 내 삶을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 주중에 수요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J에게 없어진 자전거! J 자전거 증발사건으로 인해 J가 굉장히 힘겨워할 수 있지만, C와 다른 지체들의 축복과 위로의 언어가 J가 잃어버린 자전거로 인한 상실감에 머물러 있지 않게 했다. 사람의 말도 그러한데, 성령의 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성령의 생기는 파워풀한 것이다. 메마른 뼈와 같은 우리의 심령과 상황을 고치고 회복시키고, 치유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주님의 부활은 공허한 슬로건이 아니다. 부활절날 부르는 주제가가 아니다.

 

 

 

부활은 능력임을 믿으라! 부활은 우리 삶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기억하라!

 

여러분의 삶이 무너져있고, 순결과 순수와 자존심과 명예와 인기와 프라이드가, 성적과 진로에 대한 비전들이 무너졌는가? 하지만, 성령의 생기가 여러분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회복시킬 것이다. 그 성령의 능력을, 부활의 능력을 믿으라! 육신은 언제나 실패할 수 있다. 인간은 언제나 넘어질 수 있다. 인간은 언제나 메마를 수 있다. 황폐해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성령은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는 하나님의 질문 앞에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제게 맡겨주십시오’라고 대답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절망을 걸어가는 인생이지만, 하나님은 그 절망의 인생을 옷걸이로 걸어 희망의 못에 걸어주시는 분이시다. 희망의 언덕에 우리를 세워주시는 분이시다.

 

 

You raise me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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