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가 히말라야 산맥이라면 로마서 8장은 히말라야 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에베레스트 산과 같다. 로마서가 반지라면, 로마서 8장은 반지 속의 보석과도 같다. 로마서 8장은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장 장엄하고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1-4장은 이신칭의가 주제(칭의)였다면,
이제 5-8장에서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주제로 ‘영화’에 대한 부분을 담고 있다.
A 영화에 대한 확신(5장)
B 구원의 확신의 장애물인 죄를 다룸(6장)
B 구원의 확신의 장애물인 율법을 다룸(7장)
A 영화에 대한 확신(8장)
5장과 8장의 차이는?
로마서 5장
로마서 8장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구원의 확신을 강조
성령의 사역과 성령의 내주를 통한 구원의 확신을 강조
로마서 8장에는 성령이 많이 언급된다. 지금까지 로마서 1-7장에서 성령에 대한 언급은 모두 4번(1:4, 2:29, 5:5, 7:6)밖에 없었지만, 로마서 8장에는 무려 열아홉 번이나 된다. 8장에서 영이라는 말이 스물한번 사용되는데, 15절 상반절의 두 종의 영과 16저 하반절의 우리 영이라는 두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성령을 의미한다. 성령의 사역이 곧 신자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근거이다.
1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통한 구원의 확신의 근거(8:1-13)
2
양자되게 해 주시는 성령을 통한 구원의 확신의 근거(8:14-17)
3
신자를 위해 기도하시는 성령을 통한 구원의 확신(8:18-30)
4
강력한 구원의 확신에서 우러나오는 찬양(8:31-39)
로마서 8장의 구조
성령을 통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1-4절)
-우리는 정죄받지 않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내 안에 보내어주심으로 나에게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어 주셨다.
우리가 인식하고 의식하지 못하지만, 성령은 역사하신다. 기도회를 인도할 때, 찬양이 생각지도 못한 찬양이었는데, 그 찬양이 그때 목사님의 전한 메시지와 잘 연결된다. 분위기도 한층 더 고무된다. 내 이성과 내 합리적인 사견으로 도저히 이해 안 되는 현상들이 생길 때 그 때 성령이 역사하셔서 이루신 결과인 것이다.
로마서 8:4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킨 것은 성령을 좇아 살도록 하기 위함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제 바울은 8:5-17에서 본격적으로 성령을 좇는 삶을 조명한다. 크리스찬의 삶은 육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영을 따르는 삶이다.
-특별히 성령을 따르는 삶과 육을 따르는 삶을 날카롭게 대조(5-8절)
-독자들은 육의 영역에서 성령의 영역으로 이전된 자들(성령따라 9-11절)
-하나님과 가족관계에 들어간 자, 곧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후사임을 강조하는 12-17절이다.
방익수가 부른 ‘내가 사람에게 좋게하랴’는 찬양을 다 같이 한번 감상하며 불러보면 더 좋겠다. 단순한 내용이고 단순한 가사인데, 은혜가 있다.
육신의 삶은?
갈 5:19-2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온갖 종류의 성적, 윤리적, 사회적, 종교적 범죄와 타락 행위를 저지른다고 지적.
육과 영은 단순히 ‘육체’와 ‘영혼’을 이야기하기보다, 옛 시대와 새 시대를,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를 대변하는 종말론적인 세력이 대변자로 간주할 수 있다. 불신자의 행동양식은 육신을 따르는 삶에 기초한다. 사자는 육식 동물의 본성이 있다. 양은 초식동물의 본성이 있다. 불신자는 타락한 죄인의 본성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육신을 따라 살아가는 불신자의 삶의 특징은 한 마디로‘ 사망’이다. 여기서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불신자가 영적으로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께 아무 반응이 없다는 뜻이다.
육에 따라 사는 자는 육신의 지배와 영향력을 받는 자라는 말이다. 육적인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육신은 세상의 타락성과 멸망할 운명을 공유하는 사람이나 사물을 가리킨다. 바로 여기서 성령을 통해 7장에서 불가능했던 율법에 대한 순종이 가능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율법의 진정한 목적인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중립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령에 속하지 않는 것 자체가 바로 육에 속한 것이다. 바울은 성령 없는 신자의 신분을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또한 성령 없는 신자의 삶도 생각할 수 없음을 거듭 확인한다(갈 5:25).
육신의 일은 꼭 강도, 강간, 살인, 도적질 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육신의 일에는 공부하고, 일하고, 노래하러 갈 때, 축구하고, 사업하고, 결혼하고, 자녀를 낳은 등의 모든 일이 포함된다. 육신의 일은? 하나님이 없이 이뤄지는 모든 일과를 말한다.
요일 2:15-16에선 요한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신자는 먼저, 성령 안에 있는 자이다.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영역 안에 있다는 말이다.
참된 신자를 구분하는 기준은 단순한 교회 출석이 아니다. 지역교회 등록여부가 아니라 성령, 그리스도의 영이 거해야만 한다.
둘째, 신자의 사고방식은 ‘성령의 생각’이다.
성령의 생각이란 성령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모든 것을 생각한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은 죄에 대해 민감하다. 또한 자기 영혼의 성장에 관심을 가진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과 사역에 관심이 많다. 그리스도를 묵상, 구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성경에 관심이 많고, 기도와 성도의 교제와 전도에 관심이 많다. 세상의 상태에도 관심이 많다. 세상의 배후에 벌어지는 영적인 상황을 직시한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영적인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먼저 구원의 확신-생활의 증거(주관적인 증거)에는 무엇이 있는가?
첫째, 주되심의 고백 이다.
(고전12: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님께서 신자로 하여금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것은 바로 ‘성령’으로서만 가능한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나서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보면서 예수님을 ‘저주할 자’라고 불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크고도 엄중한 저주를 받은 자’라고 비난했다. 왜냐하면
(신 21:23)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십자가처형을 해 놓고서 그것이 하나님의 율법에 저촉되는 저주의 형벌이라면서 예수님을 대적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이중적인데 인류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나무 십자가 형틀에 죽임을 당하여야 마땅하였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받으신 하나님의 저주는 곧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저주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저주’를 몸소 짊어지고 우리 대신 죽으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주님으로 부른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받은 후 예수께서 자신의 주인이 되심을 입술로만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고백하고 인정하게 된다. 이것을 ‘주되심Lordship’이라고도 한다.
두번째, 구원의 확신의 주관적 증거는 관심사 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롬 8:5)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영을 좇는 사람은 무슨 일을 생각한다고 하였나? 그렇다.
구원을 받고 난 후에는 이전에 즐기던 세상의 일보다 영적인 일(말씀을 읽는 것, 묵상하는 것, 기도하는 것, 하나님과 교제 나누는 것, 그리스도인과 함께 모이는 것,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 등)에 더 관심이 쏠리고 추구하고 싶은 의욕이 생긴다. 여러분의 관심사는 무엇인가? 여러분이 나이가 어려서, 잘 몰라서 그렇다 하더라도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다면 이제 관심사가 달라져야 한다. 성경을 읽고 때때로 기도시간을 가지고 교회에 자주 자주 모이고, 가끔 친구에게 전도를 하는 것을 통해 여러분은 예전에 ‘육신의 사람’이 아니라 이제는 ‘영의 사람’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믿지 않는 친구들을 보라. 그 친구들에게는 ‘영적인 관심’이 없다. 하나님에 대한 no reaction! 무반응! 여러분들도 그러한가? 그러면 여러분들도 구원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일주일에 성경을 몇 장 읽고, 년 중 성경을 몇 독 하느냐 의 양적인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우리가 영적인 일을 양으로 승부한다면 그것은 구원이 선물이 아닐 것이다.
구원은 선물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다면, 우리 맘 속에 영적인 욕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말씀을 읽고 싶은 마음, 말씀을 계속 접하지 못하면 마음이 답답해지고, 기도를 하지 않으면 가슴에 무언가 맺힌 것 같고 그러다가 수련회나 어떤 계기를 통해 말씀을 듣고 기도를 좀 하게 되면 눈물도 흐르고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은 느낌…그런 느낌 받아 보지 않았는가? 바로 그러한 일들이 ‘영의 일’, ‘영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영적인 갈증과 갈망’이 생길 때 그것을 억제하시지 말기를 바란다. 누르고 누르면 고갈된다.
그러기에 그 영적인 욕구와 충동이 일어날 때, 기도하고 말씀보고 전도하고 자주 교회에 모여 교제를 나누기를 바란다. 아무리 아름답고 멋진 화분의 화초라 하더라도 햇빛을 받지 않으면 언젠가 시들어버리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 분 앞에 있지 않으면 언젠가는 시들어버린다. 우리의 영혼이 시들지 않도록 늘 활력과 생동력이 넘치도록 말씀과 기도와 교제와 찬양과 전도로 가꾸어가길 바란다.
세번째 구원의 확신의 주관적 증거는 성품 이다.
[갈 5:22-갈 5: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책망하셨다. 성령께서는 신자의 성품에 ‘성령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신다.
반면 성령에 따라 사는 자는? 갈 5:22-23
신자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시대의 선물로 주어진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미 새 시대의 삶을 살아야 하는 “새로운 창조물”(고후 5:17; 갈 6:15)이 되었다. 새 시대의 삶에 대한 소명을 받았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한 신자의 구원이 사실이라면 그는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 가며 생활 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것은 단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늘 가까이하면 그 사람은 시간이 조금씩 조금씩 지나면서 1년, 2년…10년, 20년 지나면서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그 변화가 바로 성령의 열매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1년이 지나도, 5년이 지나도, 10년이 지나도 옛날 괴팍하고 못된 성격 그대로라면 그 사람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타락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셨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성령의 열매, 예수님의 성품’을 하나씩 하나씩 닮아가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는 우리가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에 의해 지배를 당하게 된다. 컴퓨터를 하는 것에 많이 몰입하면 컴퓨터에 의해 우리의 인격이 형성된다. 특별히 청소년기, 청년기에는 더욱 그렇다. 여러분은 아직 모든 것이 백지상태와도 같은 순백한 상태이다. 무엇을 쓰던지 그대로 써지는 시기이다. 이 때가 중요하다. 과거에 폭력 비디오나 음란 비디오물을 본 학생이 그 내용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그리하여 결국 그러한 범죄를 모방하여 자행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너무 깨끗하고 맑기 때문에 성인들이나 어른들 보다 자극적인 것이 더 잘 먹힌다. 그래서 그것이 여러분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혼을 스스로 보호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고 싶은 대로 할 때가 많다. 왜냐하면 내가 그걸 지금 원하니깐, 느끼니깐.
이야기가 많이 옆으로 새 나갔는데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무엇과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내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인생이 그것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20대, 그리고 30대이기 때문에 더 특별히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영적인 씨앗이 인간의 마음에 심겨지면, 그 씨앗이 싹을 틔워 줄기를 내고 자라기 시작한다. 영적인 생명이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적인 일을 생각하는 것으로 열매를 맺게 된다. 생명의 욕구, 영적인 욕구가 있다는 말이다. 영적으로 살아난 사람들에게 가장 큰 특성은 바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무엇보다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 생겨난다.
자신의 죄를 깨닫는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100%완전하게 잘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씩 순종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는다. 어린 아이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서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법을 100%순종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신자는 진심으로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기 원한다.
우리의 구원의 확신, 구원의 증거는 바로 성령의 사역으로 가능합니다!
*찬양: 방익수의 ‘내가 하나님께 좋게 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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