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어거스틴(St.Augustine)은 고대 교회사의 가장 뛰어난 인물이다.
고대 교회의 역사를 마감하고 중세 교회의 문을 열기 바로 직전인 전환기의 시대를 살았던 어거스틴은 사도 바울과 16세기 마틴 루터 사이의 커다란 한 봉우리를 차지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생애와 사상적인 영향은 중세교회뿐만 아니라 종교개혁기와 현 교회에 이르기까지 실로 지대하였다. 그것은 2천 년 기독교의 역사 발전이 사실상 바울에 이어 어거스틴, 그리고 루터로 이어지는 세 사람의 표준에 의해 그 방향이 설정되기 때문이다. 즉, 기독교 사조의 흐름과 전통은 사도 바울에서 시작되었고, 어거스틴에 와서 조직화되었으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다시금 초대교회 복음주의의 핵심인 바울 사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어거스틴의 초기 생애
어거스틴은 AD 354년 11월 13일에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조그만 촌락 타가스테에서 출생하였다. 성질이 사납고 습관이 있는 그의 부친 파트리키우스는 로마임의 피를 계승한 시의원이었는데, 이교도였으나 어거스틴이 청년이 되었을 때에 부인으로부터 감화를 받아 죽기 얼마 전에 개종하였다.
어거스틴이 어린 시절 기독교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한 것은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엄격한 신앙교육의 덕택이었다. 모니카는 당시 교회의 통속적인 신앙을 가지고 살았던 경건하고 온순한 기도의 여인이었다.
어거스틴은 교회의 입교문답은 하였지만 아직도 세상욕망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갖고 있었다. 사춘기를 보내면서 육체의 욕망에 눈을 뜬 그는 집안 형편상 17세에 카르타고 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1년간 휴학을 하면서 방탕한 친구들과 어울려 쾌락을 찾아 불나비처럼 날아다녔다.
그는 당시의 세속적인 사람들과 같이 결혼하지 않고 동거생활을 하였는데, 로마 시민으로서는 결혼할 수 없는 신분이 낮은 계급의 여성과 함께 13년간을 지냈다. 어거스틴은 이 기간 중에 아데오라투스(하나님이 주셨다)라는 아들을 낳기까지 하였는데, 자신과 같이 총명한 아들을 바라보면서 장래에 대한 큰 꿈도 가져 보았으나, 아이는 여덟 살에 그만 죽고 말았다.
회심하기까지
한편, 윤리적 이상과 거리가 먼 방탕한 삶을 살아가면서, 그는 열아홉 살에 시세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불멸의 예지에 대한 정령을 불러일으키면서 자신의 영혼까지 만족시킬 수 있는 철학을 찾기 시작했다. 이 책은 새로운 철학적 내용으로 그를 격려하며 진리 추구에 대한 열망을 가져다주었으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주지 못했다.
어거스틴은 진리를 소유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유년기시절을 회상하며 성경 가운데서 진리를 찾으려 하였으나 성서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성서는 문체가 조잡하고 그 내용을 터득하기 어려운 책으로 다가왔다.
따라서 다음의 가능성으로 마니교에 입문하여 9년간의 세월을 소비하였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고민하면서 마니교와 아카데미파 회의론 사이에 오가던 그는 신플라톤 철학과 밀란의 주교 암브로스와의 만남을 계기로 하여 이전 기독교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다.
카르타고의 학문을 마친 뒤 수사학과 교사가 된 그는 밀란으로 와서 암브로스를 만나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기독교 진리에 접했으나 아직도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으로 남아있었다.
어거스틴의 방탕을 막기 위애 어머니가 소개해 준 여인과 결혼하여 하였으나 법정 결혼 연령의 미달로 결혼이 연기되자 어거스틴은 다른 여인과 불륜의 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로써 자신은 불완전하고 죄뿐인 존재로 인식하면서 내면의 고통과 갈등은 더욱 심화되어 갔고, 그의 영혼은 갈기갈기 찢겨져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또 한 사람과의 만남이 어거스틴에게 결정적인 계기를 가져다주었는데, 그는 어거스틴의 동향인인 폰티키아누스였다. 폰티아누스가 안토니 수도사의 전기를 들려주고 두 명의 로마 군대 장교가 군대직을 버리고 수도사가 된 것을 어거스틴은 자기가 계속해여 머뭇거리던 것을 단호히 행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크게 부끄러움을 느꼈고 자신의 이성의 한계를 절감했다.
어거스틴이 걷잡을 수 없는 부끄러움과 통한의 심정으로 눈물을 흘릴 때, 옆집 아이의 노래 소리가 들리며 “집어서 읽어라.”는 노래 가사의 음성에 이뜰려 자신도 모르게 성경을 펴서 읽으니 그 내용은 로마서 13장 11절-14이었다.
어거스틴의 회심은 AD 386년 여름, 성경을 읽은 후부터 시작되었고, 그는 바로 밀란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다.
37세에 힙포 시의 설교자로, 40세에는 주교가 되어 이후 430년 죽을 때까지 고대교회사의 가장 뛰어난 인물로 서방교회를 이끌어갔다. 그는 당시에 교회를 분열시키고 파괴하는 적대세력인 마니교와 도나티즘과 펠라기안주의를 떨쳐버리게 하는 혁혁한 공헌을 세우면서 교부 중의 교부요, 서방 신학자 중의 신학자인 교회의 아버지로서의 삶을 살았다.정상운, 교회사의 사람들, 이레서원, pp.93-97. 어거스틴(St.Augustine)(교대 교회사의 가장 뛰어난 인물)| 영음
어거스틴을 보면서 우리는 사람 안에 끊임없는 갈등, 두 가지의 법의 끊임없는 싸움이 있음을 발견한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과 악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의 충돌,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마음과 내 자신만을 기쁘게 하고자 욕망의 충돌을 불가피함을 보여준다.
(쉬운 성경)
14 우리는 율법이 영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나는 영적이지 못하며, 죄의 노예로 팔린 몸입니다.
15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은 하지 않고, 미워하는 일을 행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16 내가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 일을 원하지 않는 것은,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입니다. 17 그런데 이제는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존재는 내가 아니며, 내 안에 살고 있는 죄입니다. 18 나는 내 안에, 다시 말해서 나의 죄악된 본성 안에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선을 행하려는 바람은 내게 있지만, 선을 행할 수는 없습니다. 19 나는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합니다. 20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행하고 있다면, 그 일을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살고 있는 죄입니다. 21 그러므로 나는 이런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선을 행하려는 마음은 나에게 있지만, 악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22 사실 나의 속 중심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합니다. 23 그러나 나의 몸의 여러 부분들에서는 다른 법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나를 내 몸에서 작용하고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24 나는 참으로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해 내겠습니까?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는 반면, 죄악된 본성으로는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습니다.
슈퍼맨과 스파이더맨-인간 안에 두 가지의 인격, 성품, 캐릭터가 있음을 구현한 영화이다. 평소에는 굉장히 겁쟁이지만, 슈퍼맨이 되면 완전 초강력 울트라 캡숑 짱맨이 되는 것이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소설-인간의 이중성을 고발, 낮에는 친절하고 고매한 인격의 헨리 지킬 박사이지만, 밤이 되면 하이드씨로 변한다.
롬 7:7-25의 ‘나’가 신자의 모습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 성화를 추구하는 유대인을 대변한다고 보는 것이 로마서 7장의 문맥적 흐름이나 주석적 측면에서 가장 타당하다. 그러나 현재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사이에 로마서 7:7-25을 회심한 바울을 포함하여 중생된 모든 크리스천에 관한 묘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처럼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모든 사람 안에 두 가지의 성품이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의 사실을 배우고FACT, 그것을 믿음으로FAITH, 기쁨을 누린다는 것FEELING은 확실한 일이다. 하지만 신앙 생활이 그렇게 쉽고 즐거운 일만이 넘치는 오색찬란한 무지개 꿈만으로 계속되는 것은 아님을 오늘은 같이 나누고자 한다. 때로는 마음속에 걷잡을 수 없는 심한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
‘내가 예수님을 믿었는데 왜 내 안에 이러한 갈등과 아픔과 고민들이 있는 것일까? 내가 고백한 신앙과 믿음과 영접이 순간적인 감정으로 인한 착각은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이중적인 마음을 한 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꿰뚫어볼 수 있고 사람이 가진 한계를 바로 알 수 있고 말 그대로 성경이 보여주는 바대로의 ‘나’를 아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육신의 의미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계속해서 좌절과 실망을 겪고 갈등에 휩싸이는 것은 중생 이후에도 우리에게 옛 성품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옛 성품이 성경에는 육신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이 말은 물론 신체physical body와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성경에는 육신이라는 말에 대해 두 가지로 풀이하고 있다. 먼저,
(골 2:5)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과 몸으로는 떠나 있음을 이야기하는 대목인데 여기서의 육신의 말 그대로 몸이다. 하지만 또 다른 의미는,
(롬 8: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하나님과 반대가 되는 것은 바로 육신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육신의 생각은 영이라는 것이다. 이 육신의 생각은 우리의 선조인 아담과 하와에게서 물려받은 자신을 주장하려는 의지이다. 선악과를 따먹는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보자. 뱀이 그들을 꼬셨다. 너희가 선악과를 먹기만 하면 너희는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똑 같이 능력 있는 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선악과만은 따먹지 말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따먹으라! 그러면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다.
사단이 꼬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러한 육신의 생각, 자신도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깊은 욕망에 의해 넘어지고 말았다.
(갈 5: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옛 성품의 정체
우리는 우리 속에 두 가지의 성품이 남아 갈등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이 육신의 특징은 어떤 것일까?
(렘 17:9)만물보다거짓되고심히부패한것은마음이라누가능히이를알리요마는-죄는 마음의 질병, 죽음에 이르는 병
(롬 8:8)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즉 이처럼 우리의 육신은 무엇으로도 개선될 수 없다. 또 중생하고 영접했다고 해서 옛성품이 없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18)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내게있으나선을행하는것은없노라
-선한 것, 선을 행하는 것, 여기서의 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롬 13: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여기서 옷은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들이고 믿음으로 사는 것, 그 분을 신뢰하고 닮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죄를 지은 후 자신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고는 나뭇잎으로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들을 가렸다. 하지만 이 나뭇잎은 햇볕을 받으면 얼마 있지 않아 말라 버리고 만다. 그 때 하나님은 가죽옷을 만들어 지어 입히셨다. 하나님은 탁월한 디자이너셨다. ㅋㅋ 이 가죽옷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우리는 매일 예수님으로 무장해야 한다.
중생 이후에도 육신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부패 성향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미 거듭났던(구원이 확신이 있었던) 사도 바울까지도 이렇게 말한 것이다.
새로운 성품
이러한 옛 성품, 즉 육신과는 반대로 중생을 통해 한 편으로는 새로운 성품이 주어진다.
(벧후 1:4)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사도 베드로는 믿게 된 사람들이 어디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바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참예하다는 것은 신의 성품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image을 반영하는 일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간다는 것이다. 옛날에 사람을 납치하여 칼로 조각조각 내고 그 사람고기를 먹었던 지존파를 알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그러한 잔인한 일을 행할 수 있느냐고 의아해 한다. 그 사람들은 악의 표상으로 사단이 특별하게 조종한 것도 있지만, 우리 인간 안에는 이러한 잔인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죄의 성품인 것이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하지만, 그 지존파의 한 사람이 예수님을 감옥에서 믿고는 변화 받아 사형 받기 전의 몇 년의 세월은 변화된 삶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런 지존파의 예는 인간 안에 있는 두 가지 성품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지존파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옛 성품에서 신의 성품에, 새 성품에 참여하게 됨으로 변화된 것이다. 이 새로운 성품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 태어날 때 아담의 자손으로 옛 성품을 지니게 되었다. 거듭날 때 하나님의 자손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지니게 된 것이다.
(요일 3:9)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사도 요한은 이 새 성품을 무어라고 하는가? ‘하나님의 씨’라고 한다. 이 새 성품이 결코 하지 않는 일은 무엇인가? 범죄하는 것이다. 범죄하는 것은 옛 성품이 하는 짓이다.
(롬 7:22)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하나님의 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벧전 1:22)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우리가 진리에 순종함으로 형제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바뀌었는가?
그러나 이렇게 새 성품이 죄를 짓지 않게 하고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형제를 사랑하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성품은 우리를 좌절하게 만든다. 이러한 긴장과 갈등 가운데서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해결할 수 있다.
(롬 8: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바울이 승리한 비결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이 법은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길 수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망하셨다. 죄와 사망의 법이 이기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명의 성령의 법이 사망에서, 죽음에서 부활을 만드셨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을 정복하였음 뜻한다. 새 성품이 옛 성품을 정복하였음을 의미한다.
● 결론…
7장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바울의 모습이 8장에 들어와선 완전 해소된다. 그 완전한 해소와 해방은 바로 그러므로 이제 어디서 이뤄지는가? 1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다. 인간 안에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양면성이 존재한다. 옛 성품과 새 성품이 공존한다.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표현처럼 '죄인적 의인'이기 때문이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의인이란 신분을 가졌지만,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는 죄인적tic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 갈 때까지, 죽을 때까지 우리는 이 두 성품의 공존한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 내 마음 속 두 가지 법으로 인한 갈등이 날마다 있다. 그것을 이길 힘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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