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전반부(1-14절): 우리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계속해서 죄에 거해야 하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6장 후반부(15-23절):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이제 죄를 지어도 되느냐?(또 하나의 수사학적인 질문)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지배하는 죄의 권세가 깨어졌고, 따라서 죄 짓는 일에 위험성이 별로 없음으로 계속해서 죄를 지을까?’라는 관점에서 탐구.
한국사회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인간상이 등장했다. 1980년대 오렌지족, 야타족, 깡깡족에서부터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 88만원세대, 된장녀, 초식남, 짐승남 등 시대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간 집단이 나타나고 또 사라진다. 미국에서도 오바마 대통령을 당선시킨 1977년 이후에 출생한 ‘O세대 1960년대 이후 태어난 X세대 가운데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추종하는 지지자들을 일컫는 말로서, 오바마(Obama)의 ‘O’자를 본떠 만들었다.
X세대는 1961년에서 1984년사이에 출생한 연령층을 일컫는다. Y세대는 1982년부터 2000년 사이에 출생한 Y세대는 미국에서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1946년부터 1965년 사이에 출생한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 세대다.
...
인간사는 이토록 다양한 군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인간을 딱 두 가지로 보고 끝낸다.
바로 ‘죄의 종’과 ‘하나님의 종’이다. 중간에 다른 사람은 없다.
16절 이하: 왜 죄를 짓지 않아야 하는가를 설명
도덕적 결정은 여전히 중요하다. 죄에 굴복하면 사람은 점점 더 고분고분한 죄의 종이 된다. 어릴 적부터 사슬에 매인 노예 코끼리는 커서도 그 습성을 버리지 못한다.
...사망에 이르고: 이는 진정한 신자들도 실제로 자신의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죄가 신자들을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을 온전히 누리는 데서 멀어지는 그런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는 뜻이다(갈 5:4). 죄짓는 일에 몸을 맡기는 자들은 죽을 것(영원한 형벌에 직면할 것)이다.
6장 후반부가 전반부의 확장 내지 반복이라고 보는 이유가 여기 있다.
답변은 간단하다!-우리는 죄의 종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는데, 다시 죄를 지으면 죄의 종이 될 수 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죄의 열매-사망
바울은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의 종이 되든지, 하나님을 위하는 의의 종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뿐, 중립은 있을 수 없다고 단언.
단순하게는, 예속과 자유 사이의 선택의 문제이지만,
그것은 결국 누구의 지배를 받게 되는 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아무도 섬기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산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속고 있는 것이다.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삶은 전형적인 죄의 종으로서의 삶이다.
첫째, 신자는 사망을 가져오는 죄의 종이 되든지, 의를 가져오는 순종의 종이 되든지 둘 중 하나에 속할 수밖에 없다(15-16절).
둘째, 신자는 본래 죄의 종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죄에게서 해방시켜 의의 종이 되게 하셨기 때문에, 신자는 이제 자기의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러야 한다(17-19절).
셋째, 신자가 과거에 죄의 종이었을 때 그 결과가 사망이었던 점을 상기시키면서, 다시 죄의 종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20-21절).
넷째, 신자는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종이 되었으므로 이제 거룩한 열매를 맺고 영생을 소유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22-23절).
죄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삶
은혜와 죄는 서로 양립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죄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에서 죄의 영역으로 옮기는 것이요, 죄의 영역으로 옮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다시 죄의 지배를 받는 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죄의 종이냐 하나님의 종이냐- 인간은 결코 동시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마 6:24). 죄를 짓는다는 것은 은혜의 영역으로 옮겨주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행위이다.
죄를 선택? 죄의 종, 결과는 사망,
하나님을 선택? 의의 종, 결과는 의와 영생
회심은 자기 포기의 행위이다. 자기 포기는 불가피하게 종노릇으로 이끈다. 회심은 하나의 종노릇에서 다른 종노릇으로 바뀌는 것을 포함한다(17-18절).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었다”(17절)
1976년 애플을 창업하고 10년 동안 쫓겨났다가 1997년 다시 복귀해 애플 신화를 일궈낸 사람은 바로 스피브 잡스이다. 그는 2005년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죽음은 새로운 것들을 위해 길을 만들고 오래된 것들을 치우는 것과 같다. 머지않아 어느 날 여러분도 오래된 것이 되어 정리될 것이다. 너무 극적인 표현이라 미안하지만 사실이다.”
잡스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한다고 했다.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오늘 내가 하려는 일을 진정하고 싶은가?”
17세 때
“매일 매일 당신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라”
는 글을 본 후부터 자신에게 질문해 온 그는
“사람들에게 유능한 잡스로 알려지기 보다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된 잡스로 기억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대단한 잡스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인간을 두 가지의 부류로 구분한다고 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면, 모두가 죄의 종이라는 사실이다.
“의에게 종이 되었다”(18절) -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의미.
바울은 (죄에게서의) ‘해방’과 (의에게)‘종이 되었다’는 두 동사를 행동의 주체가 하나님임을 뜻하는 신적 수동태 동사를 사용하여, 이 일을 이루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그들을 죄에게서 해방시키시고 그들을 적극적으로 의를 섬기는 자들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해방)와 의는 하나님을 섬길 때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비유처럼,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오히려 죄의 종이 되는 것이며, 반면에 아버지 되신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와서 그분과 더불어 창조주-피조물, 아버지-아들로서의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길이다.
19절: 신분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들의 삶도 당연히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템플턴상은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알려져 있다. 이 상을 받은 사람 중에 찰스 콘슨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닉슨 대통령 시절 워터케이트 사건 워터게이트사건[ Watergate Affair, ─事件 ]
1972년 6월 대통령 R.M.닉슨의 재선을 획책하는 비밀공작반이 워싱턴의 워터게이트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침입하여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체포된 미국의 정치적 사건.
이 사건으로 인하여 닉슨정권의 선거방해, 정치헌금의 부정·수뢰·탈세 등이 드러났으며 1974년 닉슨은 대통령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당초 닉슨은 도청사건과 백악관과의 관계를 부인하였으나 진상이 규명됨에 따라 대통령보좌관 등이 관계하고 있었음이 밝혀졌고, 대통령 자신도 무마공작에 나섰던 사실이 폭로되어 국민 사이에 불신의 여론이 높아져 갔다. 1974년 8월 하원 사법위원회에서 대통령탄핵결의가 가결됨에 따라 닉슨은 대통령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임기 도중 대통령이 사임한 것은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으며, 미국 역사에 오점을 남기는 사건이기는 하였으나, 의회와 최고재판소가 그 직책을 완수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전통은 수호되었다. 그리고 닉슨 사임 후에도 그의 형사책임을 추궁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남아 있었으나 대통령 G.포드가 9월 8일 닉슨의 재임기간 중의 모든 죄에 대하여 특사를 발표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워터게이트사건 [Watergate Affair, ─事件] (두산백과)
으로 감옥에 갔다. 콜슨을 전도하고자 기도하는 사람들 중에 변호사 퀴에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에 기도하다가 ‘내가 저 사람 대신 옥살이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법전을 뒤져보다가 특별법에 죄수 대신에 감옥에 갈 수 있다는 조항을 발견해 내고는 신청을 했다. 콜슨의 형기가 7개월 정도 남았을 때였는데, 그의 신청은 기각되고 말았다. 콜슨은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퀴에의 사랑에 감동이 되어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었다. 주님을 만난 후 자신을 위해 기도해준 사람들의 사랑을 어떻게 갚을까 고민을 하다가 감옥에 있는 죄수들의 더러운 옷을 세탁해 주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동료 죄수들조차 비웃었다. 하지만 진심을 알게 되자 콜슨과 함께 기도하는 모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자서전에서,
“내 평생 집안에서 궂은 일을 하지 않았던 내가 죄수들을 사랑하면서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발견했다.”
그리고 일평생 죄수들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하고 교도소 선교회를 조직했다.
20-21절: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신분과 삶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예수를 믿기 전에 어떠한 신분이었든지 간에 영적으로 모두가 죄의 종이라는 사실이다. 그 결과는 사망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라는 것.
22-23절: 그렇게 함으로써, 곧 지금 그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신분과 그 신분에 합당한 새로운 삶에 대한 교훈을 더 강하게 부각시킨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었다”-신분 변화, 삶의 영역, 삶의 주관자가 바뀜.
3:21의 “그러나 이제는”처럼 단순한 한 개인의 실존적 전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고후 5:17의 ‘누구든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이제는 새것이 되었도다’라는 선언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그의 실존과 삶의 전 영역을 포함하는 세계사적인 전환과 종말론적인 전환을 가리킨다.
23절은 좁게는 6:15-22절의 내용을, 넓게는 6장에서 계속해서 말해 온 죄와 은혜, 사망과 생명의 주제에 대한 결론이다.
23절, 삯: 죄에 대한 형벌이 그 사람의 자업자득이자 그가 마땅히 받을 몫임을 뜻한다.
은사: 마땅히 받을 것과는 정반대이며, 이는 오직 은혜(하나님의 과분한 은총)로 말미암고 오직 믿음으로 인한 칭의에 대한 바울의 이전의 강조점과 잘 들어맞는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용어의 의미는? 우리 자신의 거룩한 삶이 공로가 되어 우리가 영생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을 유지할 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은혜로 우리에게 종말론적인 영생을 주시는 것이다.
칭기즈칸은 황제가 된 후에 자신과 생사를 함께 한 사람들에게 ‘타르 탄’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여섯 가지 특권을 허락했다. 타르 탄은 칭기즈칸과 함께 고난을 나누었기 때문에 그와 함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고난을 나눈 사람들만이 영광을 같이 나눌 수 있다. 그 여섯 가지 특권은 다음과 같다.
첫째, 언제든지 누구의 허락 없이도 나를 만날 수 있다.
둘째, 전쟁이 끝나면 전리품 중에 가지고 싶은 물건을 먼저 골라 가질 수 있다.
셋째, 평생 어떤 세금에서도 면제된다.
넷째,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지어도 아홉 번까지 용서받을 수 있다.
다섯째, 이 나라 안에서는 살고 싶은 땅을 언제든지 골라 가질 수 있다.
여섯째, 이러한 권리는 앞으로 4대까지 이어줄 수 있다.
칭기즈칸은 타르 탄들에게 이러한 특권을 보장해주었다. 단 한번 칸을 잘 섬기고 동역함으로 그런 특권을 보장받았다. 4대까지.
하지만 우리가 받은 복음은 복음이 우리 안에 있다고 해서, 죄를 지으면 무조건 면제해주는, 징기스칸의 타르 탄과 같이 4대까지 9번의 중차대한, 사형에 해당하는 죄에 대해 면책을 가해주는 방종을 조장하진 않는다.
바울의 복음은 방종을 조장하는 값싼 은혜의 복음이 아니다. 급진적 거룩함을 요구하는 은혜의 복음이다. 거룩함이란?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말한다. 13절에서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다. 지체를 죄에게 내주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곁에 가까이 머물러야 한다. ‘드리다’는 말에는 ‘가까이 두다’라는 뜻이 있다.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은 반드시 행하려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언제나 하나님 가까기에 두어야 한다. 아무리 바쁘고 피곤하고 힘들어도 좋아하는 일을 위해선 항상 시간을 낼 수 있다. 하나님께 헌신하려는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 곁에 머무른다.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우리는 다시 살아난 자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시간, 재능, 기회의 사용기회을 죄에게 내어줄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권을 드리고 기회가 없을지라도 만들어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종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를 기억하라!
1972년 5월 28일, 왕위에서 쫓겨난 에드워드 8세 즉 윈저공이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날 저녁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그의 삶에 일어난 주요사건들을 다루었다. 이전에 찍은 필름에서 발췌한 화면들을 방영해주었는데, 거기에는 그는 자신의 유년기, 짧은 통치기, 그리고 왕위에서 물러난 사건에 대한 질문들에 답하고 있었다. 웨일즈의 왕자였던 소년기를 회상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아버지 조지 5세는 굉장히 엄한 규율가였다. 때때로 내가 무슨 잘못을 하면, 그분은 이렇게 말하면서 나를 타이르곤 했다.
‘얘야, 너는 언제나 내가 누구인지를 기억해야 한다.’
필자가 확신하기로는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도 날마다 우리에게 같은 말을 하신다.
,.
“얘야, 너는 언제나 네가 누구인지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누리려면 예수님 안에 계속 머무르면 된다. 의의 종노릇을 하기 위해선 예수님 안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
요한복음 15:1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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