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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로마서

로마서 강해⑮ 6장1-5절, 그리스도와의 연합 - 세례

by Message.K 2021.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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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로부터의 해방


1-2절: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종종 ‘탕자의 비유’를 잘 알고 있다. 거기서 탕자가 아버지의 전적인 사랑과 은혜로 용서받고 용납받고 이해받는다. 허랑방탕한 삶에 대한 철저한 회개가 있었다. 

 

‘나는 쥐엄열매도 먹을 만한 존재가 못되는구나!’


  그리고서, 내 아버지의 집에는 먹을 것이 이것보다 낫겠구나!, 차라리 아버지의 집에서 종으로 써 달라고 하자. 그런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컴백홈’했다. 일단 탕자는 엄청난 선물을 받아 행복해졌다. 그런데, 이를 본 첫째 아들의 반응은 굉장히 시크하다.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거덜내고 돌아왔는데, 엄청난 환대와 환영잔치를 치르고, 자신은 늘 아버지 집에서 순종하면서 제대로 된 바른 생활의 범생으로 사는데, 왜 한번도 잔치 같은 것은 없고 일만 하는 삶을 사느냐? 


여러 가지 답변과 대답이 나오겠지만, 중요한 것은 첫째 아들이 아버지를 잘 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은 큰 아들에게도, 작은 아들에게도 동일하다. 아버지의 것이 아들의 것인데, 첫째 아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롬 5:20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말씀은 누구에게 적용되는 말씀인가? 바로 둘째 아들이다. 둘째 아들의 죄가 컸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더욱 풍성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첫째 아들과 비슷한 사람들, 아니면 한 번도 죄를 고의적으로 짓거나 큰 방황이나 방탕함을 경험하지 않은 겉으로 범생처럼 보이는 율법주의자들이 논리학적으로 바울에게 질문하는 것이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더 지어야겠느냐?”

 


  여러분, 은혜를 더 깊이 알기 위해 죄를 더 지어야 할까요? 

지금 내가 너무 평범하고 죄도 안 짓고 범생으로 살아오니깐 하나님의 은혜가 잘 안 느껴져. 그래서 안 먹던 술도 흥청망청 마셔보고, 유흥가에서 허랑방탕하게 살아보고, 거짓말과 사기도 좀 쳐보고, 사람도 좀 때려보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잘 알 수 있을까요? 정말 그렇게 해보고 싶은 마음이 꿀떡같은 사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정말 일평생 후회하겠다 싶은 사람은 한 번 해보시라. 하지만 죄를 짓는 데는 돈이 많이 든다. 그래서 죄는 죄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평범하고 바르고 정직하게 살면, 돈이 그래도 덜 들텐데, 욕심이 꽃을 피우면 돈다발이 필요한 것이 세상이다. 그래서, 돈이면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이 된 지도 모른다. 바울은 이러한 1절의 질문에 대해서 2절에 대답한다. 

 


 
2절/ 그럴 수 없다. 

우린 죄에 대해 죽은 존재가 아니냐?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강한 부정을 사용! 왜 그렇게 말하는가?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죄의 종이었다. 종이 하라면 해야 한다. 군대 가면 제일 기분 나쁜 게 나이도 나보다 새파랗게 어린 조교가 나한테 반말을 꼬박꼬박하면서 명령할 때, ‘내가 네 종이가?’
  

 

 

강도사시절에 수석부목사님이 나한테 유인물을 주면서 복사 좀 해오라고 시켰다. 난 한 번도 그런 심부름을 받아본 적이 없는 명품(?) 전도사였다. 왜냐하면 그때 제가 사역할 때 외삼촌이 담임하시는 교회였기에, 나는 거의 모든 것에 열외였다.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있던 내게 복사같은 일을 시키니, 순간 울컥했다. ‘내가 신학대학원까지 나왔는데, 이런 헛드레일을 해야 한단 말인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참 또라이 같았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분, 여러분이 직장생활하거나 캠퍼스생활할 때, 심지어 집에서 부모님이 심부름시킬 때, 내가 종이냐? 이러면서 대들고 그러면 여러분은 앞으로 정말 힘들게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제가 그랬다. 남의 밑에 있어봐야 밑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지 않는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신성을 지니셨지만, 그래도 인성을 지니신 분이시기에 세상의 모든 상처받고 아프고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 어디서 태어나셨는가? 마굿간의 구유에서 태어나시지 않았는가! 구유가 아니면 더 나은 양동이나 큰 대야가 있을 수도 있는데, 하필이면 그곳에서 사람들이 워낙 많은 예루살렘지역이었고, 숙소도 만원이었기에 예수님이 태어나실 장소가 그렇게 된 것이다.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친히 섬기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도 우릴 섬기기 위해 오셨는데, 우리가 그것정도야  못 섬기겠는가? 여러분이 20대에, 30대에 많이 섬겨놓으면 그 섬긴 것이 나중에 40대, 50대가 되었을 때 다 복으로 받는다. 희한한데, 그것은 진리이다. 

 

 

 


  우리는 원래 죄의 종, 사탄의 하수인, 죄의 노예였다. 그런데, 이제는 죄 가운데 거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왜? ‘우리는 이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이기 때문이다. 
-신자의 주인은 이제 자신이 아니라, 죄가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이시기에 죄에 빠져 살 순 없다. 

 

 


천하의 다윗도 범죄하였다. 자신의 충성스런 용병,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불륜을 저질렀다. 다들 전쟁에 나갔는데, 유독 다윗만 빠진 상태에 낮잠을 잔 후 밤에 일어나 우연찮게 눈에 들어온 여인! 바로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였다! 우리야는 출신이 힛타이트였다. 이방인이었지만, 그가 얼마나 용맹스러웠고, 신앙적인 부분에서 기개가 있었는지, 밧세바의 할아버지 아히도벨(다윗의 모사였다)은 우리야와 밧세바의 결혼을 도왔는지도 모른다. 우리야는 전쟁중이라고 해서 자신의 집에 가서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는 특권을 왕으로부터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휴가를 반납하고 오히려 부하들과 같이 집단숙식을 하는 기개를 보여주었다. 다윗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밧세바의 불러오는 배를 보면서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자신의 완전범죄를 숨길 마지막 히든카드로 우리야 죽이기 작전에 돌입한다. 결국 우리야는 죽는다. 그리고서 완전범죄를 마침표로 혼외정사와 혼전정사의 주인공, 임신한 밧세바와 결혼하게 된다. 결혼하면 다윗의 범죄가 덮일 줄 알았다.

 

 



  여러분, 다윗은 죄악이 너무나 달콤하게 다가왔다. 밧세바에게 얼마나 강렬하게 꽂혔던지, 밧세바를 만난 그 즈음에는 밧세바가 생리중이라 더 기다렸다가 그녀와 잠자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밧세바의 월경기간동안 기다리면서 충분히 자신이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지,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자신을 돌아볼수도 있었을텐데. 다윗에겐 그런 돌아봄은 없었다. 죄짓는 것에 있어서 이처럼 주도면밀한 다윗! 사람이 죄를 짓고자 하면 주도면밀해지게 된다. 왕이라면 당시 일부다처제였고, 수많은 아가씨들이 줄을 서 있는데, 왜 하필이면 가장 충성스런 부하의 아내란 말인가? 송승헌이 주연한 <인간중독>처럼 그렇게 스토리가 전개된 것이다. 송승헌이랑 나랑 2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나는 이게 뭐야? ㅋ

 

 



  다윗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더 겸손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참 특별하다. 다윗이 결혼한 여인 중에 저는 아비가일이 참 마음에 든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의 아들 중에서 바로 이 불륜으로 낳은 아들, 솔로몬에게 대권을 물려주는 것이다. 물론 밧세바의 할아버지가 아히도벨(당대 최고의 모략가. 제갈공명과 같은 지략가)이었으니 밧세바의 피에는 아마도 지혜가 넘치진 않겠는가 마는. 정말 다윗을 보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했음을 알 수 있다. 바울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예수믿는 신자를 색출하며 죽이는 유대인의 전령사였다. 하지만 그는 회심하여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 

 

 



  여러분, 여러분도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했다는 것을 몸소 실천해보고 싶은가? 여러분, 우리가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죄는 우리를 망가지게 한다. 신학교 4년에 다시 군대에서 학교에 복학했을 때 사촌형님이 제 후배로 학교에 입학을 한 것이다. 그러면서, 형의 얼굴을 보니 피부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서 형에게 물었다. 


“형, 얼굴의 피부가 왜 그렇냐?”
“아...그거...나쁜 짓을 많이 해서 그렇지. 죄를 많이 지어서 그렇다.”

  우스갯소리로 그런 이야기를 했다. 여러분, 죄를 지으면 죄값을 치루어야 한다. 죄를 지으면 그냥 컴퓨터의 삭제버튼 하나 누르면 지워지는 게 아니다. 그 죄를 지음으로 인해 파생된 다른 사람들, 그리고 당사자의 마음이 굉장히 고통스러운 것임을 알아야 한다. 



시편 51편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
   

 


  다윗은 자신의 죄값을 불륜으로 낳은 아이가 죽는 고통을 경험해야 했다. 자식이 아버지보다 먼저 가는 경우만큼 아비의 가슴에 못 박는 것은 없다. 자신의 많은 아내들이 낳은 자녀들 간의 권력쟁탈과 갈등은 불가피했다. 다말을 짝사랑한 암논 오빠, 하지만 배다른 여동생을 범하고 난 후 오히려 이전의 사랑이 미움으로 변해버린 암논을 보면서(삼하 13:15) 암논의 사랑은 욕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남자가 여자를 책임질 일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게 아닌가! 하지만 요즘 시대는 오히려 서로 서로 책임을 좀 회피하는 분위기 아닌가! 그 당시만 해도 암논이 다말을 책임졌으면 자연스럽게 묻히는 일인데, 이 노무 새끼가 정상을 정복해놓고는 오히려 도망쳐버리는 형국이었다. 암논이 그런 사악한 짓을 한 것을  목격한, 친오빠 압살롬은 2년 동안 게놈 프로젝트가 아니라, 암논 살인계획을 준비한다(삼하 13:20, 13:32).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죽이기 위한 프로젝트를 짜는 다윗보다 오히려 더 치밀한 압살롬이었다. 아버지의 죄질은 아들에게 이렇게 대물림되었다. 2년동안 준비하는 치밀함! 자신의 사랑하는 여동생을 범하고 버린 파렴치한 왕자를 그만 둘 순 없는 것이다.

 

 

영화 <용서는 없다!>의 오리지날은 구약성경에 이미 개봉(?)되었던 것이다!

 

 

그리고서 암논과 함께 왕자들이 사냥대회를 갔을 때 그 날이 바로 D.DAY가 된 것이다. 암논만 죽었다. 압살롬은 이 일로 인해 왕궁으로 돌아올 수가 없어 자신의 어머니의 민족의 땅에 가서 죽어지냈다. 다윗의 마음이 사랑하는 아들에게 가 있는 것을 알고는 신하가 압살롬을 이제 데려와도 되지 않겠느냐고 권면한다. 다윗은 압살롬을 궁으로 불러들인다. 마음속에 암논을 살해한 압살롬의 마음, 죄책감, 아버지에 대한 송구한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천하의 성군 다윗도 어쩔 수 없이 연약한 인간이었다. 압살롬을 궁에서 개인적으로 만나든지 해서 마음을 풀어주고 관계를 회복했어야 했다. 하지만, 다윗은 바빴는지, 아니면 마음이 가지 않았는지 압살롬과의 관계의 분명한 정리를 하지 않는다. 궁으로 돌아오라 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예전처럼 냉전이다. 이것은 다윗은 큰 실수였다.

 

 

 

후에 자신의 가장 사랑하고 총애하는 명품아들, 테리우스의 머리칼을 연상케하는 압살롬이 정권을 모반하는 쿠데타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거기다가 자신의 후궁들을 아들 압살롬이 대낮에 욕보이는 사건까지. 또 다시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자신보다 먼저 죽는 고통을 경험해야 했다. 
 


 죄는 죄를 낳고, 죄의 삯은 사망이고, 죄는 반드시 댓가를 지불해야하는 고통이 뒤따른다. 우리는 죄의 종이 아니다. 우리의 주인은 바뀌었다. 

 

 

 



  사랑하는 대학. 청년회 여러분,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죄에 더 이상 연연해하지 않는 신분이 되었다. 왜 그런가? 우리에게 무슨 능력이 있는가?

 

 

 



3-5절: 세례를 통한 그리스도와 연합


  바울은 그 대답을 세례에서 찾고 있다. 세례는 일종의 장례식이다(골 2:12). 

세례: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은 동시에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의 연합이다. 


 세례요한이 준 물세례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면서 홍해를 건넜다.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그 경험을 세례에 비유한 것이다. 세례는 또한 죄에서 해방된 것을 의미하는 영적 출애굽이기도 하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까지는 연결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례’는, 곧 그분의 죽음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 사람들은 기독교 세례를 받으면서 메시야와 함께 죽었다가 메시야와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나라의 장로교 세례방식은 물을 그냥 찍어 바르는 차원이지만, 침례는 다르다. 침례는 말 그대로 사람이 숨을 못 쉴 정도로 오랫동안 물속에 있다가 다시 일어난다. 물속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이고, 물에서 다시 나와서 숨을 쉬는 것은 부활을 의미한다. 정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세례의 영적인 의미이다.

 

 


 
  세례는 성령을 통해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연합하게 되는 것이다. 세례자체에 마법적인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성령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기 때문이다. 추상적 연합이 아닌, 성령을 통한 신비적이고 실제적인 연합이다. 세례를 받지 않은 분들은 빨리 받으시길 바란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에도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고 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이렇게 분부하신 것 중에 바로 ‘세례’가 있다. 바로 세례의 이러한 놀라운 영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죄에서 자유롭게 되는 유일한 길은 죽음을 수용하는 것이다. 죽음은 모든 부채를 청산한다.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죄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실제로 죽었다. 우리 자신이 직접 죽은 것은 아니지만,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한 것이다. 그 의식이 바로 세례인 것이다. 

 

 

 

 
5절: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완료시제!


이 완료시제는 과거에 발생한 사건의 결과가 현재까지 지속되는 상태를 나타낸다. 믿는 자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한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믿는 자는 처음 믿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여전히 십자가에 못박힌 상태로 있어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상태로 계속 유지하는 것은, 고난이다. 우리의 죽을 몸은 연약하기 때문에, 고난인 것이다.



사도바울의 갈 2:20의 고백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신자의 새로운 삶은 여기서 출발: 자신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한 자로 인식해야 한다.

 


   마르틴 루터는 유혹과 시험을 받았을 때, “나는 세례를 받았다!”라고 외치곤 했다. 새로운 신분의 궁극적인 기초였다. 

 

 

 

 


  사랑하는 대학부. 청년회 여러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은 자들이다.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생명을 소유한 자들임을 기억하라!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이여,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경주로 성화의 삶을 살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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