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이었다. 음식물쓰레기통을 20L짜릴 18,000원 주고 샀다. 동사무서에서 줄때는 5리터짜리였는데, 음식물이 한번씩 밀리면 너무 양이 많아서 처치가 곤란해서 큰 맘 먹고 장만했다.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음식물쓰레기통 큰 거도 역시 큰 게 좋아. 근데 아무리 음식물쓰레기통이라도 새거니깐 처음에 살 땐 애들이랑 같이 마트에서 사서 집으로 걸어오는데 그 안에 애들 소풍갈 때 먹는 간식이랑 기타 소품들을 다 넣어왔다. 음식물쓰레기통인데. 하지만, 아직 음식물을 담지 않았지 않는가! 새거니깐. 하지만 그 음식물쓰레기통은 이제 음식물을 계속 담다 보면 음식물쓰레기통에 걸맞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처음이라 20리터의 음식물쓰레기를 밖에다 내놓고 비우고서 집에 와서 새거니깐 다시 깨끗하게 씻으니깐 또 새것처럼 되었다.
여러분, 음식물쓰레기통도 깨끗하게 치우면 깨끗해진다.
그 통이 음식물쓰레기통인가 싶을정도이다. 하지만 치우지 않으면 우리집 5리터 음식물쓰레기통은 말도 못한다. 버리고 싶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불러주셨다. 그러면 의로운 그릇으로 잘 준비되어져가야하고 과거에 의로워졌으면 현재도 의로운 것이고, 미래도 의로울 것이다. 우리가 미래에도 의롭기 위해선 현재 의로운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구원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세 가지 시제로 표현할 수 있는 포괄적인 것이다.
과거-나는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현재-지금 구원받아가고 있습니다.
미래-장차 구원받을 것입니다.
즉 우리는 과거에 이미 구원을 받았고, 현재 구원을 받아가고 있으며, 미래에 구원을 받을 것이다.
칭의 1-4장: 과거적 의미로 사용된 구원의 의미
성화 5-8장: 현재적 의미로 사용된 구원의 의미
영화 12-16장: 미래적 의미로 사용된 구원의 의미
5-8장까지는 영화에 대한 확신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말은 1-4장에서 이야기한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장차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그것은 바로 영화롭게 우리가 변화되어질 것이란 점이다.
A 5장 영화에 대한 확신
B 6장 구원의 확신의 장애물인 죄를 다룸
B 7장 구원의 확신의 장애물인 율법을 다룸
A 8장 영화에 대한 확신
5,8 장은 영화에 대한 확신을 다루고 있다. 영화에 대한 확신 1-11절이고, 12-21절은 영화에 대한 확신의 근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다루고 있다.
오늘 본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을 종말에 반드시 영화롭게 될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보여 준다. 여기에 ‘소망’(미래)이란 단어가 영화와 연관이 있다.
1-2절: 칭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보여준다
3-4절: 현재의 고난도 미래의 소망을 더욱 강하게 한다
5-8절: 하나님의 사랑이 소망의 근거이다.
9-11절: 현재적 지위와 미래의 심판 때의 운명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신칭의의 결과(1-2절)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영적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많은 복을 받는다.
첫 번째 복은 하나님과의 평화이다(1절).
인류는 원래 하나님의 모든 좋은 것을 물려받았고 이 세상을 정복하는 자로 세움을 입었다. 하지만 죄를 지음을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버렸다. 한없이 의로우시고 최고로 선하신 하나님에게 죄는 적대적이다. 우리 인간들은 죄를 하도 많이 지어서 죄에 대해 굉장히 익숙하다. 욕도 적당히 하고, 뇌물도 적당히 주고받고, 컨닝도 애들 하는 것처럼 같이 좀 해주고, 적당한 거짓말로 사람들의 비위도 맞춰주고, 그리스도인도 사람인데 라고 하면서 술자리에서 술도 좀 마셔주고, 적당히 분위기도 띄워주고, 열 받으면 담배도 피워보고, 이성친구와도 스스럼없이 영화처럼 해보기도 하고!
예전에 우리가 데이트할때만 해도 ‘자기야’란 단어는 부부관계에 한정되어 사용되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부터 결혼안의 부부관계를 넘어 애인이면 다들 자기야란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것은 문화이다. 하지만 문화가 결코 중립적이지 않음을 기억하라. 개그콘서트 보고 있으면 애들이 재미있다고 웃는다. 20-30대를 겨냥한 짙은 농담들이 이제 자라나는 애들에겐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섹시는 이제 대중의 선호코드이다.
근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모든 문화와 생각과 가치관과 사고방식과 습관과 코드가 하나님과 적대적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 죄 때문에 그런 것이다. 죄가 사람들의 모든 구조, 인류 전체, 자연까지도 오염시키고 병들게 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대충 대충하는 적당주의와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정의로우시고,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과 죄성을 공유할 수 없는 것이다. 물과 기름보다 더 적대적인 관계! 요즘 영화를 보면 서로 얽히고 설킨 관계를 화해하고, 달래고, 어르는 그런 구도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서로 조금 상처받고, 힘들고, 아프게 하면 즉결처분하는 것을 좋아한다. 관객들은 그런 액션을 즐긴다. 참는 것은 절대 미덕이 아니다. 방아쇠를 당겨야 하고 칼을 휘둘러야 한다. 욕도 거침없이 해야 속이 시원하다. 영화 ‘테이큰’이나 한국판 ‘테이큰’인 원빈 주연의 ‘아저씨’ 같이 시원시원하게 사람을 죽이고 심판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테이큰의 리암니슨처럼 자기 딸을 해코지 한 사람들은 무조건 죽여 버려야 한다는 주의가 팽배해있다. 딸을 해코지한 것이지 딸을 죽인 것은 아닌데, 아빠가 화나부러! 겁나부러! 영화는 공공연히 폭력을 조장하면서도 폭력을 정당화한다. 내 딸 손대지 마!
영화 ‘용서는 없다’는 정말 용서가 없다는 식으로 결말을 내버린다. 고위층의 자녀들이 한 여자를 두고 집단강간사건을 벌인다. 그 친구들에게 그게 장난같은 사건이었다. 근데 범인이 명백한대도, 그 사건의 부검의인 강민호(설경구)에게 권력의 힘에 의한 외압이 들어오면서 유혹을 하게 된다. 자신의 딸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 강민호는 법정에서 사실이 아닌 위증을 하게 된다. 하지만 위증으로 인해 사건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부검의의 위증으로 인해 한 여인의 인생은 창녀로 낙인 찍혀버린다. 누나가 창녀로 낙인찍힌 것에 대한 용서치 못하는 마음이 환경운동가인 이성호(류승범)의 인생을 분노케 만든다. 영화는 결국 이유가 어찌됐든, 강민호의 위증, 죄로 인해 이성호의 누나의 인생이 파괴되고, 그로 인해 이성호의 인생도 파괴된다. 파괴된 이성호의 인생은 결국 원인제공자였던 강민호의 딸과 강민호의 인생도 파괴시키게 된다. 딸을 위해서 시작한 위증이라는 죄가 딸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딸의 생명을 앗아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정말 용서가 없는 심판이 어떤 것임을 너무나 잔인하고도 잔혹하게 영화는 보여준다.
죄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적대적으로 만들어버린다. 카인과 아벨은 형제였다. 하지만 둘 사이에 시기심과 질투라는 죄가 들어서자, 둘은 원수가 되어버린다. 아벨은 아니더라도, 카인에게 아벨은 원수같은 존재였기에 결국 자신이 심판을 내려버리는 것이다. 아벨은 피해자이고, 카인은 가해자이다. 맘속에 싹튼 시기와 질투가 결국은 살인을, 인류 최초의 살인을 가져오게 된다.
여러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적대적인 원수 관계였음을 기억하라. 피해자는 하나님이고, 가해자는 인간이다. 하나님의 가슴을 완전히 찢어놓은 인간의 죄악에 대해 하나님은 용서할 수 없는 분노를 느끼셨다.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배신감까지 느끼셨다. 정말 꼴도 보기 싫은 죄악이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인간이 죄로 얼룩져 음식물쓰레기보다 더 더럽고 처참한 꼴이 된 것이다. 1장에 보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반역과 죄에 대해 잘 나와 있다.
21절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그 생각이 허망하여져서 미련한 마음이 어두어졌나니
28절에는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3장에서는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적대적인 관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설경구와 류승범의 관계! 하나님과 인간이 그런 관계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화해의 손길을 내미신 것이다.
5장 1절에 뭐라고 하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이방인, 유대인 할 것 없는 모든 민족,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이제 하나님과의 적대적인 관계가 청산되고 하나님과 평화를 맺게 된 사람은 자연히 마음속에 하나님이 주신 평화를 누리게 된다. 이신칭의의 교리는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과 평화를 맺게 되었는지 명백하게 가르쳐 준다. 벌레보다 못한 나, 라고 종종 표현한다. 여름철에 파리를 보면 파리채나 손바닥을 한번 내리치면 내장까지 다 터져 나오는 것이 바로 벌레이다. 그 벌레보다 못한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 그것이 바로 평화이다. 그 평화의 주체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고 했듯이 예수님이시다.
여러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시길 바란다. 그것은 여러분의 노력과 공로와 업적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보혈로써 가능한 것이다. 화평을 누리자는 말에는 당당함이 배여있다. 죄를 지었으니 적당하게 부끄러워하고 적당하게 수치감을 느끼면서 위축된 자아상을 가지고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않던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면, 그 이후에도 계속 아버지와 껄끄럽고 부담스럽고 얼굴 마주치고 대화하기도 힘들어한다면 그 관계는 회복된 것이 아니다. 정말 회복되었다면 ,아버지와 화평을 누려야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하나님과 적대적인 관계에 여러분이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가? 나는 언제나 하나님의 응달, 은혜의 음지에서 늘 주변인으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없는가? 예수님의 보혈로 나아오라! 은혜의 양지로 나아오라!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신감 넘치게 나아갈 수 있는가? 염치도 없이? 그 이야기를 2절에서 바울은 하고 있다.
이신칭의의 두 번째 결과는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는 것’이다. 은혜 안에 서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뜻이다. 은혜 아래 있는 자만, 하나님의 자녀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은혜는 무조건적인 것이다. 은혜가 무슨 조건이나 토를 달면 은혜가 아니다. 교회 나오는데, 현찰 1,000만원을 가지고 오라든가, 학교성적 평점 4.0을 넘어야 한다든가-한 학기 넘고 다음학기 평점이 떨어지면 교회 6개월 쉬어야 하고-, 여자친구 없는 사람은 1:20시엔 출입금지, 2시 넘어서 출입가능. 이렇게 교회가 물관리한다면, 조건부를 단다면 그게 교회가 아니지 않는가!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가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라.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린 결과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 은혜의 자리에 율법과 할례와 기타 많은 조항들을 장애물로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세상의 대통령도 예약이나 약속을 해도 만날 수 있을지, 웬만해선 힘들텐데 어떻게 하나님을 그렇게 쉽게 만날 생각을 하냐고 그러면서 율법과 할례가 사람들을 하나님께 못 나가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자! 우리가 하나님께 시도때도 없이 나아갈 수 있는 특권, 성도는 하나님을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며 나아갈 수 있는 자녀의 특권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이신칭의의 세 번째 결과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이다(2절). 이 세상에서 잠깐이었지만 하나님의 영광,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던 자들이 있다. 편지를 쓰는 바울, 죽기 전의 스데반, 변화산에서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었다. 잠시나마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였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잠깐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 오시면,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고 찬양하면 기대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 뵐때는 우리 자신들도 분명히 변화되어 있을 것이라는, 영화의 확신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릴 만난다고 주님이 우리수준을 거룩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수준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수준을 올라가는 것은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왜 우리의 죄성과 허물과 죄의 본질을 벗어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이 세 가지 복 외에도 성도가 받는 것은 바로 ‘고난’인 것이다. 고난이나 환난이 없으면 얼마나 편리하게 세상을 살 수 있을까? 하지만 성도는 그 고난이 있어야 인격이 변하고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3절부터 하고 있는데, 그 이야긴 다음 주에 같이 나누자!
“주의 보좌로 나아갈때에”
요한 웨슬레는 북미 대륙 선교지로 가는 도중에 배가 큰 풍랑을 만나게 된다.
그때 그는 이러다가 죽는 것은 아닌가? 하는 심각한 두려움과 불안을 느꼈다. 그런데, 그 때 그런 와중에서도 한 구석에선 그 폭풍우가운데서도 기도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모라비안교도들이었다. 웨슬레는 이때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다. 선교지로 가는 선교사의 믿음이 여기서 완전 박살이 난 것이다. 그때 요한 웨슬레는 자신의 믿음을 다시 한번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다.
칭의 1-4장: 과거적 의미로 사용된 구원의 의미
성화 5-8장: 현재적 의미로 사용된 구원의 의미
영화 12-16장: 미래적 의미로 사용된 구원의 의미
이신칭의의 결과(1-2절)
첫 번째 복은 하나님과의 평화이다(1절).
이신칭의의 두 번째 결과는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는 것’이다. 은혜 안에 서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신칭의의 세 번째 결과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이다(2절).
우리는 이 세 가지 복 외에도 성도가 받는 것은 바로 ‘고난’인 것이다. 고난이나 환난이 없으면 얼마나 편리하게 세상을 살 수 있을까? 하지만 성도는 그 고난이 있어야 인격이 변하고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3절부터 하고 있다.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칭의를 받는다. 말 그대로 우린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백으로 의롭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의롭게 된 우리의 신분이지만, 우리의 본질은 아직 죄의 자질들이 많이 남아 있다. 바울은 로마서 중반부에서 이것을 옛사람과 새사람의 성품이라고 말한다. 예수를 믿게 되었지만 아직 죄를 따르는 내 기질이 뿌리채 뽑히는 것이 아니다. 그 기질이 뿌리채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 바로 천국 들어갈 때일 것이다. 조직신학에선 그것을 영화라고 한다.
구원의 서정이란 것이 있다.
1) 소명 (부르심)
2) 중생 (거듭남)
3) 믿음
4) 회개 (회개+믿음=회심)
5) 칭의 (의롭다함)
6) 양자 (하나님의 자녀가 됨)
7) 성화 (바른 삶의 행동)
8) 견인 (최후까지 은혜 가운데 거함)
9) 영화 (부활의 몸을 받음)
구원의 서정에서도 있듯이 칭의 받았다고 해서 바로 천국으로 직행하는 것이 아니다. 성화, 견인, 영화의 단계를 거쳐야한다. 그 단계를 가는 과정 가운데 바로 환난을 경험케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성도는 더 적극적으로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어떻게 성도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단 말인가? 성도에게 있는 고통이나 고난은 성도의 믿음이 참 믿음인지 시험해주는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은 한다. 시련과 환난을 통해 머리로만 알고 있던 사람들, 입술로만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모두 넘어뜨린다.
칭의를 받았다면, 이제 환난 가운데 자신의 믿음을 테스트하는 것이다.
CCC총재 김준곤목사님은 2009년 2월 29일 하나님 품에 안기셨는데, 목사님은 사랑하는 많은 가족들의 죽음을 직접 목격했어요. 어머니와 사랑하는 사람, 세 분의 형님들이 차례로 급사해서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았고 6.25 때는 아버지와 가족들이 눈앞에서, 공산당 앞에서 죽는 모습을 보았고, 어린 시절 사랑하는 동생 둘이 사고로 죽는 모습을 보았고, 또 고등학교 교감까지 봉직하며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했던 착하디착한 동생이 딸, 네 명을 남겨 놓고 간암으로 죽는 고통을 겪었고 사랑하는 딸 신이가 157일 동안 위암으로 고통을 겪다가 두 딸을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나는 그러한 비극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슬픔과 고통,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그분이 이길 수 있었습니까? 이렇게 고백합니다.
“정직하게 고백하면 나는 하나의 얼굴로는 웃고, 다른 얼굴로는 운다. 내 영은 주님을 찬양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깊은 곳에서 샘물같이 환희가 솟는다. 그러나 다른 마음의 하늘에서는 비가 끊임없이 내리고 있다. 옆을 보면 정신착란증에 걸릴 것 같고, 위를 보면 현기증이 나고, 내 안을 들여다보면 죄와 추한 것들이 있고, 과거는 회한과 슬픔뿐이고 미래는 안개처럼 불확실하고 불안하다. 나는 주님만 바라봐야 한다. 과거는 아무리 더럽고 아프고 서러워도, 내일과 새해와 미래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페이지, 무한한 잠재적 가능성이 백지같이 열려있다. 시집가는 처녀처럼 새 날을 맞이하여, 새 집에서 새 살림 꾸려 새 삶을 살자. 한 발짝, 한 호흡, 주님을 사랑하며 창세기 첫날처럼 날마다 영원한 첫사랑으로 살자. 내게 깊은 위로와 감사와 찬송과 평안이 있다.”
예수님 안에서만 이와 같은 평안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70014에서 <김준곤목사 내용>발췌
환난은 우리의 믿음의 진위를 가려준다. 우리가 부딪히는 여러 가지 삶의 환난들이 여러분의 믿음을 체크해준다. 가정의 심각한 재정적인 위기가 있는가 하면, 부모님과의 트러블이 계속 있을 수도 있다. 형제 자매들 간의 깊은 골이 패인 문제로 인해 상심할 수도 있고, 학교에서나 직장에서 정말 해결할 수 없는 듯한 인간관계의 패닉상태에 빠져들게 될 수도 있다.
교회에선 믿음이 좋다고 하는 친구들이 세상에 나가면, 군대에 나가면, 캠퍼스의 첫 테이프를 끊으면,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다시금 한번 재조망하게 해준다.
내 믿음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믿음은 머리가 아니가 행동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환난을 만나서 넘어질 수 있고, 자빠질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환난은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하는 시금석이 된다. 남자는 군대 가서, 여자는 시집갈 때 믿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그가 자식이 없는 환난을 잘 통과했고, 후에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바치는 대목에까지 나아갔다. 환난은 인내를 만들어낸다. 환난은 인내를 낳는다.
환난을 만나면 우리는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서 겸손히 하나님만 바라보며 인내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 다음에, 인내는 연단을 낳는다. 연단(도키메)이란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시험을 통과하여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을 말한다. 즉, 인내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돕는 손길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경우이겠다. 환난 중에 억지로 이를 악물고 참는 정도의 인내가 아니라 환난 중에 즐거워하라고 한다.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소망을 더욱 촉진시켜 주기 때문이다.
영화 ‘신이 보낸 사람’을 보면 북한지하교회 교인들의 실상을 잘 알 수가 있다. 그들의 환난은 인내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그 인내는 연단을, 그리고 그 연단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된다. 그들은 두만강을 도하하여 한국으로 넘어가는 꿈을 소망하기도 하지만, “남조선이 천국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하지만, 더 원천적으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나라(천국)을 소망하게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환난은 인내를 만들어낸다. 이런 환난과 인내는 성도를 더욱 연단시켜준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연단하시기 때문이다. 환난을 통해 하나님이 성도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증명되고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함이 증명된다.
사람들은 누구나가 환난을 좋아할 리가 없다. 환난을 피하기 위해 모든 것을 취한다. 그러나 참된 성도는 환난을 즐거워한다. 왜? 환난 ->인내 ->소망
마지막으로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
5절: 이 소망이 우릴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새번역).
소망의 궁극적인 토대는 바로 로마서 5:5b-8에 의하면, 그 토대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미래에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극명하게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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