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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로마서

로마서강해⑬ 5장 6-11절, 우리의 구원의 근거는 십자가입니다

by Message.K 2021. 10. 19.




의인과 선인을 위해 죽는 자는 있다. 죄인을 위해 죽는 자는 없다.
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지난 과거의 세월호 침몰 사건에 얽힌 다양한 에피소드와 이야기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고 가슴 저미게 하였다. 그 이야기들 중 하나를 이야기하면, 단원고 2학년 여학생 양온유(17)란 애가 있다. 이 아이는 안산 명성교회 관리집사님의 큰 딸이고, 학교에선 2학년 반장에다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하는 음악치료사가 꿈인 아이였다. 재주가 많아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웠고, 중학교에 들어가선 새벽기도 반주를 했다. 넉넉지 못한 형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고 지난해 12월부터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왔다. 친구들이 학원에 가는 오후 7∼11시가 근무시간이었다.

 



  학년대표선거를 나가려고 했는데, 친구가 나간다는 말에 자신의 출마를 포기하는 애였다. 1학년 대표를 이미 했던 애였다. 이 아이는 갑판에 먼저 탈출을 했다고 한다. 거기서 구조를 기다리면 헬기에 의해 무사히 구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실에서 터져 나오는 친구들의 비명과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구명조끼도 입지 않은 채 다시 선실로 내려갔다고 한다. 

 



 온유의 빈소에는 1500명이 넘게 찾아왔다. 학교와 교회의 친구와 선후배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집안의 희망이던 큰딸을 잃었지만 부모는 오히려 조문객들을 위로하고 아직 자식을 찾지 못한 다른 실종자 가족들을 걱정했다.
  빈소를 찾은 한 친구는 “온유는 주변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비타민’ 같은 친구였다”고 말했다. 이웃 주민은 “제일 예쁜 친구가 살아 돌아오지 못했어. 온유는 얼굴도 마음도 다 예뻤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명성교회 김홍선 담임목사도 평소 신도들에게 “온유와 얘기하면 대학교수랑 얘기하는 느낌”이라며 “참 어른스러워 배우는 게 많다”고 말하곤 했다.

 

 



  지난 20일 열린 명성교회 부활절 예배는 눈물바다였다. 주보의 십일조 헌금자 명단에 온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편의점 알바로 번 돈을 쪼개 수학여행 떠나기 전 헌금한 사실이 이날 주보에 실린 것이다. 온유의 시신은 22일 발인 후 단원고와 교회를 거쳐 화장한 뒤 납골당에 안치됐다. 명성교회는 실종자와 희생자를 위해 매일 저녁 8시 기도회를 열고 있다. 

 

 


  양온유 같은 선한 아이가 친구들을 위해 죽을 수 있다. 죽어가는 친구들의 절규와 비명을 놔두고 혼자 살 수 없어 결국 같이 죽어간 것이다. 친구를 위해 정말 죽는 것은 값진 희생이다. 근데, 우리 예수님은 친구가 아닌, 사랑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인,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아는가? 그 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영화이다.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있는 미국군대에서 벌어진 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전쟁을 통하여 무수한 부상자들과 사망자들이 속출되는 가운데 우연히 이름이 같은-라이언-, 그러니깐 성이 같은 사람을 3명(브라이언 라이언, 죤 라이언, 폴 라이언 이런 식으로)이나 발견하게 된다. 모두 사망자 명단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용감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죽어간 병사들의 가족들에게 서신을 띄우는 그 과정에서 이 일이 발견되어 상부로 보고되어지게 되는데 알고 보니, 그 라이언이라는 성을 가진 3사람은 형제들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안, 상부의 장군은 놀라면서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가족의 형제는 4형제였는데, 3형제는 모두 죽고 오직 막내 라이언만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장군은 이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급히 그 막내 라이언 일병을 구하라고 특별 명령을 내리게 된다. 물론 이 와중에 다른 장군은 그러한 것에 대해 반기를 들면서,

 
'모든 생명은 중요한 것인데 굳이 다른 병사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그 라이언 일병을 구할 필요가 있는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라고 의아해했다. 

  그러자 그 상관은 그에게 예전에 남북전쟁 당시에 있었던 또 하나의 참상을 편지로 보여주는데, 거기에는 5형제가 고스란히 시체로 남아돌아가게 된 것에 대한 에이브라함 링컨의 안타까움과 가슴 아픈 사연을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내용의 편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 5형제의 어머니에게 보내졌던 편지였던 것이다.

 

 

 

영화 <라이언일병구하기>

 



 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 작전에 참석한 소수의 병사들은 결국 무사히 라이언 일병을 구하게 된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몇 명의 병사들과 또한 이 작전을 이끌던 대위(톰 행크스)도 운명을 달리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 조금은 모순되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어떻게 한 명을 살리기 위해서 갔다가 서너 명의 목숨이 유명을 달리했다는 것에 대해서 그러할 것이다. 

 

 


 영화중에 톰 행크스 대위와 그의 부하인 상사가 나누는 대화에는 이러한 말이 튀어 나온다. 

‘나는 이제껏 70여명의 대원을 잃었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1명의 대원이 죽음으로 인하여 100명의 병사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유태인인 스필버그의 이 영화는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또 한 사람의 생명이 고귀하게 지켜지게 되었다는 것을 다분히 강조한다. 

 


 라이언은 열심히 자기의 삶을 살아 온 뒤에 대위의 무덤을 찾아가 그는 고백한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대위님’
 그렇게 말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자기의 가족들을 뒤에 두고서 말이다.

 

 

 

 

 

그렇다면,  라이언 일병은 구할만한 자격은 있나?
  우리는 오늘 이 본문을 보면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생각해 본다면, 연상해 본다면 아주 이해가 잘 될 거라고 생각한다. 톰 행크스가 분한 그 대위와 몇몇의 병사들이 죽음을 가져갔던 그 대가로 인해 막내 라이언 일병은 생명을 가져갈 수 있었다. 

 V.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의인을 위하여 죽는 것도 드물며(rarely) 선인을 위하여 죽는 경우도 혹 있긴 하지만 잘 없다는 것이다.(might possibly dare to die) 

  영화 이야기를 더 하자면 라이언 일병을 구하러 가는 그 자그마한 소대보다 작은 그 무리들은 라이언 일병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그 놈이 정말 자기들이 구하러 갈만한 자격이 있는가?’

 

 에 대해 생각한다. 정말 겁쟁이 같고 총알이 날아오면 오줌을 쌀 정도로 멍청하고 바보라면, 자기들이 목숨을 내놓고 구할만한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그토록 찾고자 했던 라이언 일병은 적들이 우글거리는 최전방에 있으면서 형들의 비보를 들었을 때 집으로 빨리 가고 싶다고 하기보다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겁쟁이처럼 비굴하게 집으로 가기는 싫다’는 말을 남긴다. 그는 병사들이 생각하기에 “정말 구함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군인”이었던 것이다. 


  오늘 성경의 본문은 이러한 일들이 과히 쉽지만은 않다고 이야기한다. 

 



2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죽으셨다.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그리스도의 구속
 세상에 자기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주님께서 세상의 수많은 라이언 일병, 죄인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신이 인간이 되셨다. 신이 인간이 되어 인간의 죽음을 맛보셨다. 가장 처참하고도 치욕적인 나무십자가의 형틀에서 짐승처럼 죽으셨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그 사형틀인 십자가라는 형상, 그 이미지가 왜 기독교의 상징(Symbol)이 되었는가?

❶ 원래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가 아니었다.
❷ 기독교의 최후의 상징이 십자가가 된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죽으심’ 때문이다.

  십자가상(crucifix, 즉 그리스도의 모습이 달려 있는 십자가)은 6세기 이전에는 사용된 흔적이 없다. 존 스토트,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옥배역(서울: IVP, 1993), 25.


 적어도 2세기 이후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그림으로 나타낸 상징으로서 십자가를 그리고, 칠하고 음각했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상징을 그려 주기도 한 것이 확실한 것 같다. 

 

 

 

 


그리스도의 표시Sign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가시적 상징은 종교의 역사나 신념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내 보여준다. 기독교의 최초 가시적인 상징은 십자가가 아닌 비둘기, 월계관, 생선 등이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말하는 것으로 선택한 상징은 단순한 십자가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이해의 중심을 표시하는 기념물로 그의 죽음, 곧 그의 십자가에 달리심을 기념하고자 했다. 



   지금은 기독교의 보편적인 상징이 된 십자가가 처음에는, 그것이 직접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일반적인 죄인의 처형과 관련되어 있다는 이유로 인해 회피되었던 기록도 있(Micheal Gough, J.H.Miller..).
 보편적인 사람들이 멀리 하고, 회피하고 싶었던 그 사형틀에서,
 온 인류의 고통과 죄와 슬픔과 아픔과 상처를 홀로 감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볼 수 있다! 
그의 피를 보라! 
그의 눈물을 보라! 
그의 땀방울을 보라! 
그의 벌거벗은 몸을 보라!
그의 속옷 하나 걸치지 않은 그의 파리한 몸과 앙상한 뼈를 보라!

  그 분이 우릴 위해 죽으셨다. 아무 것도 아닌 우리의 인생을 위해 죽으셨다. 
Christ died For us!

 

 

 

 

 


불경건한 우리들, 죄인들

 V.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at just the right time, When we were still powerless, Christ died for the ungodly) 

  

 

주님은 말씀하신다. “경건치 않다”(ungodly) 하나님을 믿는다하면서도 하나님 없이 생활하고 하나님 없이 먹고 하나님 없이 공부하고, 일하고 하나님 없이 마시고 하나님 없이 모든 삶의 행위를 하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신다. 
‘경건치 않은 이 인간들아!!!’
 우리 자신의 인생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하지만 그러한 삶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은 의외로 단호하다. 
 우리는 그의 사랑과 그의 십자가의 그 의미심장한 죽음과 그 부활과 값진 영생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던 인간들이었다. 라이언 일병보다 더 미약하고 더 천박하고 더 이기적인 삶을 사는 자들이 바로 우리들이었다. 

 

 

 

 


 성삼위일체의 하나님의 마음
 성 삼위일체 하나님은 무척이나 고민했을 것이다. 이 어그러진 인간세계, 아무리 사랑을 베풀어도 그 끝을, 그 깊이를, 그 진의를, 그 대척점을 발견치도 못하는 사람들을 또 다시 구원하여야만 하는가? 또 다시 하나님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와 생채기를 남긴 채 사람들을 향한 가슴을 열어 젖혀야만 하는가? 또 다시 하나님의 마음은 썩어문드러져 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을 향한 두 팔을 벌려야만 하는가? 

 

 


  영화 ‘친구’의 한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장동건과 그 친구 유오성이 마주 앉아 이야기한다. 유오성은 장동건을 생각해서 하와이로 몸을 피할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장동건은 친구의 배려인 줄도 모르고 비웃으면서 이야기한다. ‘네가 가라, 하와이!’
  예수님께서 장동건처럼 성부와 성자의 회의 결과, 성자가 세상에 성육신하실 것을 결정하셨을 때 ‘네가 해라, 성육신!’이라고 했다면 우리 인류는 절망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하나님은 이 어리석고 부패한 인간세상을 또 다시 한번 회복시키시고 생명의 제 2창조를 위해서 주저함 없이 


“그리스도여 네가 가라! 성자여 네가 가라!”

 

 말씀하셨고, 그리스도는 복종하셨다.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주님의 구속사역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주님이 이 땅의 세계로 내려오신 것은 마치 피나리어(식인고기)가 가득한 강물에 사람이 뛰어든 것과 같은 것이다. 죄가 없으신 그 분이 죄에서 우릴 구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죄인들을 위해 오신 그리스도

우리가 연약할 때에When we were still powerless(V.6) 그 분이 오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While we were still sinners(V.8) 그 분이 우릴 위해 죽으셨던 것이다. 

 

 

  우리가 무기력할 때, 그 분이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우리가 여전히 죄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우리에게 오셨다. 우리가 죄를 거의 짓지 않고 죄책감에서 거의 탈피했을 때, 우리가 선을 많이 행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거의 주지 않았을 때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를 많이 지어 그 죄의 무게에 눌려 죽어갈 때,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준 상처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해 온 몸과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져 신음하고 있을 때, 아무도 나를 받아 주지 않고 냉대하며 조소 섟인 발언들로 날 짓뭉갤 때 주님이 나에게 오신 것이다. 주님이 그러한 우리를 위해 오신 것이다. 주님이 그러한 죄인들을 위해 오셨다. 선인을 위하여 죽는 사람은 어쩌다가 간혹 볼 수 있겠지만

 그러나 죄인을 위하여 죽는 사람은 없다. 자기와 반대되는 의견과 삶의 양식과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을 향해, 원수를 향해 자기의 목숨을 던지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인을 위해 그 목숨을 버리셨다. 그의 신성을 벗어 던지시고 하나님의 그 영광된 삼위의 제2위격의 자리를 버리시고 인간의 가장 비참한 자리에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진노의 자식인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십자가를 아는가?
그가 어디에서 죽었는가? 바로 십자가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V.8)

 


여러분 십자가를 아는가?
 십자가는 당시 알려진 세계의 변두리에 살던 “야만인들”에 의하여 고안되어서, 뒤에 희랍인과 로마인에게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아마 이것은 지금까지 행해졌던 모든 처형 방법 중에서 가장 잔인한 방법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람이 극도의 고통을 느낄 때까지 죽음을 늦추기 때문이다. 거기에 달린 사람은 여러 날 동안을 죽지 못하고 고통을 당할 수도 있었다. 로마인이 이 처형 방법을 택했을 때에도, 그들은 살인, 반란, 혹은 무장 강도의 죄를 범한 범죄자, 그 중에서도 노예나 외국인 혹은 사람취급을 못 받는 사람들(nonpersons)에게만 이 형벌을 가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로마의 장군 바루스(Varus)가 주전 4세기에 자기네 동족 2,000명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에 크게 분노했으며, 예루살렘을 약탈할 때에 장군 티투스(Titus)는 그 도시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이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세워 놓을 만한 공간도....사람을 달 십자가도”찾을 수가 없었다.

 로마 시민들은 극단적인 국가 반역죄를 제외하고는, 십자가형에서 면제되었다. 키케로가 행한 연설에서 십자가를 

“crudelissimum taeterrimumque supplicium, 
가장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형벌”

 이라고 비난했었다. 조금 더 내려가서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로마 시민을 결박하는 것은 범죄이고, 그에게 매질을 하는 것은 가증한 것이고, 그를 죽이는 것은 거의 살인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로마 시민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도 끔찍한 행동을 묘사할 수 있는 적절한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살인죄로 고발된 고참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라비리우스(Gaius Rabirius)를 키케로가 주전 63년에 말하길, “십자가”라는 단어는 로마 시민에게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 그들의 눈과 그들의 귀에서까지도 멀리 사라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 일(즉 십자가 처형 절차)의 실제적인 발생 혹은 그것을 견디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예상, 아니 그것을 단순히 상상하는 것까지도 로마 시민과 자유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로마인들이 십자가를 무서운 것을 간주했다면, 그 이유야 다르지만, 유대인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대인들은 “나무”와 “십자가”를 구별하지 않았으며, 또한 나무에 달리는 것과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도 서로 구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범죄자에게는 자동적으로,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3)라는 율법의 끔찍한 진술을 적용시켰다. 그들은 하나님의 메시야가 나무에 달려서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서 죽으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렇게 공포의 대상이었고 두려움의 상징이었던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셨던 것이다. 왜 그렇게 쓸데없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나? 우리나라의 전두환처럼 혁명이나 쿠데타를 일으킬려다가 그렇게 되었는가? 아니다. 오직 하나의 이유만이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해서였....”(But God demonstrates

1. ~ sth (to sb) 증거[실례]를 들어가며 보여주다, 입증[실증]하다  
2. [타동사][VN] (행동으로) 보여주다[발휘하다] 
3. ~ sth (to sb) (무엇의 작동 과정이나 사용법을) 보여주다[설명하다] 
4. [자동사][V] ~ (against sth) | ~ (in favour/support of sth) 시위[데모]에 참여하다  
 his own love for us in this)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이 말씀에 하나의 노예가 되어 아직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도들은 이 사실에 대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서 죽었다는 사실에 당황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만한 인물이라고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최소한 사도들은, 예수님이 담당하신 것이 바로 우리의 저주였음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그 십자가에 형틀에 죽이신 이유는 바로 우리들의 죄의 참상을 고발하시기 위해서였다. 죄에 의해 일그러진 우리의 형상을 하나님은 가시적으로 십자가에서 보여주셨던 것이다. 우리가 당할 형벌의 무게가 어떠함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셨던 것이다. 그 십자가에서 자신의 사랑을 진술하셨던 것이다. 변호하셨던 것이다. 
 사람의 죽음이 집중받았다!
  보통 사람들이 후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의 일생 가운데서 가장 중심되는 행위들, 즉 칭송받을만한 업적과 성취가 있을 때, 시기(timing, period)나 결과물(lifework)에 포커스를 맞춘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많은 이들이 이 세상을 지나쳐갔지만 특히 한 사람만큼은 그 사람의 탄생이나 청년시절, 그의 가르침이나 봉사, 섬김, 그의 통치, 성령의 은사 더 나아가 부활조차도 중심으로 오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십자가 때문이었다!
  그 사람의 모든 중심은 바로 그의 죽음에 초점을 맞춰졌고 사람들은 그의 죽음에 굉장한 관심과 찬사를 보여주었다.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슬퍼하고 애통해 해야 하며 절망스럽게 생각하는 인생의 보편적인 심리와는 달리 이 사람의 죽음은 세상의 정서와는 상반되는 느낌과 감정을 선물로 주었던 것이다. 어떻게 한 사람이 죽는데, 그 죽음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박수와 갈채를, 환호와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 사람만은 유독 독특했다. 
  또 한 가지, 그의 죽음이 이렇게 전인류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칭송받는 이유는 그의 죽음의 독특성 때문이었다.



 먼저, 그가 죽었던 곳은 십자가라는 데서 독특하다.
 둘째, 그가 죽은 십자가의 자리는 그가 스스로 자원한 자리였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나 이교도들에게 비웃음과 모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으로 십자가를 대신하는 것을 완강히 거절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십자가의 중심성이 예수님의 자신 마음속에서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 증거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그 자신이 난폭하고, 때 아닌 죽음, 그러면서도 어떤 목적에 합일하는 죽음을 자신이 당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서로 얽혀있는 그 죽음의 불가피성에 대한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하셨다.

 


 첫째, 예수께서는 유대 국가의 지도자들의 적의 때문에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둘째, 그는 자신의 죽음이 메시아에게 일어나리라고 성경에 기록된 사실의 성취이므로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셋째, 바로 자기 자신의 의도적인 선택 때문에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비록 예수께서는 자신이 죽어야 할 것을 알고 계셨지만, 그 죽음은 그를 대항하여 연합한 악한 힘들, 혹은 그에게 작정된 어떤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그가 무능한 희생자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에 계시된 바대로 죄인을 구하려는 그의 아버지의 목적을 그가 자발적으로 맞아 들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마음을 지배했던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명을 주는 것이었다. 이 최후의 자기희생, 이것이 바로 그가 이루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바 그 "때" 였다.  
  
  양온유의 죽음처럼 예수님의 죽으심이 조명받는 이유는 바로 십자가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의 근거이다. 

 

 

 



3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

   "왜 그리스도는 죽으셨는가?" 그것은 바로 이것이다. 비록 예수께서 인간의 죄악에 의해 죽임을 당하긴 했지만 그는 순교자로 죽으신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는 자발적으로 아니, 심지어 의도적으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셨다. 그의 공적인 사역의 시초부터 그는 이 목표를 위하여 자신을 바쳤던 것이다. 그가 자신의 죽음과 관련해서 "반드시 해야한다(must)"라는 표현을 계속해서 사용하신 것은, 어떤 외적 강제가 아니라, 지신에 관하여 기록된 것을 성취하겠다는 그의 내적인 결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두 가지 상보적인 방법을 언제나 함께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즉, 인간적인 차원과 하나님의 차원에서 보는 것이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보면 유다가 예수를 제사장에게 넘겨주었고, 제사장은 그를 다시 빌라도에게 넘겨주었고, 빌라도는 그를 군병들에게 넘겨주어서 군병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차원에서 보면, 성부께서 예수를 내주셨고, 예수께서도 자기 자신을 내주어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대할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내가 그 일을 했다. 내 죄가 그를 십자가로 보냈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그가 그 일을 하셨다. 그의 사랑이 그를 십자가로 보냈다."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왜 죽으셨는가? 
-첫 번째 대답은 그는 죽으신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대답은 그는 죽임을 당하시지 않았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써 죽으신 것이다.    

십자가의 저주는 우리의 저주
 예수님이 담당하신 그 저주는 바로 우리의 저주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고자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셋째,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넷째, 그리스도는 우리의 죽음을 죽으신 것이다.



 이 십자가가 10절의 결과를 가져왔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절: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하나님은 세상의 수많은 라이언일병을 구하러 오셨다. 그 라이언 일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구원받았음을 감사하며 은혜가운데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에게 십자가의 구원을 주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찬양과 감사를 드리자! 5절에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다 구약에서 유래된 표현이다. 무한한 충만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슥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고 했다. 



하박국 3:17-19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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