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요
1-5절: 회개하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한 정죄
2인칭 형식.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정죄하지만, 유대인들도 똑같은 범죄를 범하기 때문에 동일한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1절: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너도 같은 일을 행하는데, 그 댓가는 누구를 막론하고 핑계치 못할 것임
2절: 하나님의 심판은 진리대로 이뤄짐.
3절: 이런 일을 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
4절: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인자, 용납, 인내를 멸시하는 것은 무슨 시츄에이션?
5절: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쌓은 결과를 초래함.
6-11절: 각 사람의 행위에 따른 심판
3인칭 형식.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분 없이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6절: 하나님께선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심.
7절: 선을 행하는 자? 영광과 존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심
8절: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한 자, 불의를 따르는 자에겐 진노와 분노로 하심
9절: 악을 행하는 각 사람 누구에게나 환난과 곤고가 있음.
10절: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겐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누구에게나 있음.
11절: 왜냐?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기 때문임.
프롤로그Prologue
영화 ‘살인의 추억’-화성 살인 사건
수사진이 아연실색할 정도로 범인은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살해하거나 결박할 때도 모두 피해자가 착용했거나 사용하는 물품을 이용한다. 심지어 강간 사건의 경우, 대부분 피살자의 몸에 떨어져 있기 마련인 범인의 털이나 흔적조차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다. 후임으로 신동철 반장(송재호 분)이 부임하면서 수사는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박두만은 현장에 털 한 오라기 남기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 근처의 절과 목욕탕을 뒤지며 무모증인 사람을 찾아 나서고, 사건 파일을 검토하던 서태윤은 비오는 날,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범행대상이라는 공통점을 밝혀낸다.
선제공격에 나선 형사들은 비오는 밤, 여경에게 빨간 옷을 입히고 함정 수사를 벌인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돌아오는 것은 또 다른 여인의 끔찍한 사체. 사건은 해결의 실마리를 다시 감추고 냄비처럼 들끊는 언론은 일선 형사들의 무능을 지적하면서 형사들을 더욱 강박증에 몰아넣는데.
연쇄살인 실화극 | 1986년 시골마을, 두 형사에겐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 미치도록 잡고 싶었지만 못 잡은, 미해결 사건.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결국 살인의 추억의 범인은 잡히지 않는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다.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고 해서 범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죄를 지으면 세상의 법정이나 법의 심판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운 좋게 피할 수 있다. 영화 ‘공범’을 보니 공소시효가 지난 범인은 12:00가 지나자 거침없는 웃음을 내뱉으며 웃는다. 범죄자는 제도적인 법의 레이다망은 피해갈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가 없다.
오늘 본문은 1장의 내용과 연결된다.
1:18-32에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이방인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절하여 반역의 자리에 나아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에 빠진 것을 내버려두셨다고 했습니다. 1장 마지막에 보면, 이러한 죄의 목록이 나옵니다.
29: ①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인간의 내면적인 성품과 관련된 죄악
30: ②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범죄
31: ③수군수군하는 자, 비방하는 자,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 능욕하는 자, 교만한 자, 자랑하는 자, 악을 도모하는 자, 부모를 거역하는 자, 우매한 자, 배약한 자, 무정한 자, 무자비한 자
-12개 항목의 범죄: 가정, 사회, 공동체 생활에서 일어나는 범죄
32: 이같은 죄는 사형에 해당하지만, 그걸 알고도 계속 범죄하는 인간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바울은 2장에 이어서 ‘그러므로’란 접속사로 연결됩니다. 이방인에 이어 이제 유대인들향해 바울은 말한다.
1-5절: 회개하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한 정죄
2인칭 형식.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정죄하지만, 유대인들도 똑같은 범죄를 범하기 때문에 동일한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죄를 짓고도 심판받지 않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범죄자가 잡히던 잡히지 않던 간에 죄는 용서받기 전까지 우리 안에 흔적이 있는 것입니다. ‘주홍글씨’란 소설은 인간의 죄책감이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는 문학작품입니다.
간통을 저지른 여인 헤스터의 옷에는 Adultery의 A자가 새겨져 자기는공개적으로 ‘간통녀’라는 사실을 선포하면서 살아야 하는 처지였다. 그렇게 옷에다 우리의 죄를 기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설사 사람을 볼 수 없을지 몰라도,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숨길 순 없습니다. 오늘 본문부터 3:8까지 계속 유대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굉장한 특혜를 받고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착각이었습니다.
훈련소에서 ‘사단장 표창장’을 받으니 제식훈련에서 면제를 받았다. 총들고 뙤약볕에서 사열을 받는 것이 힘들게 보였다. 하지만, 우린 대신 매일매일 상받는 훈련만 했다. 그러다가 커피도 한잔 얻어먹기도 하고, 군대 아시는 분이 있어 포카리스웨트를 마실 수 있는 특혜를 누렸다.
유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마냥 이런 것보다 더한 특권과 특혜가 늘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유대인이라는 것 자체가 그런 특권의식에 빠지게 한 모양이다. 그들의 선민의식이 탁월하다. 남들과는 다른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 지금도 이스라엘의 민족적 자긍심으로 남아 있다. 이것을 마태복음에선 아주 적합한 단어를 적어주고 있다.
마태복음 23: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모세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율법조차도 자기 아래 둘려고 하는 사악한 마음! 교만! 그것이 바로 모세의 자리이다. 유대인에게 있었던 모세의 자리, 특권의식! privilege
그런 특권의식은 1절에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자리에 나아가게 만든다. 인터넷 댓글 문화 속에 나타난 저급한 시민의식!
예전 대통령의 facebook에다 온갖 욕을 다 적어놓질 않나! 연예인들한테 악성댓글을 통해 사람의 생명을 죽이질 않나! 소녀를 성폭행한 사건에 대해서 악성댓글을 다는 짐승같은 남자들의 댓글행위!
다윗을 보라! 차기 대권의 주인공이었지만 계속된 추격과 암살작전 가운데서도 그는 선왕인 사울을 해하지 않았다. 해할 기회는 두 번이나 있었지만 해하지 않은 이유는? 사울이 악한이었지만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모세의 자리, 판단의 자리에 앉기를 거절했다. 지도자에 대한 판단과 비판, 심판을 삼갔던 다윗의 위대함을 기억하라. 여러분과 비슷한 나이대의 그에게 그런 성품과 인격이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하다.
지도자를 위해 욕하고 비난하는 대한민국의 역사는 망조의 지름길이다. 조선시대 당쟁싸움으로 인해 나라가 분열되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노론과 소론, 서로서로 모세의 자리, 권세자의 자리에 앉고자 다툼을 하다가 결국 일제의 침략을 허용해주고 말았다.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었다. 항상 적이 내부에 있고 나서 외부의 적이 생기게 되는 듯하다.
한국기독교는 미국에 이은 세계선교 2위이다. 영적 주도권을 쥔 민족이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가 우리나라에 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지도자의 범죄와 성직자의 타락, 대형교회 목사의 윤리적인 문제, 설교 카피문제...우리나라가 너무 영적인 비만상태가 아닌가 싶다. 다들 모세의 자리에 앉길 좋아한 이력의 한국교회가 아닌가! 우리가 먼저 정신을 차려야 하지 않는가? 제2, 제3의 유대인은 지금 여기에도 충만하게 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가로 갈려면 물질적인 개혁보다 먼저 정신의 개혁, 마인드의 개혁이 필요치 않을까 싶다.
이재철 목사님께서 언젠가 한마디:
인류역사상 통치를 당한 민족은 대다수가 부정직하고 거짓말이 심하다. 왜냐하면 자기가 빼앗긴 것을 다시 빼앗기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남미, 뉴질랜드 호주민 등은 거짓과는 거리가 멀다. 백인들꺼 가지고 거짓행위에 대해 거리낌이 없다. 우리나라는 해방된 지 수십 년 지났고 20세기에 해방된 나라 중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 선진국으로 가는 나라 중 유일하다. 하지만 선진국은 잘 산다고 되는 것(소득의 크기)이 아니라 정신의 투명성(정직, 투명성)이다. 진정한 친일청산은 친일명단을 공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부정직을 뿌리 뽑는 것이다. 기업경영, 마켓경영,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부정직을 깨닫지도 못하는데 있다.
자기가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면, 모세의 자리에 서면 자기 자신의 허물과 죄는 보지 못하는 법이다. 자기 자신을 판단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만 판단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잘 씹고 남 이야기하는 것이 좋아하는 사람치고 자아성찰 제대로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2:1-3:8까지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런 특혜나 특권의식은 없다는 결론을 오늘 본문에서 하고 있습니다.
2:12-16 유대인의 ①율법소유가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준다?
2:17-24 유대인들의 율법위반을 날카롭게 지적
2:25-29 유대인의 안전장치②-할례
3:1-8 자신의 선포에 대한 유대인 항의에 대한 답변
유대인들은 이러한 것이 자신의 구원을 위한 안전장치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인종, 계급, 신분, 성별, 나이, 배경,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다. 이러한 모든 것은 11절의 일종의 외모 노릇을 한다고 봐야 한다. 교차대구법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는 차별이 없다고 하신다. 유대인이 가진 특권을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하고 죄에 빠지게 하고 멸시하고 교만한 것을 5절에서는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이라고 표현했다. 민족적 자긍심이 오히려 교만의 이유가 되었고 고집과 회개치 않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고집을 부리며 회개치 아니하면서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고 진노하신다고 투덜거린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매일 만나를 먹는 것에 지친 나머지 불평과 원망, 짜증을 낸다. 여러분, 짜증내는 거 정말 듣기 싫다. 징징대는 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징징댔다. 애들이 징징거릴 때 진짜 듣기 싫다.
여러분이 최고로 좋아하는 음식은? 매일 그 음식을 먹는다 생각해보라. 매일 상하이 스파이시 치킨버거, 매일 새우버거를 먹는다고 생각해보라. 하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선 광야에서 그것도 하늘의 양식이었고, 메추라기는 하늘의 고기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환경에 적응하다보니 교만하여지고 배가 불러서 짜증과 스트레스를 뿜어내는 것이다.
여러분, 회개를 하는 것도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을 내버려두셨다. 그리고 불뱀을 보내서 사람들을 다 물어 죽이셨다. 단 놋뱀(=예수 십자가의 상징)을 보는 자만 구원받고, 치유 받도록 기적을 베풀어주셨다. 4절을 보라.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회개의 정의: 김남준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당장 죄를 심판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 풍성하시기 때문에 결코 죄를 심판하실 리 없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곡해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해 먹으려는 것이며, 결국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입니다.'
시애틀의 한 교회에 장로님 부부가 있었다. 그 분들은 미국의 다른 주에서 신앙생활을 하시다가 은퇴하시고 다른 교회로 이사를 가셨다. 그런데 이사 오기 전 교회에서 10년 동안 장로로 섬기다가 왔는데, 그것도 밝히지 않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이분이 장로라는 것도 모르고 집사로 임명했다. 그럼에도 별 말 없이 집사 직분을 잘 맡아 성심껏 감당했다. 그러다 다시 장로가 됐을 때는 또 장로로서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겼다고 한다. 정말 근사하지 않은가?
사고뭉치들만 모인 대안학교에 변화가 일어났다. 담배 피우던 학생들, 담배를 씹어 삼키던 학생들, 야구 방망이로 선생님을 때리기까지 한 말썽꾼들이었다. 그런 아이들이 그 학교에서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대학과 전혀 상관없어 보였던 이 아이들의 90퍼센트가 대학에 진학할만큼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무엇보다도 학생들의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은 놀랍게도 수위 아저씨였다. 근데 알고 보니 그 수위 아저씨는 은퇴한 전직 교장 선생님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학생들에겐 그게 충격이었다.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그 수위 아저씨를 존경하게 되었고 존경하는 어른이 생기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교장이 수위가 되자 능력이 생긴 것이다. 자기를 낮추고 다른 사람에게 관대할 때 이런 힘이 생기는 것이다.
모세의 자리에 올라 남들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씹기만 했던 적은 없는가? 목사라고, 리더라고, 선배라고, 형이라고 나이 많다고 맘껏 비난한 적은 없는가? 여러분을 가장 낮은 겸손의 자리에 놓을 줄 아는 사람, 인격이 되길 바란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인격이 되라!
예수님을 사람들이 정치적인 메시야로 오해하고 왕으로 세우고자 할 때마다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셨다. 그리고서, 새벽에 일어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지 않았던가?
마하트마 간디의 겸손의 훈련: 그가 어떻게 비폭력 영웅 간디가 되었는가? 날마다 밤마다 물레질을 하면서 자신을 내려놓고 겸손의 연습을 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되면 단순한 노동, 반복적인 훈련과 일상이 자신을 겸손하게 가장 좋은 지름길인 듯 싶다. 자기만의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나라! 그것이 바로 모세의 자리이다. 그것이 바로 유대인의 자리였던 것이다. 우리의 자리는 허물과 죄로 죽은 자리이다.
6-11절: 각 사람의 행위에 따른 심판
3인칭 형식.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분 없이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행위에 따른 심판은 하나님의 불변하는 심판의 원칙입니다. 최후의 심판 날 하나님은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의 날에 일어날 중요한 세 가지를 말해준다.
첫째,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은 ‘모든’사람에게 임한다. 한 사람의 예외도 없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차별이 없다.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인류에 대한 심판인 동시에 개별적인 심판이다.
둘째,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의인 아니면 악인으로 구별될 것이다.
2:8 여기 '에리테리아'는 당을 짓는 것보다는 이기적인 야망을 의미한다. 이기적인 야망의 지배를 받는 자는 모든 초점이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는 자이다. 그는 피조물은 창조주를 의존하며 살아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를 무시하고, 자부심과 자기 이익을 위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배척한다. 진노는 이러한 반항에 대한 보응이다.
셋째,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은 의인들과 악인들에게 영원한 운명을 선포하는 날이다. 의인들의 영원한 운명은 영생, 영원한 영광과 존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들의 영원한 운명은 진노와 분노, 영원히 환난과 곤고, 즉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특권의식, 특별히 11절에 나오는 ‘외모’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시지 않는다. 외모는 우리의 의가 될 수 없다. 17절에 뭐라고 말하는가? 하나님의 의는 바로 믿음을 통해서 구현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 외에는 아무것도 믿을만한 것이 없다.
여러분의 외모는 무엇인가? 유대인들은 영적 자긍심이 영적 교만으로 이어졌다. 그 영적 교만은 아직도 예수님 아닌 다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의 틀 속에 놀아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세상의 기준과 틀에 놀아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시고, 6절의 말씀대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
우리의 외모는? 교회를 열심히 다닌 이력, 리더십그룹에 속했다, 많은 섬김과 봉사의 흔적, 직분, 수많은 부흥의 열매와 성장의 과정! 빛나는 집, 잘나가는 자동차, 잘난 대학, 연봉 많은 직장, 인정받는 직업? 때때로 성직자라는, 목사라는 위치가 외모이고 모세의 자리는 아닌가?
하나님의 심판은 차별이 없다!
정리하면, 인간의 영원한 운명은 절대자에게 순종하느냐 반역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차별은 없지만 구별은 있다.
728x90
'설교 > 로마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2장 17-29절, 율법은 지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0) | 2021.10.09 |
---|---|
로마서 2장12-16절,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유대인-이방인과 율법 (0) | 2021.10.09 |
로마서 1장 24-32절, Let it Be (0) | 2021.10.07 |
로마서 1장 18-22절, 죽음에 이르는 병 (0) | 2021.10.04 |
로마서 1장16-17절,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 | 2021.10.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