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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로마서

로마서 2장 17-29절, 율법은 지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by Message.K 2021. 10. 9.

개요


유대인과 율법(vv.12-24)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방식(vv.12-16/이방인과의 율법 관계)
17절: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는 유대인
18절-20절: 스스로 착각하고 믿는 유대인들, 증상:

    1)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

    2)맹인의 길인도 

    3)어둠의 빛 

    4)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 

    5)어리석은 자의 교사  

    6)어린 아이의 선생
21-22절: 다른 사람을 가르치면서 네 자신은 왜 가르치지 않느냐?
    Ex) 도둑질, 간음, 우상숭배(신전 물건 도둑질)
23절: 율법을 자랑하기만 하지 율법을 오히려 범하는 유대인: 하나님을 욕되게 함
24절: 하나님이 이름이 유대인 때문에 이방인 중에 모독을 당하는 결과
   


유대인과 할례(vv.25-29)

25절: 율법을 행할 때 할례가 유익, 율법과 관계없는 할례는 무할례와 같음
26절: 무할례자라도 율법을 지키면, 무할례가 할례와 같은 효력
27절: 무할례자의 율법 지킴 VS 율법을 범하는 유대인
28절: 표면적 유대인≠유대인, 표면적 육신의 할례≠할례
29절: 이면적 유대인=유대인, 할례는 마음에 있고, 영에 있음, not 율법조문
      그 칭찬이 not 사람, but 하나님에게서

2:12-16 유대인의 ①율법소유가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준다?
2:17-24 유대인들의 율법위반을 날카롭게 지적
2:25-29 유대인의 안전장치②-할례

3:1-8 자신의 선포에 대한 유대인 항의에 대한 답변  

 

 

 

예전부터 웰빙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지 오래다. 
이전세대-보릿고개에 대한 아픔, 질보다는 양을 추구, 하지만 웰빙시대는 양보다는 질이 우선
더 건강하고 더 건전하고 더 윤택한 삶을 위해 사람들은 안달이 난 상태.
응답하라 1994에 보면, 냉커피를 사발로 마시기도, 유리컵 가득 찬 커피를 보았을 것.
하지만, 이제는 노란색 커피믹스도 콜레스트롤이 많다고 먹지 말아야 한다는 시대, 다들 웰빙을 외치는 슬로건 앞에 아메리카노나 카페인없는 커피를 즐기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웰빙에 대한 붐은 오늘날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학파
사도바울 당시에도 이런 추세가 있었는데, 우리가 도덕(윤리)시간에 배운 철학사조에도 나타난다. 어떻게 하면 잘 살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 두 가지 다른 방향으로 접근한 부류가 있다.


에피쿠로스 학파: 쾌락을 많이 즐기는 것이 인생의 목적, 쾌락 = 타락은 아니다. 세상을 될 수 있으면 즐겁게 살자는 주의이다. 할 수 있는 대로 다른 사람들과 얼굴 붉히면서 다투거나 싸우지 않고 매사를 즐겁고 유쾌하게 사는 것이 이들의 초점. 적당하게 먹고 운동하고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식.
이에 반한 

스토아학파: 모든 것을 참고 절제하고 인내하고 금욕적으로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할 수 있는 한 감정도 절제하고, 말도, 욕망도 절제하는 것이 사람의 행복의 지름길이라는 식.
  고대 철학자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바르게살기 운동을 하였다. 하지만 사람이 바르게 산다는 것에서 만큼 복음이 필요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과 관계에서 이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생
  왜?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은 인생이기 때문이다.
  허물이 무엇인가? 히브리인들은 ‘허물’은 남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남의 아내를 차지하려는 것, 사장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도 허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죄라는 것은, 화살이 바른 방향으로 날아가지 않고 엉뚱한 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이 바른 목적을 위해 사용되지 않으면 죄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연필을 깎는 사람이 칼로 사람을 찌르면 죄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칼이 바르게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이 바르게 살려고 해도 이미 남의 영역을 침범하기를 즐겨하는 것이 인간이고, 이미 삐딱한 방향을 발걸음을 치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에 바르게 산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율법과 종교생활이 구원할 수 있는가?
  여기에 유대인들은 바르게 살 수 있다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올인하게 되는데 바로 율법을 가지고 올인한 것이다. 종교적인 생활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 앞에 진정한 웰빙을 누릴 수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율법과 선민의식
 자신들이 올인한 것은 바로 율법이었다. 하나님은 전 세계의 수많은 나라 중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셨다. 그 기원은 바로 아브라함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갈대아 우르의 이방 땅에서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우뚝 서게 되며 손자 야곱의 가족들이 번성함에 따라 이집트에서 엄청난 민족을 이루게 된다. 출애굽하고 광야생활을 지나 가나안으로 정착하면서 본격적으로 국가를 이루게 된다. 사울과 다윗, 솔로몬을 거치면서 이스라엘이란 세워졌지만 곧 분열왕국으로 그 생명을 유지하게 된다. 이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믿음의 자부심은 유대인 전체에게 퍼져있다. 선택받은 민족이다. 전세계 100개가 넘는 나라 가운데 하나님은 이 우리나라 경상도 땅 덩어리만한 사이즈의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이다. 그들은 선택받았다는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한 것이다. 거기다가 율법까지 받은 것이다. 여기서 율법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의 모든 구약적 가르침’을 의미한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내비게이션이 있으면 무얼해?
  17절에 유대인들은 율법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자랑한다고 했다. 그들의 율법의 선생이기도 하고 지도자, 교사이기도 하다. 거기까진 좋다. 하지만 중요한 것을 그들은 놓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네비게이션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이 길을 잘 몰라도, 나같은 길치라도 길을 잘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한번 씩 실수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네비게이션이 있어서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율법은 영적 내비게이션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삶의 지도책, 네비와 같다. 하지만 그 네비를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하고 그 네비게이션을 켜서 사용을 하지도 않고 네이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운전해가지도 않으면 그 네비게이션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유대인들은 그러했다. 네비게이션, 이 네비게이션 진짜 탁월한 성능과 효능이 있다고 소린 치지만, 정작 자신은 네비게이션을 따라 살지 않는다는 것이 유대인의 문제였다.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잠 1:7),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자신은 자기의 길을 맘대로 가버린다는 현실이다. 머리에는 말씀의 지식이 가득차 있지만, 그 말씀의 지식이 가슴으로 내려오지 않는 유대인들이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이 큰 감동과 능력으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가기 위해선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이다. 안다고 바로 사는 게 아니다. 안다고 해서 바로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여러분이 임원.리더의 사역을 머리로 감당할 수 없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와 몸이 움직여야!
머리로 안다면, 가슴도, 몸도 움직여야...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하는 자들은 주의해야 할 것이 말씀을 아는 것만으로 바른 길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머리만 알지,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것은 바른 삶이 아닌 것이다. 

 

 

 

 

 


왜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않느냐?
21-22절의 요점이 무엇인가?

 “다른 사람은 잘 가르치면서 왜 네 자신은 안 가르치느냐?”는 것이다.

 

 사람이 나이가 여러분처럼 젊을 때는 의로운 성품이 내재되어 있어 무슨 사건이나 억울한 일이 발생하면 의분을 토한다. 왜 저렇게 밖에 살지 못하느냐고!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람은 변화를 싫어하고, 안주하게 된다. 죽기까지 변화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어느 정도가 되면 자기의 것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의 것을 바꾸기보다 남의 것을 바꾸려고 지시하는 쪽으로 립서비스가 강화된다. 몸도 안 따라주고 이전에 젊을 때의 이상과 꿈은 이제 신기루와 같은 것이라고 어느 정도 포기하고 내려놓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먼저 실천한 박재수 목사
  지난 번 수련회 강사, P 목사님의 일화를 기억할 것이다. 자신은 개척교회에 부임하면서 한 번도 집에서 잠을 잔 적이 없다고. 오로지 교회에서 잠을 자고 새벽기도 인도하고 그런 라이프스타일로 사신다고. 저는 그분이 존경스럽다. 나이가 20대면 젊으니깐 교회에서 잠도 자고 수련회한다는 느낌으로 그러겠지만, 30대, 40대, 50대가 되면 수련회하는 것도 힘들다. 피곤하기도 하고, 몸도 안 따라준다. 젊을 때 많이 여행하고 많은 세미나, 수련회도 갔다 오라! 그런데 P 목사님은 매일 교회에서 기도하시다가 잠을 주무신다. 잠은 집에서 주무시지 않아도 되는가? 하지만 그분은 삶으로 그렇게 나그네 삶을 실천하시는 것이다. 자신의 것을 포기하기에 다른 사람에게 포기를 이야기해도 먹히는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에게 율법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24절에 하나님의 이름이 유대인들 때문에 모독을 받는다고 말한다. 

 

 

 



유대인의 가장 큰 문제: 겸손하지 못한, 교만함
  유대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가장 큰 축복은 율법을 아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바로 25-29절에 나오는 할례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두 가지 축복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깨닫지 못하는 두 가지, 하나는 자신들이 하나님을 알기는 했지만, 중증 장애인이라는 사실, 중증 장애인의 특징은 알아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중증 장애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말로만 이래라 저래라 해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문제점: 삶과 분리된 세레머니ceremony
  유대인들의 놀라운 모습은 예배 드릴때와 일반 생활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예배드릴 때 너무나 홀리하지만 일상생활 가운데선 신자의 모습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나는 가수다, 히든 싱어 이런 프로그램이 나오면서 사람들, 관객들이 감동적인 노래를 들으면 희열을 느낀다. 그러면서 감동이 불거져 눈물을 흘린다. ‘수상한 그녀’를 보면서 나는 눈시울이 붉어졌는데, 다들 놀리더라고.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예술작품을 통해서 감동을 받고, 눈물도 흘리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도록 은혜를 주셨다(일반계시의 일종이라고 생각해도 좋겠다). 그런 프로그램에 방청객으로 참석해서 눈물을 한 번 흘리고 집으로 돌아가면 그들에게 무슨 삶의 변화가 있는가? 감동의 여운은 있지만 삶의 변화는 없다. 
  마찬가지다. 율법도, 할례도. 이것이 너무나 소중한 것이고 아름다운 영적 유산이지만,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좋은 음악 한 번 감상하고 눈물 한 줄기 흘리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만약 사람들이 음악프로그램에 참석해서 눈물 한 줄기 흘린 것을 가지고 자랑한다면 그게 과연 온당한 것인가? 

 

 

 


할례의 진정한 의도
  유대인들은에게 있어 할례는? 자랑하고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꾸 하나님 앞에서 넘어지고 죄를 짓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표시를 보시고 우리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받는 것이다. 그러기에 할례를 행하는 것, 그 자체가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린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음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할례를 자랑으로 삼았으니깐 만일 눈에 보잊는 곳에 할례를 했더라면 얼마다 더 자랑하고 다녔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겸손
 결국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 바로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다. 사도바울은 진정한 할례는 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무리 자신이 할례를 받았다고 해도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할례인이 아니라 무할례인이다. 하나님 앞에서 그가 할례를 받진 않았지만, 그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다면 그 사람은 할례인인 것이다. 육체적으로 새겨진 수술의 흔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삶으로 훈련하고 지키는 내용이 관건이다. 

 

 

 

 


칭찬은 하나님에게서부터 받아야
  바울은 다시 한번 민족적 배경이나 육체적인 표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는 의미에서 ‘유대인’과 ‘할례자’를 설명한 후, 바울은 그러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칭찬을 듣는다고 선언한다(29절). 요점은 이렇다. ‘유대인’이라는 단어가 파생된 히브리 이름 ‘유다(Judah)'는 실제로 ’칭찬‘을 의미한다(창 29:35; 49:8). 그러한 요점이 잘 드러나지 않는 헬라어로 글을 쓰면서도, 바울은 여전히 히브리어로 사고하고 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칭찬‘이라면, 즉 당신이 머리를 들고 당신의 특별한 존엄성을 주장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이름을 원한다면,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지위를 자랑하면서 다른 사람에게서 칭찬을 구하지 말라. 하나님이 영으로 그분의 율법을 마음에 쓰실 때, 하나님께 칭찬을 받으라!

 


  
-하나님 앞에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허물(남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 죄(방향이 빗가나는 것)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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