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3:1-8 자신의 선포에 대한 유대인의 항의에 대한 답변
1) 유대인의 나음과 할례의 유익에 대한 답변(1-2절)
2) 언약에 대한 유대인들의 불성실성이 하나님 편에서도 불성실성을 가져올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 그럴 수 없다(3-4절)
3) 인간의 불의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의가, 죄가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 풍성하다는 바울의 복음이 오히려 악을 조장한다는 오해와 관련된 답변(5-8절)
실컷 설교준비하고 나니, 이 본문이 로마서전체에서 제일 어려운 본문이라고 한다. 어렵긴 어려웠다.
유대인의 나음은 말씀을 맡았기 때문
바울은 유대인이 율법을 맡은 것이나 할례를 받은 것이 아무 유익이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이에 대해 유대인 편에서 반론한다. 1절의 그 질문이다. 바울의 답변은 분명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 비해 많은 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이다(2절). 이 말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위탁, 신의 위탁=신탁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이 말로써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주는 것을 말한다. 유대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신탁,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구약 성경이다. 유대인의 가장 중요한 특권, 가장 중요한 이점은 바로 하나님의 특별 계시의 관리자요, 담당자로 선발되었다는 것이다. 그 특별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인간을 아는 지식을 주셨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관리자로 유대인을 선택했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구약성경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까지도 완성된 신구약 66권 전체의 신탁을 받았다. 구약성경만 신탁받은 유대인들과는 더 큰 영광과 특권을 부여받은 것이다.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구약성경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보호하고, 방어하고, 전하고,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기록할 때 최선을 다해 한땀 한땀 수를 놓듯이 문자를 잘 기록했다. 히브리어는 점 하나 밑에 붙느냐 왼쪽에 붙느냐에 따라, 점이 한 개 붙느냐 두 개 붙느냐 세 개 붙느냐에 따라 글이 달라지기 때문에 더 그러하다. 유대인들은 빠짐없이 말씀을 잘 전달받았다. 율법을 배우고 안식일마다 성경을 낭독하고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힘썼다. 그들의 그런 점은 높이 평가할만 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이유는 지키고 순종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것은 무엇보다 이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교회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믿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곳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생명을 잉태하고 구원하는 곳이어야 한다.
성경66권을 신탁한 기독교인은 유대인보다 더 큰 특권을 소유
우리는 기독교인으로 하나님의 신구약 66권을 보관.전수.전파할 책임을 부여받았다. 유대인보다 더한 특권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고 순종하며 읽고 묵상하고 가까이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답게 대하고 있는가? 이 성경이 우리의 영혼의 구원의 책인 동시에 총체적인 구원의 책 임을 기억하자!
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조금 찔려서 읽던 성경을 10장 통독하고 난 후 다시 설교를 준비했다. 세상에는 성경을 공부하거나 설교를 마음대로 들을 수 없는 나라와 민족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성경을 읽고, 듣고, 보고, 배울 수 있는가? 이에 대해 감사하라!
말씀의 생수로 나아가라
물 없는 사막에서 나귀가 오아시스를 발견했다고 치자. 그 나귀는 오아시스의 물을 마시기 위해 가든지 말든지 자유이다. 억지로 끌고 갈 순 없는 노릇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생수의 강가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예수 믿는 가정과 교회의 예배시간이다. 그 예배의 자리에 여러분이 말씀을 듣고 해갈함을 누려야 말씀을 맡은 자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것이다. 설교시간 다 잘라 먹고, 아님 설교 끝날 때 예배참석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생수의 강가에 거의 다 왔는데, 물도 마시지 않고 돌아가는 나귀와도 같다.
총각 전도사일 때, 중국에서 오신 집사님이 나더러 전도사님은 중국선교를 위해 부름받았다고 기도중에 그런 음성을 들었다고 하면서 중국에 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배우자도 중국에 있다고. 그 때 제가 요나서 강해를 한 적이 있는데, 그 강해를 중국교회에 와서 맘껏 전하면 너무 좋겠다고 그랬다. 지금도 중국은 사역자가 많이 부족하지만, 지금부터 10년 전에는 더더욱 그러했기에 그 집사님이 나에게 중국선교사를 제언하지 않았나 싶다.
선교사들은 말씀을 신탁받은 책임을 다한 사람들
우리는 짐 엘리엇의 일화를 잘 알고 있다. 식인부족인 아마존 땅에 아우카 부족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짐 엘리엇과 다른 형제들은 그들을 찾아갔다. 그들이 그 부족이 살인부족인 것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들어간 것은 순전히 그들이 말씀을 신탁받았기 때문이다.
<짐 엘리엇의 ‘창끝에서’ 동영상>
양화진의 선교사의 무덤: 지금부터 120년 전에는 미국의 눈에는 코리아란 나라보다 오히려 아프리카가 더 가기가 수월했다. 집도, 수세식 화장실도 있었고, 노예도 있었다. 생활하기가 훨씬 용이했다. 코리아는 그에 비하면 너무 열악했고 형편없는 나라였다.
선교사들이 힘들었던 것은?
1) 일년 내내 다리를 못 뻗고 잠을 잤다는 것. 좁은 방에서 장신의 선교사가 잠자는 게 고역이었다. 고문 중의 고문이 사람의 몸을 궤짝에 넣어놓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2)화장실 문제-수세식이 어디 있던가? 전부 퍼세식, 생동감있고 활력있는 퍼세식!
3)서구생활과 다른 음식문화
무엇 때문에 그들이 왔던가? 선교사님들에게 부어주신 성령님의 사랑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영적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온 것이다. 세월이 지나 그 외국인들을 ‘제국주의의 앞잡이’라고 하면 그들이 편한 데로 와야지, 왜 이렇게 불모지(오지)로 왔단 말인가?
말씀을 맡은 것에, 대할 수 있음에 감사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대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라! 그리고 그 시간을 즐기라! 말씀을 여러분의 가슴과 삶에 저장하라! 그 저장된 말씀이 언젠가는 여러분에게 능력으로 나타날 것이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에서 다윗이 어떻게 골리앗을 이겼겠는가? 삶 가운데 내장된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으로 맹수들과의 싸움에서 이긴 승리의 흔적에서 오는 용기와 자신감(자긍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실패해도 하나님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하나님의 미쁘심
3-4절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맡았지만, 그들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신실치 못함을 보여주었다(3절). 그러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약속도 신실치 못하다, 거짓되다 할 수 있느냐? 중요한 사실이다. 사람들이 실패해도, 하나님의 신실성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의와 목적은 그대로 존속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의 신실함의 여부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인간은 실패하나 하나님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전적인 하나님의 손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어떤 것에 의존한다면 분명 그 약속은 성취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대로 메시야 예수를 보내셨고,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메시야를 믿게 해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원래 언약관계에서 한편이 약속을 어기면, 다른 편은 자동적으로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통하여 온 인류에게 주신 약속에 대하여 신실하심을 유지하신다.
여러분!
사람은 실패해도 하나님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실패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은 완전한 자신의 구속의 계획을 이루셨다. 하나님께는 실패가 없다. 절망과 실패의 자리에 있는 자가 있는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라!
하나님은 죄도, 세상도 심판하시는 분(5-6절)
그러자 5-6절에서는 인간의 불의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인간은 실패해도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는다, 인간의 죄의 결과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영광스럽게 한다면, 하나님이 죄를 심판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냐? 유대인의 실패를 통해 하나님은 더 큰 영광을 받으셨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유대인을 벌할 수 있다 말인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 했는데, 그 죄 때문에 은혜가 더 넘쳤는데, 굳이 죄를 또 심판한단 말인가? 바울은 이에 대해 답변하길,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한다. 하나님이 죄에 대해 처벌할 수 없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심판할 수 있는가?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은 죄를 심판하신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 심판의 대상에는 이방인 뿐만 아니라 유대인도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은혜를 악용하여 죄를 지어선 아니 된다(7-8절).
또한 바울은 7-8절에서,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할 수 있는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려는 것이지 사람들에게 죄를 짓도록 조장하는 것이 아니다. 은혜를 악용하여 죄를 짓는 자는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바울이 가상 질문자를 대상으로 하여 질문하고 답변하였는데, 이러한 것은 바울의 복음 현장에서 비일비재했던 일 때문이었다. 복음은 죄인 된 인간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에 역행한다. 바울은 자신의 복음을 그냥 전하지만 않고 그 복음을 전했을 때 복음을 받는 자들의 머릿속에 예상되는 반론까지 다 생각해서 그에 대한 진리의 답변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5-8절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방종주의의 위험을 다루고 있다. 흔히 하는 질문 중에 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게 방치하셨는가? 하는 질문이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아담과 하와가 타락할 것을 미리 알고 계셨으니 미리 예방하실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결국 인간이 타락하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불완전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 책임이 하나님에게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기왕 구원하시려면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구원하셔야지 왜 어떤 사람은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은 구원하시지 않느냐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다. 그 자유의지를 통해 우린 충분히 타락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우린 죄를 선택한 것이다. 모든 것이 우리의 책임이고 인간의 책임이다.
바울은 오늘 유대인들이 말씀을 먼저 받은 큰 특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믿지 않거나 말씀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을 다른 이에게 돌릴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인간의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불행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 없는 것이다.
Epilogue...
바울은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해가고 있는데, 먼저 유대인들의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죄를 지은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잘못해서가 아니고 인간의 전적인 책임임을, 유대인들도 그 범주에서 절대 도망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유대인이 특별히 많은 죄를 지어서건, 작은 죄를 지어서건 간에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죄를 지었다는 진리로 바울은 논리를 몰고 가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 (10-12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모든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가?란 질문에 자연스럽게 도달하게 된다. 그러면서 바울은 유대인이 그토록 신봉했던 율법의 방법이 아닌 전혀 새로운 방법,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류는 의로워진다고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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