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문맥: 이신칭의의 교리(V.16-17)
개요: 바울은 로마에서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15절).
-왜냐하면(gar)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이다(16a절).
-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이유(gar)는
-이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16b절).
- 하나님의 의(즉, 그의 구원의 능력)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음 안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다(17a절).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즉, 영생을 누리는 것)고 말하는 구약 성경(카토스)에 의해 뒷받침된다(17b절).
토마스 슈라이너, BECOT: 로마서, 배용덕 역(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2), 85-86.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16a절).
-왜냐하면 복음은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16b절).
- 복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의 의라는 종말론적 계시가 복음 안에 나타났기 때문이다(17a절).
- 인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의 의를 경험한다(17b절).
그리하여 하나님의 의는 처음부터 끝가지 믿음을 통해 경험된다(17c절).
토마스 슈라이너, BECOT: 로마서, 104-105.
: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16절a)
Why? 복음이 부끄워할 만한 이유는?
부끄럽지 않은 이유: 이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16절b).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전제조건:
-모든(허용적 조건): 먼저 유대인에게, 그리고 헬라인에게(16절c)
-믿는 자에게(제한적 조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어떤 구원인가?
2.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17절a)
*하나님의 의는 과연 무엇인가?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한다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함과 같다*합 2:4
바울은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다. 바울이 당시 최고의 권력과 권세를 자랑하던 world power였던 로마제국에 바울이 들고 간 것은 복음이었다. 로마는 로마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미 성적, 도덕적 타락이 수위를 넘었고, 로마서에서도 동성연애가 창궐했음을 볼 수 있다. 로마가 망한 이유? 공중목욕탕이 실례이듯, 성적 타락이 한몫을 했다. 복음과는 정반대의 삶을 사는 그 로마에 복음을 들고 간다고? 그 복음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이 구절에서 바울은 로마에 전파하려는 복음에 대한 생각, 복음의 능력,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이유, 복음과 믿음과의 관계와 복음은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등을 제시한다.
1.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16절a)
왜 바울은 이런 말은 하는가?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유대인: 신명기 21:23에서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십자가를 저주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들에게 메시야는 능력, 승리, 장엄을 의미하지만, 십자가는 연약함, 수치, 패배를 뜻한다. 유대인이 그토록 기다려온 메시야는 그들의 생각과는 다른, 아주 초라하고 비극적으로 죽어간 인물이기에 유대인들에겐 십자가의 예수는 거리끼는 것이다.
한편, 헬라인(그리스인)들에게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다. 그들이 볼 때, 자기 원수들에게 사로잡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신god의 행동은 한 마디로 미친 짓이다. 따라서 이런 복음을 전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다. 또한 로마황제가 있는데 또 다른 누군가에게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굉장히 역설적이고 위험한 교리였다. 이를 고백하는 것에는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복음을 자랑한다.
야만인이 고안해낸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모함 비슷하게 죽어간 그 스토리는 많은 이들에게 부끄러워 보였고, 없어 보였고, 작아 보이고, 보잘것없이 보이지만, 바울은 그것은 세상적인 관점이고, 자신은 오히려 그 복음, 그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말한다.
Ex)한 때 미국에선 Jesus Yes, Church No! 라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예수님은 좋은데, 교회는 부끄럽고 싫다는 운동movement
*복음은 확실히 어떤 것인가?
바울이 자랑했던 그 복음은 단순히 메시지 전달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 종과 상전의 신분(계급)과 성, 기질과 출신배경, 피부색 등의 모든 차별과 경계를 넘어선다. 또한, 죄와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는 전 인류와 전 피조세계를 구원하고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능력이 실제로 나타나는 언어사건이다. 그래서 바울은 당시 전 세계의 주로 선포되던 로마 황제 가이사가 아닌, 나사렛 예수가 진정한 주임을 담대하게 선포한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 부끄러워하지 않는 복음은 과연 무엇인가? 로마제국에서 황제의 생일을 사람들은 ‘좋은 소식’즉 복음으로 환호했습니다. 절대 충성을 요구하는 절대왕권의 황제의 생일이 바로 좋은 소식의 내용, 컨텐츠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나의 복음’은 지금 황제의 생일을 맞이한 좋은 소식이 아니라 로마 황제보다 더 큰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관한 좋은 소식,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왕이시며, 마땅히 세계의 주이십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이 바로 복음이 아닌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바울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복음의 내용, 복음의 주인공이신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특별히 그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이유:
이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16절b)이라고 말한다. 복음은 세상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다. 복음은 인간의 통제 밖에 있으며, 심지어 교회와 성직자들에게서도 독립되어 있다. 복음은 하나님의 선포이고 행동이다.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사람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이다. 사람의 능력은 어느 정도인가? 인류의 역사와 문명의 이기는 굉장한 진보를 이뤄왔다.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스마트폰, 3D영화나 버츄어시스템으로, 컴퓨터로 이뤄진다. 앞으로 인간의 과학과 기술은 점점 더 진보할 것이다. 하지만 그 진보는 이제껏 축적된 모든 과학적 진보에다 플러스한 진보이지만, 무에서 무를 만들어낸 창조물은 아니다. 유에서 또 다른 유가 나오는 것이 인간의 기술이다. 그래서 사람의 능력은 조물주에 비해 제한적이다. 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도, 신이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서 태어났다는 것도, 그리고 아주 평범한 삶을 살다가 사람들의 손에 죽었다는 것도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대목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이후의 부활에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분출되어진다.
그렇다면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과연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미국의 실용주의pragmatism 철학자들이 던진 질문: 예수님 시대와 2000년이 지난 지금, 시간적인 간격이 있는데 말이다) 일단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고 생각할 때 말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고린도전서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이제 신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첫 열매의 뒤를 따라 다음, 다음, 다음의 열매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전제조건:
-모든(허용적 조건): 먼저 유대인에게/바울 선교의 복음센터는 대부분 회당이었다는 것은 이를 반증해준다, 유대인에게 우선순위가 주어졌다. 그들이 복음을 먼저 받았기에, 그리고 헬라인에게(16절c)
-믿는 자에게(제한적 조건)
: 복음이 효력을 가지는 범위는 바로 ‘믿음이 소유한 자’에 한해서이다.
감기약이 아무리 탁월해도 복용하지 않으면 아무런 효능이 없듯이, 복음 또한 그것을 믿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 복음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과연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구원의 믿음은 영적인 동의 그 이상을 포함한다.
우리가 영접기도를 할 때 마치 우리가 하나의 후원단체나 카드를 하나 만드는 것처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믿음은 후원단체의 후원금을 내는 것이나 카드를 사용하면 혜택을 누리는 것처럼 믿음을 생각할 수가 있다. 하지만 믿음은 단순한 동의나 후원금을 내고 연회비를 내는 것, 그 이상이다.
Ex)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미지의 땅으로 갈 때는, 미래를 모두 하나님의 약속에 걸었던 모험이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과 친척들의 목숨과 안전에 대한 아무런 보장도 없이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그 말, 단어들, 문장들, 언어들을 믿고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처럼, 믿음은 하나님께 헌신하고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조건은? 믿음이다!
초대교회 때 성도들은 ‘마라나타의 신앙’으로 살았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동아리를 가입하거나 헬쓰클럽의 회원권을 끊는 것과도 같은 오늘날의 현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 대한 핍박은 날로 드세어져갔다. 예수 믿기로 동의하면, 핍박을 감수하는 삶을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싶어도 핍박이 싫거나 지하무덤에서 사는 것이 싫으면 예수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모든 특권과 목숨조차도 내어놓아야 하는 실정이었다. 그 당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의 격리를 의미하며, 버림받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주민등록을 빼기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공적인 사회에서 살 수 없어서 지하 묘지인 카타콤(catacomb)에 들어가 살았다. 학교, 직장, 사업, 집을 다 버려두고 지하 동굴로 들어갔던 것이다.
Ex)오늘날 만약 예수님을 믿으면 신용불량자가 된 것처럼 카드를 사용할 수 없다거나 은행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어떨까? 굉장히 불편할 것이다.
왜 사람들은 이처럼 현재의 삶, 현실의 생활에 큰 불편과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였을까? 왜 어려움이 많은 생을 선택하며 복음을 받아들였을까?
그것은 바로 복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구원인가? 그 구원은 단순히 자신들이 불편한 지하감옥, 지하묘지인 카타콤의 생활을 청산하고 탈출하는 차원의 구출이 아니었다. 자신의 지고 있던 빚이나 채무를 없애주거나 감면해주는 구원이 아니었다. 불치병을 앓고 있던 사람이 자신의 병을 완치하게 되는 그런 구원이 아니었다. 물론 당사자들은 그게 구원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복음이 주는 구원은 더 크고 원대하며 영원한 것이다. 더 짧은 것보다 더 긴 것을 택한 사람들, 더 한시적인 이 땅의 삶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복음이 그것을 보장해 주었기 때문이다.
‘구원’은 바로 영원한 구원이다. 예수를 믿는 계기는 다양하다. 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이 병이 치유됨을 통해서 간혹 예수를 믿기도 한다. 암환자가 치유되는 것도 구원이긴 하다. 하지만 그 암환자도 치유되었지만 결국에는 죽는다. 부활한 나사로가 영원히 살아 있는가? 그 양반도 결국에는 죽었다. 그러나 복음은 궁극적으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으라!
복음은 복음을 듣는 자가 복음을 통해 자신이 죄인됨을 깨닫고, 자신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고, 모든 신뢰를 하나님께 둠으로,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 역사하는 통로가 마련된다. 궁극적인 면에서 볼 때 믿음까지도 하나님의 선물로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믿음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복음에 대한 인간의 신실한 응답을 강조하더라도, 구원 문제에 있어서 1퍼센트도 인간의 힘이 보태어진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구원은 100퍼센트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의 사역이다.
에베소서 2:8-9에서 이 점을 분명하게 지적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2.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17절a)
*하나님의 의는 과연 무엇인가? :
의라는 단어는 헬라어는 디카이오쉬네이고, 히브리어로는 체덱이다. 이 히브리어 단어는 우선적으로 윤리 개념이 아니라 언약 개념이다. 언약을 맺는다는 것은 양자가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것은 쌍방에 의무와 책임이 부과된다. 이런 관점에 볼 때, 의롭다는 인정은 일반적인 도덕 기준에서 흠이 없을 때가 아니라, 상호 관계에서 자기의 의무와 책임을 따라 행동할 때 받는다.
창 17: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사건은 하나님의 전례 없는 구원 행위이며, 하나님의 언약적인 신실하심의 최고 표현이다. 인류는 창조주와의 관계를 깨는 범죄를 저질러 타락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반역한 인간들을 향한 관계회복과 화해의 길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여셨다. 하나님은 자신을 인간으로부터 고립시키지 아니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 은혜로운 주로 행동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복음이 선포될 때 드러난다.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수용될 수 있다.
존 스토트는 의를 1신적 속성, 2신적 활동, 3신적 성취로 구분하여 설명하면서 이 가운데 의미를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것보다 이 세 가지의 의미를 모두 결합하여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란 죄인들에게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의를 주심으로써(의의 교환), 그들과 자신의 관계를 바로잡으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주도권이다. <하나님의 의>는 불의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우신 칭의, 의롭지 않은 자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방식이다.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 우리를 의롭다고 칭의하시고(신분, 속성), 복음을 통해 우리(죄인들)를 거룩하게 다듬어가시며(성화), 결국에는 거룩한 신분으로 하나님을 대면할 것이다(영화).
복음은 벌레보다 못한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영적 예술행위이다.
Ex)60년대 이야기, 서울대 출신의 교수, 학장, 총장. 엘리트중의 엘리트- 아들도 엘리트였는데, 결혼한다고 데리온 배우자라는 애가 바로 ‘자기집 식모’/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처녀였다. ‘기한을 정해놓고 기도해보자’
기한이 다 찼을 때 아버지가 아들을 불렀다. 그래도 아들은 막무가내로 결혼하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네가 기도하고 결혼하자고 한 애는 결혼해라!’고 했다. 그러자, 그때부터 공부시켜 중학교 검정고시 패스하고 명문대까지 졸업하고 지금은 그 집 며느리 신분의 현모양처가 되었다. 자기의 변화된 신분에 걸맞는 삶을 추구했기에 그 소녀는 변화되었다. 우리의 영적신분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결정이었다! 이 언약적 결정 앞에 순종으로 반응하라!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한다
복음을 선포하는 믿음은 곧 다른 이의 믿음을 불러일으킨다는 말씀이다. 여러분의 리더, 임원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여러분이 말씀을 선포할 때 그 말씀을 통해 믿음의 반응이 온다는 것이다.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함과 같다*합 2:4
오직 믿음으로: 이것에 실패한 대표적인 두 가지 경우:
1)유대교: 종교적인 행위/금식, 십일조, 할례, 안식일, 성경공부, 율법준수, 선행...
2)로마카톨릭: 많은 고행과 선행, 종교적 열심히 구원의 조건을 설정했다.
Ex)마르틴 루터의 경우/
아무리 종교적인 노력을 많이 해도 마음과 영혼의 만족이 없었다. 결국 오늘 롬 1:17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오직 믿음으로’구원 얻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로마의 성당 계딴을 무릎으로 오르면서 입을 맞추고 수많은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할 수 없었던 것이 말씀을 믿음으로 단숨에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Ex)존 웨슬리의 경우/
종교적인 선행과 금식과 기도, 감옥에 전도도 많이 했다. 심지어 선교사로 식민지에 가서 인디언들에게 전도하기도 했다. 그래도 영혼의 만족과 죄사함의 확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독일 계통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가서 누가 마르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것을 들었을 때,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자신의 모든 죄가 사함 받았고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것이 믿겨졌다고 고백했다. 구원받는 것을 오직 믿음으로만, 모든 자랑과 공로는 oUT!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예수님과 나 사이에 의의 교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즉 나의 모든 허물과 죄가 예수님에게로 넘어가고 예수님의 의는 나에게로 넘어오게 된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기도 하면서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EX) 동안교회 김동호 목사님의 2001년 경희대학교 캠퍼스에서 청년집회를 하면서 결단한 내용...청년사역에 대한 비전을 갖고 8일 만에 교회를 사임! 솔직히 안정된 목회사역을 뒤로 하고 비전 하나만으로 교회를 사임한 김동호 목사님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교인들은 갑작스럽게 닥친 일이라 술렁이기 시작하더니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김동호 목사가 큰 물주를 잡았더라. 백억을 받고 간다더라.’소문은 3백억까지 뛰었다. 결국 홈페이지에 해명 아닌 해명을 했다. 그러면 ‘정말 자신은 큰 물주를 잡긴 잡았다. 근데 그 물주는 이번에 처음 잡은 물주가 아니고 처음부터 꽉 붙잡고 있었던 물주이다. 바로 그 물주의 이름은 “큰 물주”가 아니고 “조물주”이다’저의 물주는 조물주입니다. 그것이 저의 작은 믿음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에서 인용된 이 믿음은 ‘에무나’인데 믿음으로 번역한다. 충실성, 신뢰성, 신실함을 의미한다. 오직 의인은 나의 믿음, 나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산다. 의인은 나의 신실함(주의 신실함), 그의 신실함으로 살 것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에무나에 붙는 접미어를 선택적으로 번역할 수 있다고 한다. 단순히 인간의 믿음으로 의인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 신실함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의인은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함으로써 언약의 의무들을 신실하게 수행하는 순종의 사람들이다. 에무나는 믿음이 아니라 각 사람의 신실함과 신뢰성에 초점을 맞춘다. 토마스 슈라이더, 103.
하박국의 상황은 비극적인 상황이다. 갈대아 사람들이 유다를 침략할 것을 알고는 하박국은 하나님께 항의한다. 불의한 민족으로 그래도 그들보다 착한 하나님의 백성을 멸망시키려고 하시는가? 아주 화가 단단히 난 하박국은 성루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삿대질을 한다. 하지만 그는 결국 고백한다. 오직 의인은 하나님의 신실함으로 살 것이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기에 그의 백성은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는 것이다.
하박국 3: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EX) 무화과나뭇잎이 마르고- 이 찬양은 굉장히 슬픈 노래이다. 울면서 불러야 하는 노래이다. 왜?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는데, 율동하면서 춤추면서 노래가 나오겠는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으로 인해 나라는 망하지만, 미래는 암울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의인들은 하나님의 신실함으로 인해 살 것이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복음을 붙잡으면 그 복음이 우리를 끝까지 붙잡고 책임질 것이다. 영원한 물주되신 조물주 하나님을 붙잡으라! 여러분의 인생이 비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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