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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로마서

로마서 1장 18-22절, 죽음에 이르는 병

by Message.K 2021.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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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장 18-22절, 죽음에 이르는 병 설교에 대한 썸네일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

 

 


개요-하나님의 심판과 이방인(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이방인)


18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남-모든 경건치 않음(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 하나님께 범죄:십계명 1-4계명
              -불의: 사람에게 범죄: 십계명 5-10계명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상처받은 사랑의 표현이다.
19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보여주심
20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만물에 보여주심-핑계치 못할 것이다.
21하나님을 알기를 거절함: 영화롭게X, 감사하지X-생각이 허망함, 미련한 마음이 어두움
22그래도 스스로 지혜있다고 교만--->어리석게 됨
23그 교만은 결국 우상숭배로 이어짐: 
   -하나님의 영광(썩어지지 아니함, 불멸)과 썩어질 것들과 교체하는 비극 연출.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상처받은 사랑의 표현

  EX) 대학 3년때 진짜 짝사랑했던 동기가 있었다. 한해 후배였는데, 내 이상형과는 거리가 있는 애였다. 짝사랑하다가 4학년 1학기 마치고 난 군대를 갔는데, 말 그대로 짝사랑에 그쳤다. 내가 맘에 안 든다 라기보다는 자신이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그런 말을 했다. 몇 번을 대시했는데, 늘 되돌아오는 말은 ‘안 된다’는 말이었다. 한번은 그렇게 거절을 당하고서 아파트 집에 들어와서 모든 문을 다 닫고 커튼도 다 치고 내가 했던 행동? 바로 오디오에 헨델의 ‘메시야’를 엄청난 소리로 틀어놓고 그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후에 메시야가 너무 좋아서 이걸 노래로 한 번 불러보자 싶어 도서관에 가서 그 악보를 전부 복사를 했다. 말 그대로 복사만 했다.

 

 


  누군가로부터 거절당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프다. 가슴이 저리고 눈물이 난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첫 단어,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께서 상처받은 사랑의 표현, 인류로부터 거절당한 하나님의 심장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17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와 반대됩니다.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짝사랑이 되어버리고 말았죠. 근데 단순한 짝사랑의 차원이 아니고, 인간은 완전히 하나님을 반역하는 죄까지 나아가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18-3:20에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류의 모습,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기 전, 죄의 권세 아래서 상실되고 폐기된 상태에 놓여 있는 인간의 절망적인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선교 경험에 기초한 것입니다. 

 

 

 


 죄는 죽음에 이르는 병

  죄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이방인은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이 눈에 뵈지 않는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하나님이 눈에 뵈지 않으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어리석게 된다고 합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근심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근심에서 더 나아가 죄는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죄를 짓기만 하면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불치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불경건과 불의
  1:19이하에 보면, 곧 온 세계가 창조주에게 속해 있다는 진리를 반대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반역죄입니다. 근데, 바울은 로마서 1:18에서 이 죄를 ‘불경건과 불의’로 정의합니다.


   -불경건sin: 하나님께 범죄(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접하지 않는 죄):십계명 1-4계명
  -불의sins: 사람에게 범죄(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하지 않는 죄): 십계명 5-10계명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께 죄를 짓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선포하며 살아갑니까? 불경건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짓는 죄를 말합니다. 21절에 보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의 왕좌에 두기엔 자신의 인생이 너무나 초라해 보이고 아까워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불경건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내 인생을 올인하기엔 내 인생, 내 청춘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기도를 하는 것도, 함께 모여 기도회나, 한밤의 기도회, 공적예배를 참석하는 것도 성가신 일로 둔갑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인데, 왜 하나님께서 자꾸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고! 

 

근데, 그 문제가  여러분만의 문제가 아니고 인류 전체의 문제입니다. 인류 자체가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을 거절하십니까? 영적이 욕구를 얼마나 잘 배제하십니까? 수련회나 기도회나 예배를 통해 받은 말씀대로 살려면 변화가 필요한데, 그 변화를 위해 무언가 시간과 물질을 투자할라치면 여러분이 하고 싶은 게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일, 하나님과의 관계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표가 안 납니다. 하지만 토익, 토플, 전공공부는 표가 납니다. 이성교제할 때 남친, 여친한테 잘 못해주고 자기 일에 바쁘게 살면, 카톡도 안 하고 전화도 안 하고 해보세요. 어떻습니까? 막 화내다가 


‘우리 그만 만나, 바이 짜이지엔! 사요나라!’


  그러지 않을까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는 관계입니다. 관계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입니다. 일주일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 번도 하나님께 대화를 하거나 말씀을 읽거나 그런 여지가 없이 주일날 와서 목사님 하는 설교를 듣고 있자니 주리가 틀립니다. 왜? 관계가 안되니 그렇습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여러분이 하나님보다 더 우선순위에 두고 사랑하고 애지중지하는 그것,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이 없다면 분명 하나님은 진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하십시오!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거절하면서도,‘스스로 지혜 있다 착각하고 어리석은’ 인생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 대해 진노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진노하십니다.


 
  왜 불의합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시기합니까?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 내가 너무나 많기에, 내 안에 가시가 너무나 많기에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서로 찌르는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자들이 서로 물고 뜯는 것입니다. 사람이 왜 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하지 못합니까? 다 병들어서 그렇습니다.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게 되고,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틈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도구, 양심

  왜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몰라라 합니까? 정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일까요?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복음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요? 하나님은 사람 안에 ‘양심’을 주셨습니다. 그 양심의 규범을 통해 자신이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도 자신의 양심에 따라 완벽하게 산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은 모든 자신의 죄에 대해 핑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길 기뻐하신다

  양심은 오늘 본문 19절에 나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통로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이 그들 속에 보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 혼자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왜냐구요? 바로 하나님이 자신을 알려주셔야 만이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시는 것을 우리는 ‘계시’라고 합니다. 계시하다는 말은 영어로‘reveal’입니다. ‘re’는 ‘다시, 벗기다’의 뜻의 접두사입니다. 즉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베일에 가려져 있는데, 그 베일을 벗겨주시는 것이 ‘계시’라는 의미입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아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구나!’하고 알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려고 끊임없이 계시하는 분이십니다. 

 


  존 칼빈이 쓴 ‘기독교 강요’의 첫 장 제목이 놀랍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나 자신을 아는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을 알면, 나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꾸로 나를 안다고 하나님을 알 순 없는 노릇입니다.   

 

 

 

 



 특별계시와 자연계시

  어릴 적 행방불명된 아이를 찾고자 노력하는 영화에 출연한 엄정화나 김명민이 분한 부모처럼, 하나님은 영적 미아와도 같은 우리에게 길을 찾아주고자 노력하십니다. 계시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특별계시와 자연계시가 있습니다. 특별계시는 말씀인 것이고, 일반계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해, 달, 별, 동물과 같은 자연을 보면서 ‘아, 창조주 하나님은 자연도 창조하신 위대한 분이시구나!’하고 하나님에 대해 조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계시입니다.
   제 휴대폰에는 우리 아이들의 사진이 많습니다. 근데 누군가 제 폰을 보고는 “정말 가족들 사진이 우연히 그 안에 담겨져 있군요. 참 놀랍습니다. 딸애 얼굴이 바탕화면된 것도 참 기가막힌 우연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물론 요즘 클라우드가 있어서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런 이야기는 상식 밖의 이야깁니다. 제주도만을 가도, 깊은 골짜기에 가면 들리는 물소리, 새소리, 바위와 꽃과 낙엽과 하늘색과 삼라만상을 보면서 이 모든 것을 누가 만들었을까? 그런 생각 자체가 바로 하나님을 알만한 ‘자연(일반)계시’, 즉 20절에 나오는 능력과 신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핑계할 수 없는 인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든지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셨습니다. 
19절: 보이셨느니라, 

20절: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20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에 대한 명백한 계시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그 결과가 다음주에 1:24-32에 나옵니다.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결과는 여러 가지로 드러납니다.

 


  첫째, 허망함입니다. 
  인간의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지각없는 마음으로 어두움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1:21b). 하나님의 지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치 아니하고 영화롭게도 아니하는 그러한 삶,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삶들의 결국은 언제나 ‘허망함’이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허무의 쓴 잔’이다. 그 허무가 또 다른 허무를 낳는다. 그들의 생각imagination은 언제나 헛되고 헛될 뿐이다. ‘디아로기스모스’는 언제나 허탈할 뿐이다. 이러한 것은 또한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적인 통찰과 시안이 부실해지고 결여되어진 자들에게 보이는 것은 ‘어리석고, 어둡고, 허망할 뿐’이다. 이것은 객관적인 바울의 분석입니다.

  세계사를 들여다보면, 인류는 르네상스, 산업화 이런 것들이 이어지면서 굉장히 남다른 자긍심을 가지게 됩니다. 인간은 너무나 대단한, 탁월한 존재이구나! 잠재력이 장난이 아닌 것입니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을 한 번 보십시오. 그 엄청난 대작들이 어떻게 인간의 내부에서 나온단 말입니까? 그게 인간입니다. 그 인간의 대단함에 취해 있을 무렵, 하나님은 인류의 뒷통수를 힘껏 치십니다. 바로 1,2차 세계대전입니다.

 

 ‘너희가 대단한 존재라고? 웃기지 마라! 너희는 허물과 죄로 죽은 존재이다.’ 

 

그 인류는 두 번의 큰 전쟁과 원자폭탄 투하라는 엄청난 결과물 앞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자존심이 땅바닥에 쳐 박히는 순간입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던 중세시대에는 그래도 낫습니다. 하지만 인문주의와 르네상스가 들어오면서 높아진 인간의 위상은 이제 추락하는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 전쟁은 끝이 안 보이고, 사람은 한 없이 죽어나가고, 원폭피해자들은 자손대대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한 반역의 댓가는 매섭습니다. 허망함, 그 자체입니다. 
  내 인생이 왜 이렇게 허무한가? 그런 질문을 하며 한숨 지을 때가 있나요? 그 마음의 구멍은 누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돈, 섹스, 우정, 사랑, 권력, 자동차, 집...물질...한번 메꾸어보십시오. 메꾸어지는지...솔로몬이 고백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그 양반은 이스라엘의 황금왕조의 최고의 권력가였고, 아내도 천명이나 있었고, 문명과 지혜가 탁월한 인물이었고, 인기도 많았습니다. 이웃나라의 여왕도 와서 그의 지혜를 보고 감탄해가고 그랬습니다. EX)시바 여왕이 보물을 주고, 받아간 것은? 솔로몬의 씨! 였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인생, 인간의 수하에 있는 것이기에 모든 것이 허망한 것이라고 그는 고백합니다. 거리에 있는 거지가 이런 이야길 하면, 혀를 차고 비웃겠지만, 최고로 잘 나가는 인류 최고의 지혜자가 드러낸 통찰입니다. 



 EX) 알베르 카뮈는 허망과 부조리를 잘 토해 낸 작가입니다. 그의 작품,‘시지푸스의 신화’에 보면 시지푸스는 시종일관 큰 바위를 아래에서 올렸다가 다시 내리고, 올렸다가 다시 내리고 반복하기만 합니다. 허망하기 짝이 없는 인생! 그게 인생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없다면, 그리스도가 없는 생인 바로 이러한 지루하기 짝이 없는 허망함이 아닐까 싶네요. 그는 허망의 작가로도 유명한데, 그의 마지막도 참 허망했습니다. 최고의 영예인, 노벨문학상을 받으러가는 길에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늘 노래했던 허망을 자신의 마무리로 표현한 살신성인(?)의 작가! 사람은 정말 어떤 노래를 부르느냐에 따라 자신의 인생의 질이 달라집니다. 

 

 


 EX) 김광석 - 대학다닐 때 진짜 많이 불렀다. 대학가요제에 나갔다가 떨어졌을 때 부른 곡이 ‘사랑했지만’이었다. 그 노래를 들으면 쫘악 가라앉는다. 슬픔의 비극미가 느껴진다. 그 사람의 가슴의 한과 아픔, 이별의 상처가 전달되는 듯...그냥 한 번 듣고 털어버려야 할 노래의 가사이다. 애들을 목욕시키면서 이 음악을 틀어놨다가 애들에게 혹시나 안 좋은 영향을 끼칠까봐 음악을 끈 적이 있다. 김광석은 그렇게 한과 아픔과 상처를 노래하다가 목을 매 자살을 했다. 아내와 자식을 남겨두고. 그 친구 불교방송의 DJ였단다.

 

 

 


  둘째, 교만함의 어리석음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지혜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게 됩니다(1:22). 인간은 자기 자신이 독립적으로 살 수 있다고 자부하지만, 절대 불가능합니다. 피조물은 조물주의 통제 하에 있어야 가장 자기 실력을 잘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존재가 흙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인정해야 겸손할 수 있습니다. EX)막내 가 인제 눈에 보이는 것을 입에 넣어 먹으면서 맛을 알아가는 중에 부모가 먹는 것이라면 무조건 들이댑니다. 하지만 아무것이나 먹어도 될까요? 부모의 통제하에 있어야 아기가 안전할 수 있듯이 인간도 하나님의 보호하에 있어야 안전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지혜있다고 우쭐한 경험은 없습니까? 넘어질까 조심하십시오. 피조물은 조물주의 자리를 인정할 때 빛이 납니다.

 



  셋째, 우상숭배입니다.
  23절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그 빈자리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썩어질 우상들을 대치하여 섬기고 경배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보면,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이제 그 사람의 마음이 완전히 청소되었습니다. 근데 인제 깨끗케되니, 오히려 그 다음에는 더 강력한 귀신이 귀신들렸던 그 마음을 차지하려고 했던 것을 우린 보았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왕좌에 하나님이 부재중이 되면, 누군가 그 마음의 왕좌에, 그 좌소에 앉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마음에 모십시오! 하나님을 여러분의 중심에 모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만약 그 왕좌를 비운다면, 다른 무언가가,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릴 차지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우상숭배의 시대

  옛날 사람들은 돌이나 나무 등, 그 무언가 만들어진 신을 섬겼지만, 현대의 우상은 리챠드 포스터의 말처럼, ‘돈, 섹스, 권력’이 고개를 듭니다. 현대는 오락이 우상이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웃기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시대, 유머감각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습니다. 19금이라도 웃기면 됩니다. 못 생겨도 유머감각이 있으면 ‘요물’이 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불륜소재의 드라마라도 재미있으면 허용됩니다. 사람은 ‘보고 배우는’ 존재입니다. 제가 말 안 들으면 ,우리 애들에게 한 번씩 소리치는 것이 이제는 역으로 되돌아옵니다. 자기들이 아빠보고 소리칩니다. 자식은 참 희한합니다. 뿌리고 심은 대로 거둡니다. 

 


 EX) 신문기사에 ‘따뜻한 불륜’이란 문장이 나왔습니다. 불륜도 따뜻한 이야기가 될 수 있나요? 참 대단한 포장기술입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불륜입니까?’ 안방극장의 드라마의 소재가 평범하면 재미가 없으니 막장드라마로 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도 막장으로 치닫는 것이죠. 생각의 산물인 문화컨텐츠를 보고 자라는 우리 다음 세대는 안 봐도 비디오입니다. 창조 질서와 가족의 질서를 깨고 뭉개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따뜻한 불륜’이라니! 기형적인 상상력의 파괴력이 심각합니다! 

 

 

 



  오락이 신이 되어가는 오늘

  하나님의 형상이길 거부하고 오히려 동물의 모양, 즉 자기보다 더 낮고 별 볼일 없는 것에 취하거나 집착하고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절대 하나님이 될 수 없기에, 무언가를 섬기며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스스로 조작해 놓은 신들로 대체합니다. 오락이 신이 되어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오락프로그램이 얼마나 많이 등장하는지. 다 챙겨볼래야 볼 수 없는 시대. 

 



여러분, 죄는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불경건과 사람에 대한 불의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결과로 허망함과 교만함과 우상숭배를 가져왔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 하나님께 여러분의 인생을 드리십시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상처받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던 이방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아는 지식으로 생명에 이르는 약인 복음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을 가슴에 소유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를 완전히 살리고 구원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의로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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