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로마서

로마서강해 1장 1-6절, 바울과 복음

by Message.K 2021. 9. 30.
반응형

로마서 1:1-6 바울과 복음 설교에 대한 썸네일입니다
바울과 복음



로마서는 성경 연구의 출입문이자 복음이해의 열쇠라고 할 수 있다. 



서론/1:1-17, 로마서를 기록한 이유와 목적 
본론/1:18-15:31, 복음의 내용
결론/15:14-16:27, 로마서를 기록한 이유와 목적 

 

 



바울은 결론에서도 로마서의 기록이유와 목적을 밝힌다. 
바울은 10년 동안 로마제국의 동부 지역인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주요 도시에 복음을 전했다. 바울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로마제국의 서부 지역도 복음화할 계획을 밝혔다. 

 


15: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바울은 스페인 선교를 염두에 두었다. 그러기 위해선 선교후원이 필요했고, 스페인선교에 앞서 먼저 로마교회를 방문하려고 한다. 로마교회는 1:7에 말씀에서와 같이 3-5개의 가정교회들로 나뉘어 모임을 갖고 있었다.  16:3,5; 16:10; 16:11; 16:14; 16:15

 


로마제국의 동부지역선교의 가장 강력한 후원교회: 안디옥교회
로마제국의 서부지역선교의 가장 유력한 후원교회: 로마교회 

 


15:24 이는 (스페인으로)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스페인)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이처럼 로마서를 실제로 기록한 목적은?

 바울이 예루살렘과 로마를 거쳐 스페인으로 가는동안 로마교회를 방문해서 성도들의 영적 성숙을 돕고, 로마교회의 성도에게서 재정 후원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로마서는 스페인 선교를 위해 로마 교회에 보낸 ‘선교후원편지’였다. 바울은 위대한 신학자이기도 하지만, 위대한 선교사였음을 기억하자! 

 


  바울이 쓴 성경은 로마서 외에도 12권이 더 있는데, 어떻게 로마서가 복음을 가장 체계적으로 기록한 편지가 되었을까? 바울이 쓴 13개의 편지들의 기록 시점과 목적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1차 선교여행: 갈라디아서-터키 선교 2년 
2차 선교여행: 데살로니가 전.후서-그리스 선교 3년
3차 선교여행: 고린도전.후서 로마서-에베소에서 보낸 4년


 


*B자신이 선교한 교회에 발생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기록한 편지
그러나, 로마서는 아직 바울이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로마교회에 기록한 편지이다. 로마서는 바울 신학 소개서이다. 바울은 아직 만나보지 못한 교회에 자신을 소개하고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을 담아야 했다. 
  이후 바울은 예루살렘에 갔다가 잡혀 로마로 압송된다. 그리고 로마감옥에서 옥중서신(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교회와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낸다.)
 로마서는 3차여행이 끝나는 시점에 기록했다. 

 

 


  기독교와 타종교가 다른 점은 복음에 있다. 기독교는 복음을 믿고, 복음을 전한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되고 난 이후 가장 많이 듣는 단어중 하나가 바로 복음이다. 그런데 오늘날 복음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정확히 답변하는 일이 많지 않다. 로마서는 복음이 무엇인지 가장 체계적이며 조직적으로 설명해준다. 바울은 로마서의 서론을 기독론적 관점과 구원론적 관점에서 복음을 개관적으로 설명한다. 

 



  바울은 매우 친근한 어투로 편지를 시작한다. 인칭 대명사와 소유 대명사(나, 나를, 나의)가 이 첫 구절들에서 스무 번 이상 나온다. 그는 처음부터 독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를 간절히 원한다. 서론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각 부분은 ‘바울과 복음’(1-6절), ‘바울과 로마인들’(7-13절) 그리고 ‘바울과 복음 전도’(14-17절)라고 부를 수 있다/존 스토트, BST시리즈-로마서 강해, 정옥배 역(서울: IVP, 2003), 48.

 

 

오늘은 1:1-6까지만 해도 벅찰  같다.

 

 


 

  바울과 복음 1:1-6

1 바울의 정체성-1.1, 1.2, 1.3
2. 복음-2.1 미리 약속된 것, 2.2  그의 아들에 관한 것
3. 복음의 주인공은 그리스도,  육신의 혈통
4. 그리스도-성결의 혈통
5.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그로 말미암아,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순종케 되었다!
6. 너희도 그들 중에 있다!


 

 
 바울은 서신을 쓸 때마다 자신의 사도권에 대하여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서술한다. 이 점은 바울과 한 번도 면식이 없는 교회에게는 훨씬 더 중요하다. 이 서신의 서론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것은 ‘복음’이다. 도널드 거스리, 사도들The Apostles, 이상원 역(서울: 아가페, 1998), 317.




1:바울의 정체성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구약의 ‘여호와의 종’이란 표현에 기초한다. Ex)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다윗...‘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으로 예수가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임을 강조한 성호.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라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의 준말. 김경섭 편, 프리셉트 성경(서울: 프리셉트, 2003), 신약 239.

 


 바울은 여기서 ‘종’이란 말은 쓰고 있다. 바울 당시에는 ‘종’이 어떤 위치와 신분이었는지 잘 알고 있다. 요즘처럼 ‘주의 종’이란 말을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지만 그 이미지는 아주 고매하고 성직자다운 면모의 이미지이지 고대 사회에서 보여준 ‘종’의 이미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잔심부름 시키는 대로, 명령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치였다. 거기에는 자신의 밥벌이와 생계가 달려 있었다. 그 명령체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자신의 직업, 생계, 더 나아가 목숨까지도 좌지우지되는 그런 위치였다. 종, 노예 란 이미지는 현대에 있어 어울리지 않는 제도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사용되는 곳이 바로 ‘교회’라는 종교적인 사회이다. 그 안에서는 ‘주의 종’이라는 말은 시도 때도 없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감지하고 있는가? 바울이 이야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그 느낌과 뉘앙스와는 분명한 갭gap이 존재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바울이라면 그렇게 했을까? ‘종’은 말 그대로 종일 뿐이다. 노예일 뿐이다. 때깔 좋고 맵시 나고 돈키호테(돈 많고, 키 크고, 호탕하고, 태가 나는)에다 하고 싶은 다 하고 누리고 싶은 것 다 누리고 그런 삶은 ‘종’의 삶이 아니다. ‘종, 노예’의 삶의 치열하다. 살아남기 위해선 발버둥을 쳐야 한다. 등 따시고 배부른 종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일평생 왕으로 사신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청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당시 천하고 보잘 것 없는 직업에 속하는 ‘목수’의 직업을 가진 가정에서 자랐고 거기서 목공소 일을 배울 뿐이었다. 그에게 무슨 왕의 흔적이 있는가? 그의 옷차림에서도, 말투에서도, 기품에서도, 행색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면 그가 30대를 지났을 때,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였을 때 그런 모습이 드러났는가? 3년 동안 이스라엘을 돌아다니면서 왕으로서 모습을 보여줬는가? 보여주지 않았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셨지만 그는 십자가에서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었다. 예수님은 메시야이셨다. 왕이시며, 제사장이시며, 선지자이셨다. 왕, 제사장, 선지자의 그 모든 직분을 그는 ‘종’의 모습을 통해 구현하셨다. 그는 왕이셨지만 사람들을 부려 먹지 않았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하시지 않았다. 

 

 


  왕이자 제사장이자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메시야의 사역을 그 어떤 자리나 위치보다 낮은 ‘종’이라는, ‘노예’라는 자리에서 담당하셨다. 그 종의 자리는 이사야 53장 [사 53:1-사 53:12](쉬운 성경을 참조하라!!!)

 

(1)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2)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3)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7)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8)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9)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10)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11)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12)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전장에서 잘 드러나 있다. 
  진짜 요즘 같은 현대에 ‘종’이라는 말은 ‘생뚱맞은’ 이야기이다. 한 번 대박 나서 멋지게 떵떵거리며 살고 싶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조명발 속에서 폼생폼사하는 것이 생리인 것이 요즘 시대이다. ‘종’이란 말 보다 조금 더 고급스럽고 멋스런 단어가 바로 ‘비서Secretary’이다. 비서란 말이 더 듣기 좋다. 하지만 예수님은 ‘비서’, 하나님의 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 자신을 버리셨다.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다. ‘고난 받는 종’ 그 자체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일들, 종의 일들을 ‘예수님’이 다 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청산해야 할 모든 일들을 주님께서 다 하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갚아야 할 빚, 우리가 청산해야 할 죄값, 우리가 고민해야 할 모든 고민들과 문제들, 우리의 삶의 모든 무게들...다 주님께서 ‘종’으로서 감당하셨던 것이다.

 


  바울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누가 정상인가?
  그는 자신이 그렇게 못살게 굴고 핍박했던 ‘예수’를, ‘예수 믿는 사람’을 찾아서 잡아 죽이는 짓까지 했던 그가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나서는 ‘그의 종’이 되었던 것이다. 바울이 예수님을 잘못 만난 것인가? 바울이 다른 사람을 만나고 나서 예수님을 착각했던 것인가? 바울이 정작 그 종의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후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인가? 

 


  그렇다. 그는 예수를 만났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리고서 그는 자신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한다. 
  나는, 우리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까? 옆 사람과 이야기해보자, 시작! 

 

 

 

 


1-2: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란 정체성 외에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한다. 

  바울은 솔직히 12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뒤늦게 경험한 인물이다. 그는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 만나 변화된 인물이다. 
  바울이 스스로를 ‘종’과 ‘사도’라는 두 가지 칭호로 부른 것은 이 단어들을 서로 대비시켜 볼 때 특별히 인상적이다. 


  첫째로, ‘종’이란 매우 겸손한 칭호이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께 구속받아 그 분에게 속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권리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으로 ‘사도’란 대단한 권위를 나타내는 칭호였다. 그 표현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임명을 받았기 때문에 공식적인 특권과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음을 나타냈다. 


  둘째로, ‘종’은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단어인(모든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셔야 한다)반면 ‘사도’는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칭호이다(예수 그리스도와 바울 그리고 야고보와 같은 다른 한 두명 정도만이 그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는 사도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 존 스토트, 50-51.

 

 


  -우리는 바울처럼 사도로는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종’은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누려야 할 특권이요, 권세와 책임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부르심에는 적당히 둘러 대고 적당히 자신의 안전과 안녕을 도모하면서 ‘등 따시고 배부르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절대 아님을 기억하자. 주님이 언제 이 땅에 오시는가? “온 세상에 복음이 다 전해진 후에야 주님의 재림이 임하신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그리스도인의 부르심과 그 부르심에 따른 책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1-3: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특별히 선택되었습니다’(쉬운 성경)
 


  택정: 아포리조, 한 쪽으로 구분해 두다-구원을 위해 따로 구분해 두신 하나님의 예정을 뜻한다. 프리셉트 성경, 신약 239.
 그러기에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는 불가 분리하게 결합되어 있다. 존 스토트, 51.

 


 내가 기독교 사역자로, 목회자로 서간다는 것, 더 나아가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특별히 선택되어진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 복음에 대해선 2-4절까지 잘 설명하고 있다. 

 



 -복음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바탕이 있어야 기독교 사역이 가능하다. 문득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나는 이 복음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고 이 복음만이 세상을 살릴 수 있고 이 복음만이 교회를 교회되게 한다는 것에 확신과 신념과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복음만이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 하나님께서 교회로 우리를 부르신 것은 복음 때문이다. 어떤 일이나 사역을 잘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복음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복음에 의해 살고 복음을 위해 살고 복음을 의지해야 한다. 

 

 


  시대와 세대와 기술과 문화가 끊임없이 변해간다. 그 변화를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1년, 2년이 급박하게 변하게 되어 진다. 청소년들을 바라볼 때 그러한 생각이 정말 많이 든다. 내가 그들의 변화의 스피드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나는 이제 골동품으로 전락하기 일보 직전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커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복음이다. 이 복음의 능력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사역을 집어치울 수밖에 없다. 대안이 없다. 우리 기독인들에게 이 무기를 제외하면 무슨 비밀 병기가 있겠는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바울을 부르셨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나를 부르셨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 

 

 

 



2: 복음
2-1: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다.

 


  내가 길을 가다가 100만원 지폐뭉치가 든 가방을 주웠다고 치자. 주인을 찾아 줄 수가 없는 상황에서 경찰서에다 갖다 줬더니 주인을 찾을 길이 없으니 그냥 습득한 나더러 그 돈뭉치를 가지라는 것이다. 나는 그럴 수 없다고 했지만 경찰서에는 그 돈을 찾아줄 도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경찰서에서 양심적으로 그 돈을 관리할 수 없으니 돈을 습득한 마음 착한 나더러 가지라는 것이다. 나에게 이것은 하나의 ‘행운’이었다. 나는 이 100만원을 내 맘대로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공짜’였다. 소위 말하자면 ‘재수’였다. 우리가 흔히 복음이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것이라 하여 ‘재수’라고 생각할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맞다. 재수!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가진 이 복음은 내가 길 가다가 100만원의 돈뭉치를 우연히 줍는 행운과 같은 그런 ‘우연의 산물’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Ex)저는 생각지도 못한 영문학과를 전공하게 되었다. 부모님의 교단이 아닌 다른 교단을 선택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정말 우연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지 않았는데 어쩌다가 보니 예수님께서 구원자의 길을 걷게 된 것도 아니다. 
이 복음은 ‘약속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과 신약의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로부터 성경에 미리 약속된 것이었다. 복음이 ‘약속의 산물’이고 ‘계획의 산물’이고 ‘목적의 결과’이다. 결코 ‘우연스런 현상’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철저한 약속’의 실체reality이다. 

 

 


  바울은 이 구약성경과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성에 대해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구약 율법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박학다식한 지식을 겸비한 학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전에 무엇보다도 구약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연결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스데반을 죽이는 사악한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가 복음을 제대로 알고 난 후에 그는 구약성경과 예수님의 관계가 불연속성이 아닌 연속성의 견지에서 밝히 보여야 함을 명백하게 깨달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 미리 약속된 인물이며 우리의 주요, 메시야요, 구세주이신 것이다!!! 할렐루야!

 

 



2-2: 이 복음은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약속의 실체’이다. 이 복음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복음은 예수이다. 예수님에 관한 것이 복음이다. 다른 어떠한 것도 이것을 대체할 수 없고 대신할 수 없다. 교회가 성장하고 교회가 많아지고 교회가 다양해지고 교회가 많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바로 ‘복음’이고, 그 복음 안의 중심은 바로 ‘예수’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다. 여기서 요셉의 아들, 예수의 인성적인 면을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왔고 그 아들이 감당하였던 그 모든 것들이 바로 복음인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특별한 것으로 복음을 설명하여선 아니 된다. 복음은 바로 예수이다. 그 예수에 대해선 3-4절에 나타나 있다.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이다. 

 

 

 

 


3-4: 복음의 주인공은 그리스도
3-1: 그리스도는 육신적으로는 다윗의 혈통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다윗의 혈통으로 출생하신 것은 그가 가장 보기 좋은, 때깔 고운 가문인 왕족의 계통을 이어받기 위해 그렇게 오신 것이 아니라 2절에 하나님의 선지자들로부터 끊임없이 약속하였고 예언하였던 대로 성취된 결과이다. 모든 것이 약속대로 되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약속의 모자이크가 하나도 이가 빠진 것이 없이, 하나도 수가 틀린 것이 없이 꼬옥 들어맞게 약속도 지켜진 것이다. 
  칼빈은 말했다. ‘복음 전체가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부터 한 발자국이라도 이동한다면 그것은 복음으로부터 물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 스토트, 53. 

 

 



4-1: 그리스도는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 시편 2:7.
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게다가 이 유일 무이하신 분, 다윗의 씨이며 하나님의 아들, 연약하며 능력 있으신 분, 성육신하시고 높이 올리우신 분은, 바로 우리 삶을 소유하시고 통치하시는 우리 주 예수(인간적. 역사적 인물) 그리스도(구약 성경의 메시아)이다. 아마도 예수님을 가리키는 두 가지 칭호인 ‘그리스도’와 ‘주’라는 말은, 특별히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각각에게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일 수 있다. 존 스토트, 56.
시니라

 


예수? 헬라어는 히브리어로 여호수아이다. 구약의 여호수아는 곧 신약의 예수님에 대한 모형이다. 
여호수아: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감, 
예수님: 하나님의 백성을 천국으로 데리고 감
그리스도(메시야)-->기름부음받았다? 요즈음 말로 하면 하나님께 임명장을 받았다는 말이다.

왕/ 예수님은 왕으로서 죄와 죽음, 사탄을 물리치고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며, 우리와 온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다
선지자/ 예수님은 선지자로서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셨다.
제사장/ 예수님은 제사장으로서 우리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제물 삼아 하나님께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

 



  교회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님이 구약 성경에 약속된 그리스도이며, 예수님을 우리를 죄와 죽음과 사탄에게서 건져주기 위해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고, 우리 의를 위해 부활하신 분이심을 믿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이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성령과 말씀으로 우리에게 계속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는 선지자적 사역을 하고 계시며,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 중보해주시며, 또한 왕으로서 교회와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 분임을 믿는다는 것이다. 

 


 
 주라는 말은 보통 종이 주인에게, 신하가 왕에게, 부인이 남편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제자가 스승에게 쓰는 존칭이었다. 주라는 말은 ‘신들’에 대한 일반적인 명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고전 8:5). 그래서 로마황제숭배를 하는 문맥에서 황제를 ‘주’라고 부를 때는 로마황제를 신격화하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결정적인 배경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여호와’하나님의 대명사로 사용된 용법에 있다. 유대인들은 구약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너무나 거룩하기에 그 이름이 나올 땐 ‘주’라는 말로 바뀌어 사용했다.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 성경을 번역한 70인역에서는 여호와라는 말을 천 번 이상 ‘주’라고 번역했다. 그러므로 부활 이후 높임을 받으신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내용을 예수님께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EX) 부활한 주님을 보고 도마가 고백한 말?


예수님이 ‘주’로 정식 취임한 것은 부활 승천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을 때였다.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러기에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의 주 되심을 드러내야 한다. 
시간과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주가 누구인지를 잘 알 수 있다. 예수님을 주라 부르는 것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즉 생명, 건강, 재능, 시간, 물질 등이 모두 예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며 사는 것을 말한다. 

 

 

 

 

 


5: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
5-1: 그로 말미암아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바울이 자신이 편지를 쓰면서 고백할 수 있는 이 모든 것, 이것은 뒷부분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5-2: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것을 이야기한다.
  -은혜...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듬뿍 받은 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로 살아감을 명심해야 한다. 그는 원리원칙에 의해 가말리엘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화려한 프로필로 자신의 모든 것을 대변할 수 있는 자신만만한 율법학자였다. 이런 스타일의 사람들, 인생의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화려한 인물들에게는 은혜라는 것이 크게 다가올 리가 없다. 

 


  필립 얀시는 오늘날의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은혜’라고 하였다. 바울은 율법학자였기 때문에 율법에 의해 살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율법은 은혜가 아니라 비은혜의 냄새를 풍긴다. 그의 이러한 율법에 의해 철두철미함 때문에 그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잡아서 죽이는 극단적인 열심까지 품었던 것이다. 그에게 은혜는 눈 씻고 찾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 은혜가 찾아왔던 것이다. 초대교회의 신실한 종이었던 스데반을 죽이는 비참한 죄의 실상을 모른 체 다메섹도상을 걸어가다가 은혜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우리는 은혜를 앞서도 이야기하였지만 공짜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필립 얀시가 이야기한 것처럼 은혜는 베푸는 자의 부담으로 값없고 조건 없이 거저 온 것이다. 필립 얀시, 윤종석 역,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서울: 두란노, 2001), 27.

 

 


은혜는 분명히 공짜이다. 받는 사람의 입장에선 분명히 공짜이다. 하지만 은혜를 베푸는, 은혜를 주는 자의 입장에선 전부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주는 자에게는 분명한 손해가 있고 아픔과 상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가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은혜의 크기도 커지는 것이 아닌가? 은혜를 받는 사람은 조건 없이 선물로 받는 것이지만 은혜를 주는 사람은 은혜를 받는 사람에게서 받은 모든 손해와 손상과 아픔들을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 있다. 그래서 은혜는 ‘베푸는 자의 부담’이 있어야 말이 된다. 예를 들어, 하나님 아버지에게 아들이 많이 있었다고 상상해 보자. 아들이 12제자의 수처럼 12명이 있었다면 그 12명의 아들들 중에 장남이 예수님의 일을 감당했다고 치자. 11명의 아들들이 남아 있다. 굉장히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하나님에겐 큰 아들을 잃은 것이다. 하지만 마치 야곱이 요셉을 소년시절에 잃었던 것처럼 아들을 잃은 아픔이 크긴 하겠으나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께서는 큰 아들을 잃은 아픔이 조금은 완화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은 독생자이셨다고 했다. 유일무이한 아들 하나,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셨다. 우리가 자주 부르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에서 정말 우리는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큰 부담, 바로 ‘독생자 예수님을 잃게 된다는 부담감’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은혜’가 우리에게 나타난 것이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용서와 은혜가 봇물 터지듯이 나타나지만 정작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은혜 보다는 비은혜가 더 가득하다.

 

 



  은혜는 말 그대로 자격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그 어떤 상급이 아니라 자격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다. 모든 치유와 용서와 성화의 아픔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놀라운 은혜를 알게 되었고 이 은혜를 알게 됨으로 말미암아 사도의 직분을 받게 된 것이다. 
  -사도의 직분...바울은 자신의 사도의 직분을 대부분의 서신서에서 먼저 이야기한다. 그것은 자신의 자랑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의 속죄의 한량없는 은혜를 드러내주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그가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주인공’으로 말미암음이다.

 

 



5-3: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되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들였다. 그것으로 인해 그는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 바울은 자신에게 머물러 있지 않고 더 나아가 ‘우리’로 나아간다. 여기서 바울은 모든 이방인들-믿지 않는 자들을 지칭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겠다-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이러한 믿음은 순종함을 목적으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는다면 그와 그의 가르침에 순종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순종하는 이유는 또 다른 대의명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이름을 위하여’ 순종하는 것이다. 세상에 무수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자신의 명성, 자신의 입김과 자신의 입지와 자신의 자리에 대한 만족감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성공을 위해 달리고 또 달린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과 자신의 자녀와 자신의 직장과 자신의 모든 것들 위해 달리고 또 달린다. 하지만 바울은 ‘우리가’-여기서 우리는 바울과 ‘로마에 있는 부르심을 받은 성도’(V.7)를 지칭하는 듯-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믿음’과 ‘순종’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기독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가 바로 믿음과 순종이 아닐까? 
  특히,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여주는 중요한 삶의 핵심가치이다. 여기서 헬라어도 ‘목적격’ [현대인의성경]롬 1:5 우리가 그분을 통해 은혜와 사도의 직책을 받은 것은 모든 나라 사람들이 믿고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계획에 철저하게 순종하였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실만하거든 옮기시옵소서’라고 자신의 솔직한 심경을 허심탄회하게 기술했다. 이러한 기도는 우리의 기도의 솔직성으로의 변화를 촉구한다.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려고 말만 내뱉는 식의 기도에 하나님은 질식하실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솔직한 고백과 아울러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의지이다. 마 26장에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처절하게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모습 

 

(마 26:39)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 26:42)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을 보여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두 번씩이나 자신의 솔직한 심경을 고백하며 고난의 잔, 십자가를 지기를 거부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솔직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감정대로 살기를 미루시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했다는 것이다. 이 기도는 그가 자신의 감정과 원대로 살아가기를 좋아하며 순간적인 욕구를 참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오늘날의 우리들과 다른 점이다.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순종에 대한 헌신’, ‘순종의 의지’였다. 


 중요한 것은 ‘순종’이다.

 

 


-우리는 얼마나 순종하는가? 한국 기독교인들의 문제는 바로 ‘믿음’과 ‘순종’의 비연계성이다. ‘믿는다’는 것은 ‘순종한다’To Believe is To Obey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믿는다는 것은 고백한다는 말의 차원에서 머무를 때가 많다. 순종한다는 것은 그 말, 고백처럼 살겠다는 의지적 차원에서의 헌신을 말한다. 우리는 순종이 너무나 약하다. 바울 당시, 바울을 비롯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켜가고 있었다. 존 머레이가 말하듯이, ‘사도의 직분을 통해 촉진시켜야 했던 복음은, 일시적인 감정의 은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의 진리에 전심을 다해 헌신하는 것이었다’ 존 스토트, 58.
 존 스토트는 ‘복음의 목적은 순종이다’ 존 스토트, 57.
라고 못 박고 있다.

 

 


  바울의 사도적 소명은 모든 민족들로 ‘믿어 순종하게 하는 것’이다. ‘믿어 순종’이라는 말은 헬라어를 직역하면 ‘믿음의 순종’이다. 이 구절은 결론적인 문장인 로마서 16:26의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려고’에도 나타나는 아주 중요한 표현이다. 그러면 믿음과 순종은 어떤 관계인가? 많은 학자들이 믿음이 순종의 기초라고 이해. 곧 순종은 믿음에서 흘러나온다. 이것은 ‘믿음의’를 근원의 소유격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순종을 개종 이후의 행동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달리 말하면, 믿음이 먼저 오고 그 다음 단계로 순종이 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순종은 믿음과 동시에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는 것은 개종과 동시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믿음과 순종의 결합은 윤리적인 의미보다는 종말론적인 의미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이전의 반역 행위를 중단하고 주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순종해야 하는가?


 첫째, 우리가 순종해야 할 대상이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순종해야 할 대상은 부모, 친척, 형제, 자매, 상급자, 권위자 등이 아니라 바로 창조주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둘째, 주 예수 그리스도는 평생 철저하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아들이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음을 받아들였고 은혜를 받았고 직분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순종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순종하는 것이다. 그가 불순종하면서 우리에게 순종하라고 한다면 그만큼 역겨운 것은 없을 것이다. 

 


  여러분은 얼마나 순종하고 있는가? 복음에 순종하고 있는가? 성경의 진리에,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 더 가까이 있는 여러분의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 컴퓨터가 명령하는 시스템과 명령에는 너무나 잘 순종하면서 사랑하는 부모님의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는가? “그의 이름을 위하여” 순종하라!
 바울이 순종해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이다.

 

 



6: 그리스도와 너희와의 관계
6-1: 너희도 그들 중에 있다.


‘너희’-로마의 그리스도인들. 
‘그들’- 모든 이방인,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을 받은 모든 이방인들을 지칭.

 


 6-2: (너희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이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라고 바울은 말한다.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 버린다. 왜?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피 값을 주고 사셨기 때문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통틀어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맞바꾸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의 것인가? 예수를 믿었고 그리고 사도는 아니지만 ‘복음 사역자’로 나선 목사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미약한 존재이다. 바울의 편지 수신자인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사역자라기 보다는 단순한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온전히 살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뭐하는가? 
  나의 구체적인 행위를 들어 ‘그의 소유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분이 <마귀의 소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로 바뀐 것일 것이다. 이것은 신분적인 위치변동이다. 이것은 영원한 신분상승이다. 도저히 돌아갈 수 없는 멋진 희극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했는데 그 사람이 내 맘을 알아준다면 그 기분은 날아갈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랑을 고백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그 사랑에 속해 있는 자이다. 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우리의 고백의 용납 여부에 관계없이 그의 것인 셈이다. 

복음을 위해 택함을 입은 바울, 은혜와 사도의 직분과 사명을 감당케 하시는 하나님! 이 복음은 우리의 복음이다.

 

 

 

로마서강해② 1장 8-15절, 바울의 감사

로마서 1:8-15, 바울의 감사 Prologue... 1. 로마서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책. 로마서를 통해 많은 인물이 변화되었다. 특별히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어거스틴이다. 그는 학식이 많은 철학자였으나

kkarl21.tistory.com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