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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에스라.느헤미야.에스더

에스라 6장 13-18절, 성전봉헌과 유월

by Message.K 2022.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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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에스라 6:13-18절을 가지고 <성전봉헌과 유월>이란 제목으로 설교한 내용입니다.


 

다리오 왕 육 년 아달월 삼일(15절)... 주전 515년 3월 12일. 스룹바벨 성전은 성전 공사를 시작한 지 20여 년 만에, 곧 성전 건축을 재개한 지 4년 만에 완공되었다. 이로 인해 온 백성들이 감사하면서 성전 봉헌(13-18)을 하는 장면이 나타나고 있다. 14절... 성전을 건축하며 일을 끝내되... 제2차 성전은 많은 장애물과 어려움을 극복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하나님의 일은 그분이 백성과 동역하므로 성취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특별히 14절 초두에는 ‘유다 사람의 장로들과 선지자들의 동역과 하모니’가 주목할 만하다.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으므로’. 백성들의 지도자, 영적인 지도자, 우두머리인 장로들의 순종과 청종이 돋보인다. 그러할 때 결과는 어떠했는가?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데 있어 영적 리더십을 쥐고 있는 이들의 하나됨은 굉장히 중요하다. 당시 장로라면 어떤 백성들의 정치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리더십, 주도권의 소유자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선지자들은 영적인 리더십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 리더십이 영적 리더십의 권위 아래에 순복 할 때, 따를 때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아무리 고레스 왕의 허락과 후에 다리오 왕의 허락과 동의가 떨어진 성전 건축이지만 그러한 후원과 혜택으로 인해 성전이 다 지어지는,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실무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먼저 하나되어야 한다. 실제적인 일과 업무를 진행해나가는 백성들이 하나 되지 못한 다면 아무리 탁월한 후원과 혜택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성전은 배후의 든든한 명령과 선지자들의 격려와 그런 가운데 장로들의 일사불란한 순종과 선택이 일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성전봉헌이 과거의 솔로몬 성전만큼 우아하고 화려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백성들은 감격에 즐거워했다(16절). 그들이 포로생활 후에 돌아온 감격과 다시금 성전을 짓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흥분되는 사실이었다. 성전 예배가 정상화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제 그들의 예배를 받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초래했던 이스라엘 전체의 속죄와 회복을 기원하는 제사를 드렸다.

 

 

 

  빼앗긴 조국으로 인해 이방의 땅에서 생활하다가 다시금 자신의 조국의 품에 안긴 이들의 심정이라는 것은 감히 추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기타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즐거이 하나님의 성전 봉헌식을 행하니’

  

 

그들은 또한 부족한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물을 드리고 있다. ‘성전봉헌식을 행할 때, 수소 백 마리와 숫양 이백 마리와 어린 양 사백 마리를 드리고 또 이스라엘 지파의 수를 따라 숫염소 열두 마리로 이스라엘 전체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렸다(17절).

 

 

 

  그때의 성전 봉헌식과 지금의 성전봉헌식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 지금 우리는 성전이, 건물이 없어도 예배드릴 수 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성전이 없어도, 주님께서 성전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는 성전을 통해 백성들이 하나님과 교감했다. 성전은 하나님과 만나는 통로였고 예배의 공간이었다. 스룹바벨 성전이 지어짐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인 숨통이 트인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의 마음은 더없이 감격적이었고 즐거웠던 것이다. 단순히 종교적인 차원에서 더 부가된다면 그것은 민족적인, 국가적인 차원에서 더 했을 것이다.

 

 

 

  구약시대의 성막, 성전은 신약 시대에 와서 예수님으로 대치되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매개로 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앞으로 교회의 리모델링과 아울러 교회의 전체 시스템을 가정교회로 전환을 앞두고 있다. 여기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처럼 ‘하나 됨’이다. 모든 리더십들이 하나 되었던 것처럼 우리 교회의 모든 리더십, 지도자들의 마음이 하나 되었음 한다. 16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기타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하나가 되었단 말이다. 그러기에 즐거워했다. 그러할 때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고 했다. 하나 될 때 형통함의 축복이 임할 것이다. 교회가 큰 일을 앞두고 있을 때 언제나 사탄은 틈타기 마련이다. 개인뿐만 아니라 가정과 교회의 공동체를 흔들기 위해 얼마나 기승을 부리는가? 한 사람의 생각이 전체의 생각일 수 없고 모든 이의 생각이 천편일률적일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 됨을 위해 요한복음에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공동체의‘하나 됨’을 위해, 큰 일을 앞두고 교회가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중보해야 할 줄 믿는다. 하나 됨은 절대 쉽지 않다. 큰 일을 앞두고 더 하나 되기 힘들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 되기를 축원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훗날 리모델링과 가정교회에로의 전환하고 난 후 정말 이스라엘 자손들처럼 즐거이 ‘성전봉헌식’을 드린 것처럼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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