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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5장 1-14절, 두루마리와 어린 양

by Message.K 2022.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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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요한계시록 5장 1-14절의 본문을 가지고 <두루마리와 어린 양>이란 주제로 한 설교 내용입니다.

 

 

 

 

4-5장, 계속해서 하늘나라의 예배의 장면,

4장: 역사를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5장: 하나님이 이 세상 역사의 마무리를 맡기실 구원자, 심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두고 있음.

 

 

1절: 오른손-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상징, 하나님의 역사의 미래를 주관적으로 결정하실 분임을 뜻함. ‘두루마리’: 고대세계에서는 안팎으로 공개할 수 없는 사적인 계약서이다. 나라와 나라 사이, 혹은 국가의 지도층들끼리 중요한 문제를 놓고 서신을 교환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봉인을 무려 7번이나 했다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고 중요한 사안임을 알려준다. 7: 완전수를 의미한다.

 

겔 2:9-10 이 두루마리에는 장차 임할 환난의 사건들이 담겨 있다. 장차 임할 심판의 사건들은 영광스러운 종말에 이르기 위한 과정이다. ‘안팎으로 썼다’는 것은 내용물이 빽빽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아주 자세하고, 빈틈없이 인류 역사를 마무리할 계획들을 갖고 계신다. 에스겔이 본 두루마리는 열려 있는데, 요한계시록은 봉인되어 있다.

이 두루마리의 봉인을 떼기에 합당한 자가 누구냐(2절)...누가 자격이 있느냐? 누가 역사의 주관자이냐를 묻는 것이다.

 

 

 

3-4절: 사도요한이 그 자격에 합당한 자가 없음에 ‘내가 크게 울었더니’라고 한다. 두루마리를 연다면 하나님의 계획을 마무리할 합당한 자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면 사탄과 그 하수인들은 현재의 모습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을 박해와 고난으로 계속 괴롭힐 것이다. 요한의 눈물은 어두운 영적 현실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눈물이며, 부흥과 은혜의 돌파구를 갈망하는 눈물이다. 느헤미야 또한 잃어버린,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과 유린된 백성들을 보면서 금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하나님의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시켜주셨던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사람들은 영적 위기의 시대 앞에서 하나님의 개입과 역사를 갈망하며 흘리는 거룩한 눈물이 있어야 한다.

 

 

---> 청년들이여, 여러분에게 절박하고 아픈 상황과 환경이 있는가? 사람으로 마음 아파하는 지체들이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러야 한다. 다윗은 내 눈물을 병에 담아 주께 드린다고 했다. 여러분의 눈물의 정성을 하나님께 드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여러분을 높여주실 것이다. 여러분을 새로운 은혜로 채워주실 것이다.

 

 

 

 

5절: 이십 사 장로의 하나가 요한에게 울지 말라고 위로한다.

이 장로는 아마 24장로들 가운데 대표격이 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울지 말라’는 것은 듣기 싫으니 그만 울라는 그런 말이 아니라, 눈물을 그쳐야 할 이유와 대답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아무도 열 수 없는 인봉된 두루마리를 열 수 있는 인물이 있다는 말이다. 그는 바로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유다 지파, 사자, 다윗의 뿌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능력과 위엄과 권세가 충만한 왕을 가리킨다. 그분이 ‘이겼다’고 했다. 역사적으로 왕이었지만, 전쟁에서 패하거나 실패하여 폐위된 왕들도 많다. 하지만 주님은 ‘이기신’ 왕이시다. 아담의 죄로 파괴된 이 세상과 어둠의 권세를 심판하시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과 승리를 가져오실 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의 계획은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기억하라.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점, 해결자는 바로 예수님이시다. 가정, 학교, 직장, 교회의 문제들, 사람과 마음과 영혼과 육신의 질병과 민족과 열방의 모든 문제들, 지구촌의 모든 문제들의 해결책...누가 일곱 봉인 된 두루마리 책을 뗄 수 있느냐? 바로 예수님이시다. 세상의 모든 기술과 테크닉과 문명과 과학과 기술과 인생은 ‘이 또한 지나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영원하시다. 어제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이제 곧 오실 전능하신 주님이시다. 그 분께 여러분의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

 

 

 

 

6-7절: 유다의 사자로 표현된 주님이 갑자기 ‘어린양’으로 바뀌어져 나온다.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는 말은 주님이 일찍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얻었던 죽음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그 앞에서 목격했던 요한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흔적을 금방 알아 보았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이 세상의 심판과 인류 구원 계획을 이루는 두루마리를 열 수 있는 결정적인 능력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6, 9절에 계속 두 번이나 ‘일찍이 죽임을 당했다’는 말이 나온다. 그 어린양은 연약한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분은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셨다고 했다. 일곱 뿔: 권세와 능력을 상징, 일곱은 완전수, 어린양은 절대적 능력을 가지셨다는 뜻. 눈은 통찰력을 상징, 그런데 이 ‘일곱 눈들’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했다. ‘일곱 영’은 성령님을 가리킨다. 눈들이 성령과 동일시되는 것은 성령이 예수의 영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충만하셔서 모든 것을 통찰하시며 알고 계신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온 땅에 임재하고 계신다.

 

 

 

--->L 권사님께서 몇일째 실종상태이다. 그런 생각이 든다. 일곱 눈들과 일곱 영들이 세상을 꿰뚫어 보고 계신다. 다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을 뿐이지. 그것을 믿고 신뢰하라. 온 땅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7절: 십자가에서 죽임 당한 어린양 구원자 예수님의 모습과 무한한 능력과 통찰력을 가지신 다시 오실 심판주 예수님의 모습은 겹쳐진다.

 

“어린양이 나아와서...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어린양의 대관식이다. 그저 형식만 화려한 대관식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로부터 실제 역사를 주도하고 마무리할 권세와 능력을 부여받으시는 순간이다. 이 순간부터 인류 역사의 마지막으로 가는 모든 심판의 사건들과 최후 승리의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서 폭풍처럼 일어나게 된다.

 

 

 

8절: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취하자마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네 가지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엎드려 경배한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이들이 모두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그 향은 ‘성도의 기도’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아무 기도나 다 하늘 보좌로 가는 것이 아니고, ‘성도의 기도’, 즉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도여야 한다. 무엇을 기도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기도하느냐가 중요하다. 자녀가 아무리 짧게 부모님과 통화해도 부모님의 마음이 기쁜 것처럼, 아무리 짧게 기도해도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나님은 정말로 기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두루마리 봉인을 떼고 왕위에 오르시자마자 제일 먼저 이뤄지는 일은 그동안 쌓여 왔던 성도들의 눈물섟인 기도가 풀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는 기도, 주님은 그 기도를 귀하게 금대접에다 간직해두셨다가 어느 날 순간에 상상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응답하실 것이다. 그러기에 인내하라. 특별히 로마의 무서운 핍박과 박해 가운데 오직 기도로 인내했던 성도들에게 이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

 

약 5:13

 

예배에서 하나님께 바치는 최고의 제물은 바로 기도이다. 예배를 위해서, 예배 전에, 예배드리면서, 예배 후에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예배의 파워는 기도의 파워이다.

....>우리가 일하면, 우리가 일할 뿐이지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기도하지 않는 민족(나라)보다 기도하는 한 사람이 더 강력하다는 말을 기억하라.

 

 

 

9-10절: 마치 노예시장에서 값을 주고 노예를 사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를 지불하고 우리를 사셔서 하나님께 드리셨다. 하나님은 그렇게 어린 양의 피로 거룩해진 우리에게 맡기실 일이 있으셨다.

 

 

하나님을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시고 땅에서 왕노릇하게 하실’것이다. 10절에 나오는 말씀은 1:6에 나온다. 핍박받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주님은 우리의 갈망하는 나라는 이 땅의 로마제국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나라임을 주지시켜주신다. 그러기에 눈에 보이는 나라에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란 말을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다 책임지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진짜 조국, 본향은 바로 하늘나라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지리적,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미치는 곳을 말한다. 우리들을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 우리는 모두 ‘왕같은 제사장’이 되어서 구약시대에는 꿈도 꿀 수 없는 제사장의 중보의 자리, 중보기도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다. 우리의 죄와 공동체의 죄, 이웃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왕같은 제사장이 된 것이다.

 

 

 

한 사람이 중요하다. 한 사람의 고독한 예배, 열 사람의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예배가 도시 전체의 흥망성쇠를 결정했던 것을 보라. 아브라함시대에 소돔과 고모라에 10명의 의인이 없었다. 도시의 인구가 얼마이길래 10명의 의인이 없었단 말인가? 아무리 작아 보여도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소중하고 중요하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의 진노를 늦추기도 하고 거두게도 한다.

어제 Y가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몇 해전에는 자신이 왜 불신가정에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너무 원망스러웠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오히려 감사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한 사람의 예배자, Y가정 가운데 Y라는 한 사람의 예배자가 있음으로 인해서 가정이 망하지 않을 수 있다. 가정이 복음으로 통일될 수 있다. 소망과 회복의 은혜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사과 속에 씨앗은 씨앗에 불과하지만, 결국 씨앗을 열매를 만들어낸다. 여러분이 마산시를 위해 기도함을 통해 마산시가 인간적으로 창원시에 비해 열악하다하더라도 영적으로는 살아있음을,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있음을 기억하라.

 

 

나라가 망하는 것은 정치, 경제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교회가 타락했기 때문이다. L 권사님이 실종되었다. 이것 또한 우리가 교회의 사명을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가난한 자와 과부와 고아를 돌아보아야 할 교회의 책임에 우리가 소홀히 한 것은 아닌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려고 오신 예수님,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와 절망과 실패에 휩싸인 자들을 찾아 구원하려고 오신 예수님의 목적을 기억하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쓸데가 있다는 것! 교회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중보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세상과 함께 쾌락과 인기와 물질과 권세와 권력과 백을 추종하다가는 교회도 침몰하는 세월호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와 제사장 삼아주셨다. 우리에게 권세가 있다.

 

벧전 2:9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셔서’평생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선전하게 하려 했음을) 살게 하셨다.

 

 

 

11-14절: 11절의 ‘만민이요 천천이라’는 것은 한 마디로 셀 수 없을만큼 많은 하늘의 천사들이‘새노래로 찬양’했다는 것이다(9절). 그 찬양의 엄청난 색깔과 음색과 음악! 세계의 3대 테너, 최고인 파바로티가 죽고 카레라스와 도밍고만이 남았다. 이들보다 더한 천상의 하모니가 찬양한다. 그 주제는 바로 ‘죽임당하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12절).

어린양 예수께서 일곱 인으로 봉한 두루마리를 취하시자마자 모든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불안감과 슬픔에서 찬양의 예배로 바뀐다.

 

 

 

8-10절: 보좌 앞의 네 생물, 그 다음에는 24장로들, 그 다음에는 그들이 다 합하여 찬송하고, 마침내 보좌를 옹위하고 있는 천천만만의 천사들이 찬양을 부르기 시작함. 13절: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이 갑자기 찬양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예배의 물결이 위 아래로 쫙 번져나가면서, 나중에는 온 천지만물을 다 사로잡으며 퍼져나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유다의 사자 다윗의 뿌리’이시다. 그런데 그분은 6절에서 사자가 아닌 어린양의 모습을 하고 계셨다. 그것도 십자가에서 죽임 당한 흔적이 있는 어린양, 정글의 제왕 사자가 약하디 약한 어린양이 되셨다. 요한은 성령의 감동으로 그 신비의 수수께끼를 즉시로 이해할 수 있었다.

 

 

예수님이 두루마기의 인을 떼에 합당하신 이유는 어린양의 길을 지나서 사자가 되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메시야로 오실 그리스도는 사자의 모습으로, 왕의 모습으로, 권위자와 권세자의 모습으로 오실 것을 기대했다. 전쟁의 왕으로 오실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약함으로 강함을 정복하신 것이다. 쉽게 말하면 져주는 것으로 이기는 것이었다. 세상의 힘과 폭력이 아닌 사랑으로 섬기면서 자기 생명을 대속물로 주는 방식으로 이기신 것이다.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섬김으로 희생으로 세상을 정복해야지, 권력과 무력과 폭력으로는 세상을 제압을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정복은 할 수 없다.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없고 고난 없는 승리 없고, 고난 없는 영광도 없다. 우리가 고난 받을 때 후에 장차 받을 영광을 기대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 중에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어느 때보다 우리를 사랑하며 힘 주시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함으로, 어린양의 길을 지나 사자가 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세상은 사자가 먼저 되라고 하지만, 어린양의 길, 십자가의 길을 먼저 쫓아가야 사자의 자리에 앉을 수 있음을 기억하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함으로 다시한번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찬양: 죽임당하신 어린양 G

영광을 돌리세 G

우리 보좌앞에 모였네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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