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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2장 8-11절, 죽도록 충성하라

by Message.K 2022. 2. 28.

본 포스팅은 요한계시록 2장 8-11절을 본문으로 해서 <죽도록 충성하라>란 주제로 설교한 내용입니다.

 

 

 

바울에 의해 서머나교회가 세워졌을 것이다.

사도 바울의 3차전도 여행시 그에 의해 세워졌을 것이다. 아마 이때 폴리갑이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폴리캅은 요한의 제자이다. 죽기까지 충성한 이 존경할만한 지도자는 A.D 155년 빌라델비아의 성도 11인과 함께 불에 타 순교하였다. 가이사 주다라고 강요했으나 폴리갑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폴리갑은 이를 거부했다 원형기기장에 끌어다 놓고 많은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서머나의 로마 총독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리스도를 욕하고 그를 모른다 하라. 그러면 내가 맹세코 너를 놓아주리라”고 했다. 그러나, 폴리캅은 의연하게

 

“내가 86년간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믿어 왔는데, 그는 나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으셨다. 하물며 나의 주인이시며 왕이요 구세주이신 그분을 어떻게 배반할 수 있겠는가?”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독촉하는 총독에게 노감독 폴리캅은,

 

“그대는 헛수고를 하고 있소. 내가...가이사의 운명을 걸고 맹세하노니,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자인가를 그대가 모른 척하지 마시오. 내가 지금 하는 말을 똑똑히 들어 두시오. 나는 그리스도인이오.”

 

“그대의 운명은 내 손아귀에 있다. 그대가 그 결심을 돌이키지 않으면 준비해 둔 사나운 짐승을 풀어 너를 찢게 할 줄을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음을 보았으니, 이제는 화형을 처하겠다.”

 

 

“그대는 한 시간 정도면 타다가 꺼져 버릴 불로써 나를 위협하고 있느나, 악인을 위하여 예비된 장차 올 심판과 형벌의 영원한 불은 모르고 있소. 뭘 주저하시오? 어서 원하는 대로 곧 시행하시오.”

 

 

잠시 후 사람들이 장작더미에 쌓았으며, 으레 그래왔던 것처럼 유대인들도 이를 열심히 도왔고 폴리캅은 불에 타 죽임을 당했다.

 

 

 

두 번째 살펴 볼 교회는 바로 서머나교회이다.

서머나는?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불과 55km떨어진 거리의 도시이고 오늘날 이즈미르(Izmir)로 불린다. 사도요한시대에는 에베소 못지않게 번창했던 부유한 항구도시, 경기장, 도서관, 극장이 있었고, 여러나라 종족들로 구성된 글로벌한 인구가 50만명에 이른다. 마산인구쯤 된다. 서머나 역시 우상신전들이 많았고, 우상숭배가 성행했으며, 특히 황제숭배에 있어서는 그 어느 도시보다 열렬히 앞장섰던 곳이다. 그런 이유로 로마정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기도 했다.

 

 

 

서머나 교회의 시련과 유대인의 비방

 

계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서머나 교회의 시련은 환난과 궁핍이었다. 환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뜻한다. 궁핍은 문자 그대로 경제적인 어려움이었다. 당시 서머나 사람들은 장사를 했다. 장사를 위해선 지역 상인조합에 가입해야 했다. 그런데 일년에 몇 번씩 정기적으로 신전에서 로마황제를 향해 우상숭배의식인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하면서 황제신앙을 고백해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상인조합에 가입해야만 먹고 사는데 별 무리가 없었다. 많은 혜택이 주어졌다는 말이다. 그 말은 상인조합에 가입하지 못하면 먹고 사는데 지장이 많았다는 말이다. 서머나교회 신도들은 신앙 때문에 이 조합에 가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장 생계를 이어나가기가 어려울 정도로 큰 어려움에 있었다.

 

 

 

당시 서머나 교인들은 신앙 때문에 직장을 잃기도 했다. 여러분이 만약 잘 나가는 대기업이나 연봉이 빵빵한 직장을 택할 것이냐? 아니면 신앙을 택할 것이냐? 라고 한다면 주저없이 신앙을 택할 ‘하나님의 바보’가 될 자신이 있는가? 내 미래와 내 취업은 내 결혼과 애인의 집안에서 반대하는 모든 갈등을 한꺼번에 씻을 수 있는데, 굳이 신앙이라는 딱지 때문에 내가 이렇게 찌질하게 살아가야 하는가? 서머나교인들은 그러했다. 신앙 때문에 직장도 잃고 세금도 엄청 내고 재산을 압류당했다. 늘 재정적인 압박과 물질적인 쪼달림으로 고생했다. 지금도 회교권에 가면 예수를 믿으면 집도 팔아야 하고, 장사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목숨까지도 보장할 수 없다. 혼삿길로 막힌다. 편안하고 안락한 신앙의 메카니즘에 길들여진 우리에겐 생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 서머나교회에는 일어났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살아갔던 것이다. 그렇게 견뎌냈던 것이다. 서머나교회는 대단한 교회였다.

 

 

 

주님이 아신다: 내 이름 아시죠

그런데 주님께서 그 모든 고통을 아신다는 것이다. 이 한마디만으로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대학시절이었다. 너무 힘들어 열람실에서 큐티를 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네 힘든 거 다 안다!’

 

큐티를 하고 밖으로 나와서 학교마당을 보면서 하늘을 보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던 기억이 있다. 주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엄마 아빠는 몰라! 너는 내 맘을 몰라!’이런 말이 제일 마음 아픈 말이다.

그런데, 주님이 아신다는 것이다.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흐르는 눈물 그가 닦아 주셨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주님이 선포하신다. 9...내가 알거니와 무엇을?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세상으로 볼때는 물질적으로 곤핍하고 없어보이고 비참해보이지만, 주님이 보실 때, 하나님의 눈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을 하늘에 두고 살아가는 서머나교인들은 결코 가난하지 않고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신다.

 

 

히 10:32-34

32.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33.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34.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서머나 교인들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멀쩡한 가게나 집을 빼앗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감옥에 갇힌 형제자매의 가족들을 대신 돌봐주는 일도 많았다. 정말 예수 믿는 것을 내려놓고 싶을 정도로 아픔과 고통과 환난이 심했다. 하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영원한 천국 상급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여러분, 우리가 아직 젊기에 내세보다 현세에 더 큰 의미와 생각을 두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만약 이러한 신앙과 현재의 부요함을 두고 선택하라고 할 때, 과연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할 수 있을까? 예전에, 제가 폭스바겐를 타봤다. 무게감이 좋더라. 만약에 누군가 여러분에게 제안을 한다 치자, 교회 안 가면 폭스바겐 차를 준다면, 여러분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그 선택 후에 후회하진 않는가?

 

 

 

자칭 유대인의 출현, 그들은 사탄의 회당이다

슬픈 소식이 있었다.

로마정부가 유대인들을 핍박하는데 일조한 것은 다름아닌 유대인들이었다. 서머나는 A.D 70년경 예루살렘 멸망 이후, 전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정착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로마제국의 유대인들은 황제에게 제시하는 일을 법적으로 면제받았다. 그러나 유대인의 회당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보호하지 않고 쫓아냈다. 쫓아낸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로마정부에 고발하여 잡혀가는 일에 적극 앞장섰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은 말 그대로 이들 유대인들이 자신의 돈과 영향력을 사용하여 로마 정부에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온갖 악성 루머와 거짓말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님이 ‘자칭 유대인’이라고 표현한 것을 주목해보라.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혈육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자랑했다. 그 육체적 혈통은 진짜 유대인들을 갸늠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칭 유대인’즉 자기들의 착각에 불과했다. 불신자들로부터 핍박도 고통스럽지만, 더 마음이 아프고 힘든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핍박과 고통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이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의 몸인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사탄이 하는 일인데, 거기에 앞장섰으니 사탄의 회당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날의 <자칭 유대인>. <자칭 그리스도인>은 없는가? 겉으로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영적인 일에 전혀 관심이 없고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욕심만 가득찬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교회를 시험들게 하는 일이 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이들, 가짜 성도, 가짜 신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런데, 주님은 진짜 고난은 이제부터라고 말씀하신다. 죽을 정도로 힘든 고난이 다가올 것이지만, ‘죽기까지 충성하라’는 것이다. 장차 서머나교회에 불어닥친 고난 가운데 하나는 핵심 지도자들이 투옥되고 순교당하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실제로 이로부터 50-60년 후에 서머나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이 끝까지 로마황제숭배를 거부하다가 순교당했다. 서머나교회가 가야할 고난의 길은 이제 겨우 시작, 전주곡에 불과했다.

 

 

 

실제로 상상해보라.

여러분이 그 서머나교회 교인이었다고 생각해보라. 로마제국의 무서운 핍박으로 많은 성도들이 체포당하고 핍박과 순교를 당했다. 유배지로 보내지기도 하고 투옥되었다. 박해로 인해 남편과 부모, 친인척들과 친구들이 예배당에 보이지 않는다. 황제숭배를 거부해서 장사도 제대로 못하고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해 다들 수척해진 얼굴이다. 우리처럼 이렇게 기름진 얼굴은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예배에 목숨을 걸라는 책이 있었는데, 실제 읽어보니 그냥 제목만 ‘예배에 목숨을 걸라’는 느낌이지, 내용은 정말 허했다. 그런데 서머나교회 교인들은 목숨을 걸고 예배에 와야 했다. 이들 사이로 용케 살아남은 서머나 교회의 한 지도자가 두루마리를 들고 일어선다. 서머나 교인들에게 보낸 메시지를 읽기 위해서이다. 다들 부활하신 주님, 다시 오실 영광의 모습을 듣는다. 그리고서 서머나교회를 향한 메시지를 듣는다.

 

‘내가 안다’, ‘네 환난과 궁핍을 안다’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다’다들 감격스러워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지고 가슴이 뜨거워졌을 것이다. 그러면서 기대할 것이다. ‘끝’이란 단어를 말이다. 우리가 수업시간 종이 땡 울리길 기대했던 학창시절의 추억처럼, 훈련소에서 훈련을 겁나게 받고 나서 휴식시간에 총알일발 장전, 하루의 일과가 끝날 때, 아니면 제대할 때 이제는 다시는 군대 있는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눈다고! 취업시험이나 무슨 시험에 패스했을 때 이젠 ‘고생 끝!’이라고 기억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서머나교회 교인들도 그러한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로마제국이 곧 망할것이니 조금만 참고 기다려라!’뭐 이런 말이 위로가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주님께서 전혀 예상치도 못한, 반전의 메시지, 청천벽력같은 메시지를 던져주신다. 다들 자기의 귀를 의심한다. 그 메시지의 정체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계 2:10)

축구경기를 90분 뛰고 선수들이 들어왔다. 연장전이다. 연장전에서도 승부가 갈리지 않았다. 승부차기를 하지 않는 룰이다. 감독이 들어와서 이야기한다. 죽기까지 뛰어라! 죽을 때까지 뛰어라! 뛰다가 죽어라!

전투중에 한 씨름 놓고 병사들이 겨우 한 숨 돌리려 진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인제 달콤한 휴식과 맛있는 식사가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대장은 말한다.

 

“미안하지만 다시 나가 싸워줘야겠네. 이번에 오는 적들은 더 강하고 더 많아서, 자네들 중에서 지휘관들이 많이 잡혀가고 다칠 거야. 하지만 죽기까지 버텨주길 바라네!”

 

인정사정없는 장교였다.

 

아무리 믿음 좋은 사람들이라고 해도 장시간 핍박과 궁핍과 비방을 받으면 두려움에 사로잡혀 무기력해지기 쉽다. 그러다가 결국 신앙을 완전히 버릴 수도 있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저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2:10)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은 현재 명령형으로서,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동작을 그치라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와 산 자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몸은 죽이지만 영은 멸할 수 없는 자를 두려워해선 아니 된다(마 10:28).

밀려오는 고난의 강도가 만만치 않을 것이지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주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우리는 평상시에는 잘 못 느끼다가 어렵고 힘들 때 정말 주님의 함께하심을 절박하게 느낀다.

 

 

우리가 핍박을 당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교회를 박해하는 배후 세력이 누구냐는 것이다.

 

2:10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이 말은 핍박의 주체가 로마 정부가 아니라 그 너머의 마귀라는 것을 말해준다. 9절에서도 ‘사탄의 회당’이라고 했다. 교회를 공격하는 배후에는 사탄이 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가당치도 않다고 만류하자, 예수님이 대뜸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엡 6:11-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오래전 당태종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요동성을 비롯한 국경 지역의 철옹성들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만주 전역으로 당나라군이 노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고구려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그러나 당나라 대군은 끝내 고구려를 점령하지 못하고 물러서야 했다. 안시성 때문이었다. 명장 양만춘의 지휘 아래 일치단결한 안시성 군민들은 당군의 무서운 포위 공격을 끝까지 버티어냈고, 이 한 성 때문에 당태종은 이를 갈면서 본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서머나교회는 당시의 영적 보루와 같은 진지였을 것이다. 그들의 고통을 잘 알지만, 주님은 “끝까지 버티어달라”고 할 뿐이었다. 주님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을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라!”

시련의 기간은 잠깐이다.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는 말은 진짜 십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환난을 받을 것이란 뜻이다. 옥에 던져질 사람은 모두가 아닌 ‘몇 사람’이고 환난의 기간은 영원하지 않고 ‘십 일’이다. 여기서 십일이라고 한 것은 완전히 철저하게라는 뜻으로 사용된 경우가 있다(민수기 14:22-33). 또한 다니엘과 세 친구의 이야기에도 나온다(단 1:12-15). 다니엘과 세친구들은 우상숭배의 음식을 먹지 않기로 다짐을 하고 시험에 부딪힌다. 서머나 교회가 당한 열흘간의 시험한 것과 서머나교회에게 열흘간 환난이 있을 것이라고 한 것은 긴밀하게 연결된다. 당시 로마 황제는 누구에게나 자신을 주와 신으로 섬기기를 강요했다.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하나님만을 참 신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이다.

 

 

사탄의 핍박은 아무리 극심해도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시련의 수위를 조절하신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시험과 핍박은 우리에게 새로운 능력을 주면서 또한 새로운 정결함을 준다.

 

욥기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순금”은 말 그대로 금에 달라붙어있는 모든 이물질이 제거되고 순금과 같이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달라붙어있던 모든 이물질과 방애물과 장애물들이 고난을 통해 환난을 통해 불순물들이 녹아지고 하나님과 나만의 진정한 관계의 정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고난은 신앙의 거품을 빼는 기간이다. 과정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유독 ‘죽음과 생명’이 자주 등장한다. 그것은 서머나 교인들의 시련이 조금만 더 가해지면, 육체의 죽음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장사를 못해 굶어죽든,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해 죽든, 붙잡혀 처형을 당하든, 유배되어 죽든, 누구든지 죽음의 위협에 놓여 있다. 그런 그들에게 누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가?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8절) 말씀하신다.

그 분이 뭐라고? ‘죽도로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것은 11절의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는 맥락과 동일한 의미이다. 생명, 모든 인생은 다 죽는다. 100년안에 죽는다. 서마나교인들도 다 죽었다. 하지만, 죽도록 충성한 믿음의 사람들은 둘째 사망이 이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충성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단지 ‘맡은 본분을 신실하게 감당한다’는 뜻이지, 크고 위대한 일에 대한 열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죽도록 충성한다는 것은 먼저 가장 작은 일에서부터 충성하는 것을 말한다. 생활의 작은 부분, 한 마디 한 마디 말하는 것, 주보 하나 접는 것에서부터 신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죽도록 충성하는 것이다. 제가 총각전도사일 때, 주말 늦은 시간에 주보가 늦게 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도사가 주보도 접어야 하나?’

 

대구에서 사역할 때, 주보에 오자가 생겨서 부교역자들이 토요일 저녁에 모여서 스티커를 두어 시간동안 붙였다. 접어야 하면 접어야죠. 여러분은 젊으니깐 뭐든지 시키면 하면 나중에 다 덕이 됩니다. 순종하면 나중에 그게 여러분에게 좋은 경험이 되고 나중에 여러분이 경영자가 회장이 되었을 때 밑의 사람의 마음도 알 것이 아닌가? 그런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충성하라는 말은 ‘신실하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기도 하다. 일을 맡기면 똑부러지게 하는 사람이 있고, 그래도 맡기면 불안하지 않고 마음이 편안한 사람이 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인가? 여러분에게 누군가 일을 맡기면 안심이 되는 그런 사람이 바로 신실한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라!

 

‘말 잘하는 사람이 일 잘하는 사람을 이긴다’는 책제목이 있긴 하다. 하지만 충성의 의미에 있어선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은 ‘끝까지 충성하라’는 뜻이다. 진짜 헌신은 시간이 걸려서 검증되는 것이다. 헌신이라는 것은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끝까지 하는 것이다. 헌신을 하긴 하는데, 용두사미가 되는 사람, 말로만 하나님의 일을 다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고백하였다.

 

 

딤후 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자신의 인생의 말미에 자신의 사역을 이렇게 마무리짓는 사람이 죽도록 충성하는 사람이 아닐까?

 

연평해전에서 조타장의 헌신은 우리에게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가 키를 잡고 있지 않으면, 배에 타고 있는 한국군의 생명은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조타장은 총상을 입었고 수많은 피를 흘렸지만, 키를 놓지 않고 끝까지 버텼기에 남은 생명들을 무사히 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침몰한 배에서 조타장을 찾아 시신을 끄집어내는데, 조타장이 꽉 잡은 키에서 손가락을 푸는데 애를 먹는 모습을 보였다.

 

 

서머나교회는 세월이 가도 로마의 핍박 아래 무너지지 않았고 폴리캅 같은 위대한 순교자들이 계속해서 배출되었다. 로마는 그들을 핍박할 수 있었지만 결코 그들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주님은 서머나 교회를 통해 큰 영광을 받으셨다. 그리고 오늘 이 땅에 제2의 서머나교회를 찾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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