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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강해① 1장 1-3절, 위대한 계시

by Message.K 2021.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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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이 주석책을 쓰지 않은 유일한 책, 요한계시록

 

위대한 종교개혁자 칼빈은  왜 요한계시록 주석책을 쓰지 않았던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유력한 것은?

중세교회가 요한계시록을 신비주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기독교인들을 우민화하는데 사용했다는 사실에 종교개혁자들이 분노했다. 그들 가운데 쯔빙글리나 루터 등은 요한계시록의 정경성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문제의 소지가 있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석을 굳이 할 필요나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세시대의 뜨거운 감자,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에 대한 정경성의 의구심의 뿌리는 초대교회에서 일어났던 정경화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정경성의 문제는 해석학적이거나 신학적인 요인보다는 정치적인 요인에 의해서 많이 좌우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어떤 결함보다는 요한계시록을 사용하는 자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것이 더 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에 대한 해석’이라고 했는데 정말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의 문제 때문이었다.




이런 역사적인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해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들을 말해주고 있다.

첫째, 오늘날 교회에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역사가 제공해주고 있다.

초대교회에서 이미 정경성을 인정받은 바울서신에 대한 신학적인 논의는 길고도 풍성하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은 그 정경성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애매모호했기 때문에 신학적인 논의의 역사가 짧다. 빈약하다. 만약 종교개혁자들이 이 책에 대한 태도를 좀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해의 정도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둘째로, 요한계시록은 여러 가지 신비적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기에 늘 이단적 분파들에게 이용당하기 쉬운 특징이 있었다는 점이다.

신비적인 단어와 많은 상징적인metaphor 단어들이 곡해와 왜곡을 불러와 이단들을 만들어냈다.




셋째로, 요한계시록의 정경화의 과정은 우리가 어떻게 요한계시록은 대할 것인지를 말해준다.

요한계시록이 너무 난해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해석하기를 꺼리거나 대하기를 꺼린 나머지 오히려 이단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교회는 여전히 이 성경에 대한 이해는 조약하고 여전히 초보단계에 머물러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새 예루살렘: 교회를 상징,

-열 두 지파의 이름이 쓰인 열 두문: 약속으로서의 구약의 백성을,

-열 두 사도의 이름으로 쓰인 열 두 기둥: 그 성취로서의 신약의 백성을 상징.

새 예루사렘의 구성원은 어느 소수 집단이 아닌 전체로서의 교회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교회 공동체라는 자명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왜 오늘날 신천지 같은 이단들이 창궐하는가?



밀레니엄 2000년이 되었을 때, 지구는 어떤 큰 지각변동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하지만 1999년 12월 31일이 지나고 2000년 1월 1일이 되었을 때, 역사의 수레바퀴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 학번을 어떻게 할거냐 고민을 많이 했었다. 90년대 학번인 나는, 2000년도 신입생들은 이천학번이라고 하나? 00학번으로 하나? 00학번이라고 하면 굉장히 어색하지 않겠느냐? 그런 당시에는 적절한, 지금보기에는 굉장히 우스운 고민들을 했었다. 당시 2000이란 숫자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가져다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두려움과 설렘,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그 기대 반, 걱정 반이란 말은 이렇게 해석해 볼 수 있다. 기대는? 역사의 진보와 문명의 굉장한 발전속도에 따른 희망과 기대이다. 스마트폰의 속도의 발전, 인터넷과 네트워크, 문명의 이기의 스피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기대감과 희망 가운데는 두려움과 불안이 뒤섟여 있다.


왜? 그 속도가, 그 빠르고 빠른 인터넷 속도와 발전의 속도가 과연 우리에게 안정을 주는가 하는 것이다. 스마트폰에 인터넷을 더 빨리 움직이고 정보도 더 엄청나게 우리에게 주어지지만 과연 우리는 더 행복했느냐 하는 것이다. 10년전, 20년전, 30년전 휴대폰도, 스마트폰도, PC도 없던 그 시절에는 행복이 없었는가? 아니면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며 그때가 더 행복하고 아름다운 세상이었다고 추억한다.


왜 그런가? 우리가 지금 발전하고 나아가는 이 문명의 속도감이 우리의 행복을 완전하게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속도감 속에는 상업주의, 배금주의, 자본주의, 물질주의가 버티고 있다. 외모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라는 괴물들이 버티고 있어 우리의 존재를 위협하고 있다. 사람들의 멘탈과 정신은 예전보다 더 약해빠진 듯하다.

지금의 현실, 그때의 현실!


교회는 마치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으로 상징되는 로마의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둘러싸여 사면 초가에 놓였던 초대교회와 같은 상황을 맞을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결코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습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교회가 쉽지 않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 초대교회 카타콤의 성도들은 늘 핍박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교회는 한번도 '예배의 부자유'(대면 예배의 금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없을 정도로 평안한 나날을 보냈는데, 코로나가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교회는 육적인 코로나이든, 영적 코로나이든 간에 이런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이런 문제를 제대로 인식한다. 왜냐하면 이미 요한계시록은 로마라는 제국에 의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사단은 로마라는 나라를 사용했다. 그러나 오늘날 사단은 로마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또 다른 수단을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 물질주의, 혹은 상업주의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혼란스러운 시대에 대해 고통과 불편함을 느낀다. 내 맘대로 예배도 못 드리는 생전 처음 겪는 답답함이 짜증스럽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백신을 맞는 사람과 백신을 맞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어지기도 하고, 후유증도 장담할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정부가 아니라,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이심을 기억한다면 위안이 될 것이다. 성경의 텍스트로 다시 눈을 돌릴 때, 요한계시록의 텍스트를 주목할 때, 우리보다 더 열악한 고통과 핍박과 환란과 위기 가운데 있는 일곱교회를 향한 주님의 메시지가 우리의 답답함을 풀어주시고 우리에게 도전해 주실 것을 믿는다.


오늘날 교회는 초대교회와 같이 ‘전투적인 교회’로 서가야 한다. 그러한 영적 전투의 방법을 가장 효과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요한계시록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축복의 주인된 교회의 현재now와 미래then, 여기here와 저기there에서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교회를 강한 군사로 무장시킨다.



 

요한계시록의 전달자, 요한


계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하나님은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할 사람을 신중하게 고르셨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택하셨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했던 사도 요한을 택하셨다. 갈릴리 호숫가의 어부였던 요한은 형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의 제자였다. 최측근 제자였다. 변화산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경험했던 제자였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동행했고, 예수님이 전도하실 때 반응하지 않는 마을을 보고 흥분하여 주님께 하늘에서 벼락을 내려 이 말을 태워버리라고 할 정도의 팔팔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 사건으로 그의 별명은 ‘우레의 아들’이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자기 아들들이 예수님의 오른팔과 왼팔이 되게 해달라고 로비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요한은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였다. 각별히 요한을 사랑하셨던 예수님!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요한에게 부탁한다.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한다. 주님의 부활 후 빈 무덤을 본 여인들의 말에 가장 먼저 달려간 제자는 베드로와 요한이었다. 부활하신 주님께 요한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훗날 어찌될까요?’

라고 베드로가 물었다. 주님은

‘내가 돌아올때까지 이 사람을 남겨둔다 한들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라고 하셨다. 기독교는 타인에게 신경쓰는 종교가 아니다. 자기 자신을 제일 먼저 신경쓰는 종교이다. 자기 자신을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세워야 하고 심판대 앞에 세워야 한다. 남 흉 볼 시간도 없고, 남 신경 쓸 겨를도 없다. 내가 내 자신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지옥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믿음생활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예수님은 사람의 본성을 알고 계셨다. 사람들이 너무 다른 사람에 신경을 많이 쓴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저 친구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 저 놈의 죄는 어떻게 처벌하실런지...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 오직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신다. 왜냐하면 나와 예수님과의 관계에는 그 누구도, 그 어떤 3자도 들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예수님 사이에 '요한의 존재'에 대해 무관심해 하셨다. 왜냐하면 '베드로와 예수님의 관계'(대화)이기 때문이다. 남 말하기 좋아하고, 남 흉보기 좋아하고, 타인에 대해 너무 지독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조심해야 한다. 주님은 그런 걸 별로 좋아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튼 요한은,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는 요한이 제자들중에 순교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주님이 승천하신 후, 열한 제자들은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다가 하나둘씩 이국땅에서 순교했다.

그러나 에베소로 간 요한만은 그 후 60년이 넘도록 살아남았다. 예수님이 부탁하신 어머니 마리아를 모셔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우레의 아들의 성품을 가진 요한이 마리아를 모시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벌써 그는 땅끝으로 달려가 순교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던 그가 아흔이 넘은 나이에 로마 항제 도미티아누스의 명령에 의해 밧모섬이라는 죄수 유형지로 유배되었다(밧모섬은 에베소에서 65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섬이다).



도미티아누스는 왜 마지막 남은 예수의 제자, 모든 기독교 교회의 추앙하는 지도자인 요한을 처형하지 않고 귀향을 보냈을까? 모르면 몰라도, 죽이는 것보다 더 큰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요한을 보여줌으로써 아직까지도 저항하고 있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주고자 했던 것이다.

“보아라. 예수의 제자 요한도 로마의 힘 앞에 이렇게 무기력하게 유배지에서 갇혀 있지 않느냐? 너희의 하나님은 무기력하다. 너희의 믿음은 소용이 없다. 저항을 포기하라!”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밧모섬에서 요한을 향한 계획이 있으셨다. 핍박에 시달리는 교회를 향한 요한의 아픈 마음 가운데 하늘이 열리고 천둥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면서 위대한 계시록의 말씀을 그에게 주신 것이다. 그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교회들에게 편지를 기록한 요한의 감격은 목이 매었을 것이다. 무서운 로마제국보다 더 큰 하늘나라의 영광을 계시록을 통해 선포함으로써, 초대교회는 다시 한번 무섭게 살아나게 되었다.




요한의 일생을 보면서 위로를 받으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밧모섬에서 절망하거나 낙담하지 말고 거기서 하나님의 위대한 계시를 거머쥐기를 바란다. 그 계시를 통해, 당신의 인생의 계시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환난 가운데 위로받고 은혜를 경험할지 어떻게 알겠는가?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다 경험했다. 그리고서 밧모섬에서 다시 오실 재림주의 메시지를 받았다. 그러면서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을까? 내 사모하는 주님, 다시 만날 그 기대와 소망으로 그는 생애를 마무리했을 것이다.


우리 딸이 6살때 이런 이야길 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있다고 했는데, 왜 자꾸 아빠는 옆에 있다고 해?”


“예수님이 보고 싶다”-우리의 간절한 기대와 꿈과 소망이길 원한다.





요한은 1:2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했다’고 말한다. 요한이 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참되다고 선포해주신 것, 그것이 그리스도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요한 계시록의 네 가지 해석방법


1)과거적 해석파이다
.

사도요한이 생전에 네로황제와 도미티안 황제의 핍박, 그리고 사도 시대에 이뤄진 사건을 기록했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내용은 다 과거에 이미 끝나버린 사건이다. 이 해석의 장점은 기록될 당시 독자들의 입자에서 봐야 요한계시록이 정확하게 조명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단점은 요한 계시록이 장차 다가올 시대, 마지막 시대에 대한 예언이라는 점이 무시된다는 점이다.




2)미래적 해석파이다.

이 책이 주로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의 상황들을 기록한 책이라고 본다. 1-3장까지는 소아시아의 일곱교회에게 주는 메시지를 제외한 나머지 내용들은 먼 미래의 주님 재림 직전의 징조를 예언한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그래서 이들은 오늘날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재림의 징조들과 연결시키려 한다.

예를 들면,

-유럽경제공동체(EEC)가 등장한 것은 세상 마지막 때의 조짐이다.

-요즘들어 지진이 많이 부쩍 많이 일어난다. 주님오실 징조이다.

-9.11테러로 시작된 문명의 충돌은 마지막 날의 징조이다.

-13장의 666짐승의 표는 상품에 찍혀있는 바코드이다. 이걸 나중에 몸에 레이저로 새기면 그게 짐승의 표이다.

그러나, 이 주장의 약점은 미래의 사건, 재림의 징조를 아는 호기심에 집중한 나머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영적 진리들을 많이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계시록의 상당 부분은 다가올 심판에 대비한 회개와 경건생활을 강조하고 있다.


 

3)연속적 역사적 해석이다.


이 책이 1세기부터 오늘날까지, 그리고 세상의 종말때까지 일어나는 모든 중요한 일들을 다루고 있다는 주장이다. 지난 2천년 세계사의 흐름을 순서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관점이다. 다니엘의 환상이 여러 제국을 상징했듯이, 요한계시록의 일곱교회는 예수님 재림때까지의 일곱 시대를 상징하고, 중세기, 르네상스, 현대에 이르는 여러 강대국들의 역사가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징기스칸이 되었다가, 나폴레옹, 히틀러, 스탈린, 호메이니 같은 인물들이 적그리스도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다른 어떤 학파들보다 해석에 있어 오류를 제일 많이 범한다. 요한계시록은 인간의 시간 연대에 맞춰 기록된 책이 아니다.

세상의 사건사 뒤에 하나님의 주권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이런 해석의 약점은 현재 사건들의 성경적 연결점을 찾기 위해 성경이 말하지 않는 무리한 해석을 강제하는 것이다.



4)영적 이상적 해석파이다.

요한의 시대건, 그후의 시대건, 어느 시대에 일어난 특별한 사건을 염두에 두고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어느 시대 모든 성도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원리만을 다루고 있다는 주자이다.

그러나, 계시록은 분명히 1세기 사도 요한의 시대, 핍박받던 교회의 성도들의 상황을 전제하고 주어진 역사적 책이며, 앞으로 다가올 미래,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의 마지막 날을 예언한 책이기도 하다. 영적인 의미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요한계시록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해석을 취해야 하는가?

 

먼저 사도 요한이 살았던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처했던 상황, 그 당시 독자들인 교회 성도들의 입장을 충분히 분석하는 역사적 접근이 필요하다. 동시에 요한계시록의 메시지가 1세기만 아니라 재림의 징조와 심판의 그림을 담았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또한, 어느 시대, 어느 성도들에게도 반드시 믿고 실천해야 할 영적 진리가 담겨져 있는 진리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단순히 마지막때의 우리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책이 아니라, 말세를 사는 성도들이 어떻게 현실에서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책이다.

요한계시록의 핵심은 4가지 주제입니다.

 

첫째, 앞에서 이야기한 교회입니다.

둘째, 예배입니다. 계시록 중간중간에는 심판에 대한 예언이 있기 전에, 혹은 심판 예언들의 중간중간, 마지막에 엄청난 하늘나라 예배들이 소개되 있다. 다가올 재앙과 힘듬과 아픔을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예배, 그 예배에는 흰 옷을이 입은 열방의 수많은 백성들, 천사들, 이십사 장로, 예배를 받으시는 어린양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예배를 통해 천국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만이 지옥같은 땅의 현실을 잠재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세상의 허무한 최후입니다.

넷재, 보이지 않는 세상, 천국의 영광스러움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일차적으로 1세기 소아시아의 일곱교회에게 위로와 소망을 줄 목적의 편지이다. 일곱교회는 교회 안팎으로 환난을 겪고 있었다. 1:9 나 요한은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이다라는 말로써 자신과 교회가 처한 상황을 환난과 참음으로 요약. 예수님의 말씀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와 무관하지 않다.


박해상황의 교회가 예수의 십자가의 승리는 곧 교회의 승리를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교회는 승리가 보장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했던 것이다.


교회가 이 땅에 있는 동안 고난을 겪는 몇 가지 이유

 

1) 고난의 신학적인(성경적인) 이유

 


신학적인 고난의 이유:

첫째
, 타락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땅은 너로 인해 저주를 받고 종일토록 수고하여야 하리라는 저주가 창 3:17-18에 내려졌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고난의 직, 간접적인 피해를 받는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는 이것을 극복하는 문제가 서술되어 있다. 뭐라고? ‘다시 저주가 없으며’(22:3),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14:12-13) 성경의 처음에서 시작이 끝에서 마무리되는 느낌이다.

둘째,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당연히 박해를 받는다. 예수님은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라고 했다.




박해문학는 묵시문학인 이유가 있다

계시록은 박해문학이다. 박해문학이자 묵시문학인 계시록은 유대인들이 극한 박해를 받고 있던때에 생긴 문학이다.

박해문학의 특징은 은유, 메타포로 말하고 돌려서 말하는 것이다.
왜? 그래야 박해자들이 읽어도 무슨 말인지 눈치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희한한 상징과 숫자들로 가득차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에 대해 사람들은 어렵다는 선입견과 편견이 있다. 나도 그랬다. 그러나 오히려 성경은 쉽게 읽혀져야 능력이 되기 때문에 계시록도 마찬가지이다. 쉬운 책이다. 그걸 기억하자.

 

요한계시록의 상징과 은유를 푸는 첫 번째 코드는 성경이다.

구약을 많이 알면 상징과 계시들이 잘 쉽게 풀린다. 요한은 250번이나 넘게 구약성경을 암시, 반복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구약을 제대로 알아야 잘 풀린다. 이상하게 해석이 안 되는 것이다.

사 34:16

예를 들어, 계시록은 생명나무는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선악과 옆에 있던 생명나무이다.


두 번째로 계시록에 나오는 여러 가지 숫자는 이 숫자들의 의미는 구약시대 유대인들이 가졌던 숫자관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

가령 7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하는 3과 동서남북 방향을 지칭하는 4를 더한 숫자이다. 일곱나팔, 일곱 인, 일곱 대접등, 7이란 숫자가 많이 나온다.

6은 7에서 하나가 부족한 숫자라서 불완전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그래서 4자처럼 6자는 안 좋아하는 숫자이다. 12는 구약의 열 두 지파에서 왔고,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한다. 이십사 장로는 구약의 열두지파와 신약의 열두사도를 합친 숫자이다. 신구약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표자들을 상징한다. 이를 강조하려면, 12 X 12= 144를 만드는데, 이는 하나님의 백성의 숫자가 많다는 것을 상징한다. 1,000은 유대 문화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할 때, 144에다가 천을 붙여 144,000명이 된다. 숫자 자체의 의미보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엄청 많다는 뜻인데, 이 숫자를 가지고 여호와의 증인도, 신천지도 장난을 치는 것이다.

그리고 666짐승의 숫자도 알고 보면 간단하다. A.D 66년 네로 박해때부터 박해자에게 붙여진 숫자 이름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히브리어 알파벳 하나하나에 숫자를 붙여서 말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요 13장에서 다룬다.



세 번째 박해문학의 특징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핍박하는 어둠의 권세들이 반드시 멸망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원이 임한다는 주제를 담고 있다.

그래서 현실 속에서도 절망하지 말라고 격력하는 목적이 이 책의 목적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말과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책이 무섭다고 한다. 하지만 정말 무서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지, 예수님의 보혈을 믿는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닌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오히려 고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축복하고 위로하며 격려하기 위한 책이다.

 

렘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셋째, 고난은 구속사적인 상황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교회를 구원하셨고 세상을 이기셨다. 하지만 교회는 아직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지 않은 미완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 승리는 보장되었지만, 종말의 완성은 아직 임하지 않았다. 교회가 장차 이르게 될 모습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골 3:3, 요일 3:2). 교회는 소망중에 재림의 주님을 기다린다. 이 중간 시대의 우리교회는 박해가 공존할 수밖에 없다. 계시록은 성도들에게 고난 가운데서도 승리가 보장되어 있음을 일깨워준다.

 

2)고난의 사회적, 역사적인 이유

 

 

초대교회는 1세기의 독특한 사회적인 상황에서 고난을 맞이한다.


세 가지 관점에서다.

먼저, 유대인들과의 갈등이다.

1세기 로마당국은 유대교를 적법한 종교로 인정했다. 로마제국 안의 유대인들에게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것이다. 유대교의 한 분파로 여겨진 기독교도 유대교로 인해 방패막이를 가진 것이다. 하지만, 로마시의 화재(64년), 유대전쟁(66-70년), 예루살렘 멸망(70년),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회당에서 출교시킨 사건 등은 교회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특히 로마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시의 화재의 책임을 돌린 이유로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별개 집단으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던 것이다. 유대교는 더 이상 기독교의 방패막이가 될 수 없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은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중대한 갈등의 원인을 제공했다(3:9, 5:5, 22:16).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을 소돔과 애굽에 연결시킨 것(11:8)은 유대인들의 심기를 자극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회당에서 쫓겨나고 유대공동체에서 추방되면서 사회적인 외톨이로 전락하는 위기를 맞았다.

 

둘째, 이교환경과의 갈등이다.

황제숭배-A.D90년 도미티아누스는 로마시민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는 여러분을 속였습니다. 실은 저는 사람이 아니라 신입니다.”

그때부터 자신에게 시저(황제)라는 칭호대신,

‘우리 주, 우리 하나님’(Our Lord, Our God)

이라고 부르게 했다. 헬라문화에 익숙한 로마사람들은 이미 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로마황제라는 신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게다가 도미티아누스는 나라가 부흥하기 위해서는 신들의 권위가 살아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제의 신격화에 반대하는 것은 곧 로마를 반역하는 것이었다- 법정이나 극장에서 거행되는 신에게 맹세하는 일, 이교의 여러 신들에게 제사하는 일,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것,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부도덕(2:14, 20)과 길드에 참여하라는 요구 등 모두가 그리스도인들로서는 이 세상과 동화되기 버거운 것들이었다. 이런 문제들이 이교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빈번하게 충돌하게 만들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한분 하나님만을 예배하지, 다른 어떤 우상과 신들을 거절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교도들 가운데서도 동화되지 못하고, 외인으로 살게 되었다. 그들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이방인들이었다(13:16, 17). 어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는 생존을 위해 이교도들과 동화되는 무리들도 있었다. 두아디라의 길드 제도, 니골라당(2:6, 15), 발람의 추종자들(2:14), 이세벨 추종자들(2:20)이 이런 부류의 무리들이었다. 요한은 혼합주의와 우상숭배를 신랄하게 경고하였다.


 

셋째, 로마와의 갈등이다.

로마는 정복국의 주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했다. 로마사회의 빈익빈 부익부는 굉장히 심각했고, 이것은 사회적, 문화적 긴장으로 증폭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69년)에는 빈부의 갈등이 사회의 불안으로 팽배했다. 그리스도인들은 당대 통치자들이 부여하는 경제적인 혜택도 받지 못했다(17:4, 18:11-13). 서머나, 라오디게아에게 보낸 편지에 부와 가난이 언급된 것은 당대의 이런 문제가 성행했음을 시사해준다(2:9, 3;17).


로마가 시행하는 황제숭배도 교회에 위협적인 요인이 되었다. 법적으로 황제숭배는 황제가 죽은 이후에만 시행되었다. 그러나 네로의 화상의 아폴로 신의 형상으로 동전에 새겨졌으며, 여러 지방에서는 도미티아누스황제가 공공연하게 신으로 숭배받았다. 이런 황제숭배가 강요되지는 않았지만 보편화되었다. 황제숭배가 벌어지는 곳에서는 기독교들은 절대 참여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사회에서 받는 불이익은 감수해야하는 결과였다(1:9. 2:9, 19, 25, 6:9, 14;9-11, 17:5-6).


예수님은 로마의 권력에 의해 처형되었고, 예루살렘 성전은 주후 70년에 로마에 의해 파괴되었다. 버가모교회에서 안디바가 그리스도를 증언하다가 죽임을 당했고(2:13), 요한은 밧모섬에서 유배되었다. 교회의 지도자인 요한이 로마체제에 위협적인 존재라고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종교, 정치, 사회적인 면에서 고난을 당했다.

 

3)요한 계시록을 기록한 목적


이런 박해와 고난과 배교의 상황 가운데서 요한은 그리스도의 환상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제시한다. 주님께서는 이런 그들의 상황을 다 알고 계신다. 죽임당하신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셔서 사자와 같은 힘과 영광과 능력을 가진 분으로 등장한다(5:9-10 등). ‘알파와 오메가, 전능한 자’로 알리셨다. 지금 교회에 가하는 로마의 박해가 거대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이런 박해는 제압당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이런 초대교회의 전통에 따라 환란 중에서도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가 더 긴밀하고 친밀하고 분명하게 결합되었음을 알림으로써 환난을 당하고 있는 교회에게 위로를 주려한다.



오늘 본문에서도 분명히 요한계시록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알리는 계시이다(1:1). 이 책에는 지금 땅에서 진행되는 일과 장차 될 일, 그리고 반드시 ‘속히 될 일’이 기록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주님이시다. 처음과 나중이시고,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이시다(1:8).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는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계시이다. 4복음서에는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구원자의 예수의 모습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겸손, 사랑, 섬김이 강조되었다.

하지만 계시록에서는 다시 오실 심판자 그리스도, 유다의 사자, 영광의 주님의 모습이 기록되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별명을 ‘제5복음서’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요한계시록’이다.



둘째, 요한계시록은 이 책의 내용을 “읽는 사람(단수로 사용, 교회에서 공적으로 성경을 낭독하는 교회지도자)과 그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들에게 복이 있음”을 알게 하려고 기록되었다(1:3). 때가 급하다. 성도들은 그들을 박해하며 그들과는 다른 삶의 원칙들을 따라 사는 사람들과 구별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해야 한다.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여러분!
이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인 여러분!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과 환난 가운데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위축되지 말고 당당하시길 바란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 위대한 계시를 들은 요한의 외롭고 상한 마음을 위로해주신 그리스도의 계시가, 밧모섬에서 처량하게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그에게 인생의 위대한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다시금 돌아보게 하실 것이다. 또한, 그 자신 뿐만 아니라 지상의 수많은 영적 전쟁 가운데 전투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소망을 불어넣었던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의 한반도의 물리적인 코로나이든, 아니면 영적인 코로나 이든지 간에 청춘들인, 성도들인 여러분에게도 이 위대한 계시가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고, 힘이 되고, 은혜가 되길 소원한다.


 청춘이여! 일어나라! 위대한 계시인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인생의 중심이 되길 소원한다.

 

 

시편 103: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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