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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에스라.느헤미야.에스더

에스라 3장 1-7절,감격스러운 예배의 시작

by Message.K 2021.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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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에스라와 느헤미야(이 두 권은 원래 한 권이었다!)에서 특별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없다고 종종 이야기한다. 얼마전에 나누었던 ‘느헤미야의 성벽재건 운동’같은 경우는 그래도 좀 낫지만 에스라의 메시지는 크게 청중들에게 어필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에스라 하면 ‘말씀’, ‘학사’ 뭐 이정도이지, 그 인물이 아닌 에스라 성경에 대해서 무엇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크게 말할 게 없을지도 모르겠다. Cf,) 에스라와 비슷한 에스더는 그래도 낫다! ‘죽으면 죽으리라’의 여주인공, 여배우가 등장하기 때문일까?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이나 바울의 엄청난 ‘로마서’의 말씀과는 비교되는 듯한 이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진 피터슨이 말하기를

"자기도취적이고 정신분열적인 문화 한가운데 있는 현대 교회의 영성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고 말한다. 이스라엘 바벨론 포로에서 이제는 바사 제국의 포로의 처지로 변화된 역사적인 시점 가운데 그들이 민족적인 정체성을 어디서 찾아야하는가? 하는 질문을 계속적으로 던지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시금 일제시대의 36년의 치욕스러운 주권 상실의 과정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상상해보라! 아니면 우리가 다른 열강에 의해 나라를 빼앗겨서 이스라엘처럼 포로가 되었다고 상상해보라! 70년 포로생활 이후로 다시금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를 우리되게 하는 힘,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힘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정체성을 어디서부터 찾아야 하는가? 바로 이러한 질문에 대해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대답을 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적용해보자면, 우리가 쓰러지고 깨지고 낙망하고 실패하였을 때,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나를 다 떠나고 사라지고 초토화되었다고 생각할 때 그 때 우리는 우리자신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벌거벗은 우리의 모습의 기초를, 바탕을, 존재의 근원을 어디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텔레비전 드라마의 로맨스나 청소년들처럼 연예인을 통한 대리만족이나 성적표? 사랑하는 가족이나 배우자, 연인의 품에서 찾아야 하는가? 더 크게는 경제적인 파워나 힘, 물질이나 매력적인 몸매나 얼굴, 육신적인 매력에서 찾아야 하는가? 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특별히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한 인물은 자신의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철저하게 고백했던 것을 본다.

 

욥기 1:21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정말 이런 고백을 하게 된다면 우리의 신앙의 경지는 정말 탁월한 경지이다. 우리 한번 고백해보자! 21절이다. 이런 신앙고백으로 우리가 무장하면 얼마나 좋을까?


 에스라는 오늘 본문에서 민족적인 정체성, 민족적인 뿌리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그 해답, 대안을 보여주고 있다.


B.C 539년에 고레스 왕은 바벨론을 와해시키고 강력한 바사 제국에 병합시켰다. 그는 포로로 잡혀 있는 유대 백성들을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했다. 그들이 성전을 재건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격려했다(스 1:2-4). 그러나 이방 제국의 도시에 정착했던 200만 정도의 유대인들 중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았던 사람들(스 1:5), 약 5만 명 정도만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갈 것을 선택했다. 그들은 에스라 1-6장에 나오는 1차 귀환자들로 예루살렘에 세워지게 될 새 성전에서 예배를 부활시키고자 했다.1)

 


 칠월은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이 있는 최고의 축제 계절이었다. 하나님께 공적으로 예배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그러자 이제껏 타국땅에서 바벨론의 지긋지긋한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하나님의 백성은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여 예배할 방법을 논의했다(1절).

그리고서 액션을 취했다.

 

3:2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려 할새

 

그들의 관심사는 성전 건축이었지만, 성전을 건축하기 이전에 무엇보다도 예배의 회복이었다. 정돈되지 못한 삶과 살림살이, 흐트러진 일상들, 노예생활에서 오는 후유증…살림살이가 힘들고 자식들은 내일 대학입시를 치러야하고, 건강의 문제는 늘 자신을 괴롭히고, 남편의 직장생활은 형편없고 가정살림은 거덜 나게 생겼고 가계 또한 형편없다. 주위의 친구들이 떠나갔고 집안의 부채는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유대 백성들의 환경이 그러했다. 노예 생활, 머슴살이를 하다가 고향으로 기쁨을 안고 돌아왔지만 제대로 정착되거나 안정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스룹바벨과 영적 리더들은 그들의 살림살이의 회복, 재건설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이 붙잡았던 것! 그들은 보다 먼저 예배를 마음에 두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안돈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확고한 믿음에서 출발한 것이다. 모든 환경과 상황이 종료되지는 않았지만 만군의 여호와께 모든 것을 맡기고 무엇보다도 먼저 예배의 갱신, 예배의 회복을 꾀하였다. ‘민족적인 뿌리찾기’ 그것 또한 바로 이 예배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삶이 힘들고 마음은 무겁고 육신은 쇠약해가지만
그리스도인은 예배를 먹고 살고, 예배의, 예배에 의한, 예배를 위한 그리스도인임을 기억하자.


 Here I am to Worship! -CCM 가사중에서 ‘우리는 여기에 예배하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의 존재의 이유는 '예배'이다.

오, 하나님, 우리의 예배를 회복시켜 주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이었음 한다.

그들은 민족적인 정체성, 민족적인 뿌리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민족적인 정통성을 어디서 찾고 있는가? 그들은 그 대답을 ‘예배’에서 찾고 있다.


예배-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러나오는 것!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체성을 찾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의 본질적인 존재 이유이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것처럼, 예배생활이 안 되면서 다른 섬김과 전도와 봉사, 기타 활동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노릇이다. 예배는 기본이고 본질이고 바탕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기본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우리의 인격, 감정과 의지와 지성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기분과 본질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찾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뿌리찾는 현장에서 예배로 인해 대별되는 몇 가지를 같이 나눠보자!


 

첫번째로, 예배의 자발성이다! freewill offerings

 

먼저 자발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왔다는 것을 기억하자.

예배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기 이전에 먼저 예배자들이 하나님 앞에 자발적으로 찾고 간구하고 나아감이 있어야 한다.

 

(대하 16:9)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For the eyes of the LORD range throughout the earth to strengthen those whose hearts are fully committed to him. You have done a foolish thing, and from now on you will be at war."

 

전심으로 하나님께 향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소망한다. 하나님께서 임하셔도 그만이고 안 임하셔도 그만인 그런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99%가 아닌 100% 전심으로 드리는 예배자를 하나님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며 찾고 계신다. fully commited, 전적으로 헌신되어진 자! 자발적으로 주를 찾는 예배자들이 되시기를 기대한다.

 

[스 3:3-스 3:4]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 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

Despite their fear of the peoples around them,

 

  아직 성전이 건축되지 않았지만 주변 정착민들의 반대가 예상되었지만(NIV: despite-함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전 터 위에서 제사드릴 단을 만들어 하나님께 희생과 헌신의 번제를 드렸다. 그리고 그 이후로 성전 예배 규정에 따라 정상적인 성전 제사가 날마다 그리고 절기에 맞추어 진행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점을 성전 건축 이후로 미룰 수 없었다. 우리가 모든 스케줄과 업무와 삶의 모든 일들은 뒤로 미룰 순 있다 하더라도 예배를 미룰 순 없다. 1차 포로 귀환한 무리들의 지도자들은 이것을 알았다. 예배를 미룰 순 없다. 예배를 거스릴 순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과 숨쉬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여러분들도 이러한 과거의 예배자들의 순수하고도 정열적이고 규모 있는 예배에 대한 자세를 닮기를 소망한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자원정신VolunteerShip

영화배우 중에 <라스트 모히칸>에 출연했던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정말 멋진 연예인, 엔터테이너가 있다.

연예계에 종사하는 그런 부류의 살아가는 사람들은 쉽게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다.그 세계속에서 무언가라도 갈구하고 연명하기 위해서 '마약'을 하고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연예계가 그렇게 만만한 세계는 아님을 알 수가 있다.그런데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그 연예계의 삶을 접고 이탈리아의 <구두 수선공>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 대리석으로 조각한 것 같은 날카롭고 탄탄한 마스크와 몸을 가진 그가 왜 구두수선공이 되었을까? 정말 어울리지 않는 대목이 아닌가? 정확한 년수는 기억이 나질 않는데 한 2년 인가? 그 정도로 구두수선공의 일을 하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몇 년 전에 일어난 미 9.11 대테러참사 때에는 '자원 봉사자' 로 섬겼다고 한다.

많은 연예인들은 테러참사를 위해 성금을 내어놓은, 돈으로 자선(?)을 베풀었지만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자신의 헌신적인 몸놀림으로 봉사를 했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인간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도 어울리고, 지극히 낮은 곳에서 겸손하게 엎드려 섬길 줄 아는 이런 인간다운 인간

나는 그런 인간이고 싶다......그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였다.


  자원정신, 자원하는 마음은 봉사하기 이전에 예배자의 자질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자발성의 자질이 있는가? 자발성이 사라진 우리의 모습을 회개하자!

 

둘째로, 헌금 생활이다.

 

정기적인 헌금생활이 있었다!

[스 3:5-스 3:6]

그 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와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을 드리되

After that, they presented the regular burnt offerings, the New Moon sacrifices and the sacrifices for all the appointed sacred feasts of the LORD, as well as those brought as freewill offerings to the LORD. 

(현대인의 성경) 그런 다음부터, 그들은 늘 드리는 번제 외에도, 초하루 제사 때와,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주님의 모든 절기를 맞이할 때와, 주님께 자원예물을 바칠 때마다 번제를 드렸다.

 

그 때는? 일곱째 달 초하루부터 비로소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으나 그 때에 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한지라


 

 백성들은 하나님께 나아올 때 그냥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벅찬 감격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왔다. 성전의 터가 준공되지도 않았고 완벽한 예배건물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감격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에 찌들었던 과거에서 해방된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감동과 감격이 있었음 한다. 왜 물질은 운운하는가? 돈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해서는, 자녀들과 가족들을 위해서는 한없이 부요하면서도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의 마음이 굳어있거나 빈약해져있지는, 가난해져 있지는 않은가?


 

  사역자들 사이에서도 ‘교회 건축하는 교회’는 가지 않는 게 좋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불편한 상황이지만 그 불편함을 불편함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그런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형편은 초라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초라하지 않았다.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감격을 그들은 예물로 표현하였다.



 

궁색한 헌금, 희생이 없는 헌금, 볼품 없은 예물, 마음에도 없는 무의식적인 틀에 박힌 헌금생활…거기에는 능력이 없다. 여러분 돈의 힘을 믿지 않는가? 아주 옛날, 현대자동차 광고를 보면 댓글을 달면 자동차를 선물해주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댓글을 다니깐, 자발적인 참여로 댓글을 다니깐 돈이 움직였다! 차를 사주는 돈의 힘을 보여주는 광고! 여러분이 가진 그 돈의 힘을, 물질의 힘을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보여보라. 하나님께서 그 돈의 힘을 어떻게 사용하시는지를…우리 하나님이 돈이 없어서 우리에게 융자받으시기 위해 헌금하라고 하시는가? 착각하지 말자! 하나님은 그렇게 쫀쫀한 분이 아니시다. 그 분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고대사회 돈이 없던, 화폐와 지폐가 없던 시대부터 현대까지 역사를 주도해가시는 전지전능하신 엘 샤다이의 하나님이시다.


  

  그 분 앞에 즐거이 헌금을 드리라. 기쁨으로 드리는 헌신과 헌금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임하심과 능력과 복이 임한다. 이것은 기복신앙이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신앙생활의 본질이다. 부처상에다가 석탑에다 냉수 한 그릇 떠 놓고 지극정성을 다하는 세상의 우상숭배자들 보다 더 하게, 우리는 보이지는 않지만 영원하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마음과 정성을 표현해 보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털어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시기 위해 자기 자신을 드린,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드린 그 분 앞에 옹색하고 궁색하게 나아가지 말라. 빈손으로 오지 말라. 명절 때가 되면 부모님에게 빈손 들고 자식들은 없을 것이다. 우리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에도 여러분의 주머니를 넉넉하게 하여 그 분 앞에 드리라. sacrifice를 드리라. 희생 없이 무슨 역사가 일어나겠는가? 그들의 제사에서 항상 sacrifice가 들어간다! 바로 희생이다. 희생의 예배, 희생의 헌금이어야 한다.


EX) 어린이전도협회 K 권사님 이야기!-휴가를 항상 벽지촌이나 섬 등에 가서 여름성경학교를 열어주는 희생의 역사가 있었다! 거기에 그 분의 부유함의 비밀이 있었다.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지 않겠는가!



이 세상은 희생의 역사이다.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 희생하지 않았다면 애들의 인생이고 결혼이고 미래이고 아무것도 없다.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 덜 입고 덜 먹고 희생해가면서 자녀들을 양육하였다. 그 희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독생자의 희생의 위엄 앞에 우리의 희생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것은 어떨까?

헌금 생활에 전폭적인 개혁과 변화가 필요하다. 그 전폭적인 개혁과 변화로 인해 여러분의 인생이 윤택해질 것이다. 그 윤택함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소산이다.

 

[스 3:5-스 3:7]

그 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와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을 드리되 일곱째 달 초하루부터 비로소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으나 그 때에 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한지라 이에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또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고 바사 왕 고레스의 명령대로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 해변까지 운송하게 하였더라

 

그들은 자발적으로, 한 마음으로, 그리고 즐겁게 예물을 드리면서 먼저 예배하고, 성전을 건축하기 위한 일꾼과 자재 준비에 착수했다. 예배의 회복이 성전 건축을 앞섰다. 그 뿐만 아니라


세 번째로, 즐거움이었다.

 

그들은 즐거이 예배하였다.

자발적으로 예배에 모임에 참석한 그들에게는 감격이 있었고 헌금이 있었고 그리고 즐거움은 당연히 따라오는 결과이다. 그들은 즐겁게만 예배드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3절-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주위 사람들의 반대와 분위기의 심상치 않음, 환경의 열악함, 반대세력 등)

6절-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한지라(분위기가 안 따라줌, 모양새 없음, 초라함, 볼품없음 등)

 

 두 가지의 큰 방해물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만이 알 수 있는 영적인 즐거움이었다. 이 즐거움은 ‘감사’로 인해 생겨진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즐거움이 넘쳤음 한다. 예배로 인한 즐거움, 말씀으로 인한 풍성함, 자발적인 헌신과 즐거이 드리는 헌금으로 기쁨, 예배를 통한 하나됨…영적인 축제적인 예배가 회복되기를 소원한다.


예배에 능력이 있음을 믿으라. 그리스도인은 한 번 잘 드린 예배로 인해 평생이 축복된 삶에 서게 된다.

그리고 올바른 예배를 드리자. 특별히 이번 주는 추수감사주일이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대안은 바로 '예배'였음을 기억하자. 이번 추수감사주일, 우리의 예배 가운데 자발성과 감사의 헌물과 즐거움이 회복되기를 소망한다!

 

자발적으로!!! 자발성! 자발적으로 나아온 풍성한 추수감사주일!

희생의 헌신을 드리며!!! 헌금생활! 헌신의 희생, fully commited heart를 드리는 thanksgiving day!

즐거이 감격적인 자세로!!! 즐거움! 감사를 회복하는 joyful day!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되었음 한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벨은 한 번 잘 드린 피의 제사로 하나님이 받으셨지만 가인은 한 번 잘못된 예배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그는 하나님께 내침을 당하였다. 저주의 역사를 쓰게 되었다. 비운의 인물의 주인공이 된 것을 기억하라! 예배로 회복되는 우리의 인생이 되길 바란다.

 




1) 에스라 1-6장까지는 예루살렘으로 1차 귀환(49,897명: 22년-성전 건축)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주도적인 인물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이다(7-10장까지는 예루살렘으로 2차 귀환(1,754명-남자와 레위인: 여자와 아이를 합치면 5,000명으로 추산: 1년-백성의 개혁)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 주된 리더가 ‘에스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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