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누가복음 10장 38-42절의 본문을 가지고 <너의 삶이 황무지가 될까 주의하라>란 주제로 한 설교입니다.
제가 시골에서 학창시절을 보낼 때 전도사님으로부터 들은 에피소드이다. 전도사님이 그 당시 호랑이같은 담임목사님 밑에서 수련중이었다고 한다. 늦게까지 사역하시고 집으로 돌아와 주무시고 새벽기도를 가실려고 일어났는데, 시간에 늦어서 허겁지겁 넥타이를 매고 새벽기도를 인도차 강단에 서셨다고 합니다. 근데 자세히 보니 넥타이가 앞에 한 개만 있는 게 아니고, 뒤 개 한 개가 더 있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바쁘셔서 피곤하신 나머지, 넥타이 매고 주무신 모양이다.
선교 지도자의 한 사람인 프레드 미첼Fred Mitchell은 그의 책상 앞에 이러한 표어를 늘 붙여 놓았다고 한다.
“너무 바빠서, 너의 삶이 황무지가 될까 주의하라”
제가 대학 다닐 때였습니다.
학교에서 조별로 발표수업workshop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당시 과에 남자가 제 후배랑 저랑 둘이었는데, 제가 총책임을 지고 발표수업을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밤새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 시간이 모자라서 발표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바쁘게 움직이긴 했는데, 비효율적이어서인지 완전 말 그대로 멘붕이었습니다. 힘없이 그러나 굉장히 조바심을 내면서 학교수업에 갔습니다. 근데 분위기가 이상했습니다. 학교에 바리케이트가 쳐지고 심상치 않은 조짐이 보였습니다. 알고 보니 학교가 학내문제 때문에 데모가 일어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날 교수님께서 교수실에서 수업을 하자고 했고, 저희는 도저히 안된다고 절대 안된다고 했습니다. 결국 발표수업은 없어지고 보고서를 내는 것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간 떨어질 뻔했던 저의 황무지의 경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너무 바빠서 삶이 황무지가 된 경험은 없는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황무지가 되어버린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너무 바빠서 황무지가 되어버린 사람! 영적 황무지가 되어버린 사람!
오늘 본문의 배경에서 등장하는 사람은?
본문을 훑어보자면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매지간이었다.
마르다가 한 일은 무엇인가?
1. 접대의 여왕(v.38)
2. 원망 섟인 불평(V.39)
3. 일을 좀 도와달라(V.40)
4. 예수님의 핀잔? 꾸중(v.41-42)
5. 예수님의 좋은 편이란 선택을 하지 못함(v.42)
마르다는 굉장히 바빴다. 그 바쁜 것이 단지 세속적인, 세상적인 일 때문이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이 주의 일이었고, 예수님과 관계된 일이었다. 예수님을 대접하고 음식을 장만하고 준비하고 준비하고 그런 일들이었다.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일 자체 죄를 짓게 하는 일이거나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속이거나 그런 부류의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좋은 일들이었다. 선한 일들이었다. 그런데, 마르다는 ‘황무지’, ‘영적 황무지’의 고갈(기아) 상태로 돌입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기억해야 할 첫 번째 Message는?
1) 선한 일도 우리의 영혼을 갉아 먹을 수 있다.
40절...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
일이 너무 많을 때 누가 옆에서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마르다의 일이 좀 많았던 모양이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옆에서 좀 도와줬음 좋겠다고 마르다는 투덜거리고 있다. 불평과 원망이 있는 곳에 기쁨은 사라진다. 즐거움은 없어진다. 감사가 떠나간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신 그 일, 심방받는 일을 기쁨으로 환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보다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 더 우선이었다. 영적 지도자를 잘 모시고 대접하는 것은 참으로 유쾌하고 즐거운 일이다. 그런데 마르다가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면서 일이 많아졌다기 보다는 원래 일을 좀 다양하게 많이 하는 스타일로 추측해 볼 수 있겠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녀의 은사가 다양하게 많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41절...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은사가 많고 적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일을 하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인데, 그것은 바로 ‘염려와 근심’이었다. 우리의 영혼을 갉아 먹는 것은 ‘염려와 근심’이 동반된 과중한 일로 인한 후유증이다. 영어성경에서는 upset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마르다는 자기의 내면의 상태 자체가 감당이 불감당이었던 모양이다. 예수님께서 upset이란 단어를 사용하신걸 보니 말이다. 우리는 그 일들의 부작용으로 우리의 영혼을 갉아 먹힐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우리가 upset될 수 있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 upset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있음을 기억하라!
대학부 여러분, 여러분이 붙잡고 있는 소중한 선한 일들, 이를테면 공부, 토익, 토플, 전공공부, 독서, 성적, 장학금, 알바, 군대, 이성교제, 방학, 레포트, 시험 등. 이 모든 것들이 선한 것이지만 여러분의 영혼을 갉아먹을수도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르다가 말씀을 듣는 자리 보다 섬기고 봉사하는 자리에 더 우선순위를 두다 보니 어느새 마르다에겐 예수님 옆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이 이제는 어색해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저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고든 맥도날드는 이런 사람을 일컬어 ‘쫒겨 다니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뭔가에 계속 쫓겨 다니는 사람!
찰스 카우먼이란 부인이 쓴 이야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19세기 탐험가가 아프리카 오지를 탐험하기 위해 아프리카 원주민을 고용하면서 일어난 일입니다. 탐험할 처음 사흘 동안은 예상 밖의 초스피드로 일이 빨리 진행되어서 원래 스케줄보다 훨씬 앞서 나가면서 탐험이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연구자(탐험가)들은 굉장히 흥분하고 들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흘째 되는 날 모든 것이 변하고 말았다고 한다.
아침에 텐트에서 아무도 일어나려고 하고, 아예 움직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들리는 말이, 원주민들은 그 날 하루 종일 움직이지 않고 그냥 거기서 머물기로 정했다는 것이다. 탐험을 중지한 채 말이다. 그래서,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들이 대답하기를, 지금까지 자신들은 원래의 속도보다 자기들이 더 빨리, 너무 빨리 움직였기 때문에, 이제는 잠시 멈추고 그들의 영혼이 그들의 몸을 따라잡게 하기로 했다면서 하루를 기다림과 휴식으로 보낸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영적 황무지 상태에 빠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기에 자신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기 전에 쉬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결코 쫓겨 다니지 않았다. 영혼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우리가 쫓겨 다녀선 아니 된다.
사랑하는 대학부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에 쫓겨 다니는가? 뭔가를 성취하고 이루었을 때 느끼는 성적에 대한 만족감을 쫓고 있습니까? 성공을 향한 갈망과 취업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욕망에 쫓겨 다닙니까? 아무리 선하고 좋은 일, 영적인 일이라도 균형 감각을 잃으면 손해이다.
마르다는 섬김의 대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피곤하고 지쳐 있다.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제자훈련을 하면서 아주 깊숙하게 묵상을 나누었는데, 한 자매가 이런 이야길 했다.
수많은 예배를 네가 Staff으로 섬긴다면,
“네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따로 드리는 예배가 있어야 한다”
는 말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 서기를 좋아한다면, 사람들 앞에 선 만큼의 시간을 하나님 앞에 개인적으로 채워야 한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 영적인 에너지를 교사로, 성가대로, 직분자로 섬겼다면 그 섬긴 시간 이상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마리아처럼 ‘주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시간’(V.39)이 있어야 한다. 영적인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는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20대의 푸르른 청춘의 대학생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앉아서 그분을 만나는 시간이 많으시길 바랍니다.
고로, 영적인 균형감각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우선순위’(priority)의 균형감각, balance를 잘 맞춰야 한다.
40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으므로 예수께 와서 말하기를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상관하지 않으십니까? 저를 도와주라고 동생에게 명령하소서." 하니,
'마음이 어수선 하다',. 압박하다, 괴롭히다 분산시키다, 정신적으로 배회하다, 마음이 산란하다
마르다는 너무 바빠서 삶이 황무지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사랑하는 대학부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떠한가? 오늘 하루도 빡빡한 일상들과 학업과 공부과 신앙의 틈바구니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바쁘게 살아가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마르다처럼 삶이 황폐하게 될까 주의하라.
여러분, 우리의 우선순위가 일이 되어선 아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을 도외시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뒷전에 미룬 채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가?
“여러분의 삶이 황무지가 될 까 주의하라!”
오늘 본문을 통해 같이 나눌 두 번째 Message는?
2)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가 택했던 그 한 가지는 마리아의 중심이기도 했다. 마리아의 중심은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는 삶’이었다. 주님 곁에 가까이, 주님이 누추한 자기 집에 심방 오셨으니 더 친밀하고 세밀한 말씀으로 터치하실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말씀에 집중하는 중심! 우리에게도 이러한 중심이 필요하다.
마리아의 우선순위, 마리아가 택한 그 한 가지!
마리아는 주님 앞에서 앉아있다.
parakaqivzw'가까이 앉다', 앉다 <눅 10:39>동. to sit down near, at;
1)옆에 앉히다, 2)옆에 놓다, 가까이 두다, 3)옆에 앉다
주님 옆에 고스란히 앉아 있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마음, 내면 세계로부터 외면 세계를 지향할 때 가장 능률적으로 살 수 있도록 우리를 만드셨다. 그래서 잠언의 한 기자는 내면의 중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릇 지킬만한 것 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마리아는 마음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그 마음이 바로 예수님 옆에, para앉아 있었다. 그 분 앞에서 그 분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있다. 마르다는 예수님과 함께 한 공간에 있었지만, 예수님을 위해 일한답시고 예수님이 빠진 ‘일’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마르다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우선순위’가 뒤바뀐 경우였다.
마리아는 주님 옆에 앉아 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믿음은 행함에서 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나며 앉음에서 난다. 여러분이 이 성전에 들어와 앉아 말씀을 들음에서 믿음이 발생한다. 행함은 믿음의 표현하는 도구이다. 우리는 이것을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이러한 마르다가 빠진 늪에 빠지고 만다. 우리의 우선순위는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고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그 분 앞에서 늘 앉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모든 것의 우선순위이다.
마리아의 앉음은 여유를 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르다 눈에는 그게 눈에 거슬리는 대목이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40절)
이 말을 예수님께 하는 마르다를 보니 마르다가 마리아더러 일을 좀 도우라고 했지만 마리아가 안 한다고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마리아가 워낙 완강하게 부인하니깐 예수님의 백을 통해서 마르다가 이야기한 것일까?
한 가지만이라도 집중하는 마리아!
41 주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들로 염려하며 걱정하고 있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그 좋은 쪽을 선택하였으니,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바른 성경)
41 그러나 주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너무 많은 일 때문에 걱정하며 안절부절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일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그 좋은 쪽을 선택했으니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쉬운 성경)
마리아는 영혼의 위대함을 먼저 생각했다. 마음의 부함을 먼저 생각했던 여인이었다. 우리의 일도 중요하고 일의 성취와 열매도 위대하면 좋겠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영혼이 살찌는 것이고 우리의 영혼에 생명력이 넘치는 것이 우선이다. 우리의 영혼이 살아 역사하는 것이 우선순위에 앞선다. 마리아가 그러했다.
사랑하는 대학생 여러분, 여러분은 영혼의 위대함의 마리아가 되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화려한 명성과 프로필과 인기와 젊음을 드렸던 위대한 선교사 C.T.스터드, 식인부족에게 복음을 들고 갔다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말자 창에 찔려죽어간 20대의 젊은 남편이자 선교사였던 짐 엘리엇! 이들은 영혼의 위대함을 가졌던 위대한 영혼들이었습니다.
마르다는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이와는 반대로 마리아는 ‘앉아 있다’… 이 말은 아주 중요한 말이다. 그녀는 주님 앞에 앉아 주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다. 주시하고 있다. 말씀을 듣고 있다. 행동하지 않고 그녀는 듣고 있다. Listening!!!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여름수련회를 통해서 대학부가 다시 한번 비상하였음 합니다. 마리아처럼 말씀에 한 번 푹 빠졌음 좋겠습니다. 여러분 기도해주십시오!
그녀는 주님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여유가 마르다에겐 없었다.
이 세상에 수 많은 마르다가 있습니다.
학원과 영어공부와 아르바이트와 여행과 자신의 개인적인 일들로 ‘너무 바빠서 영혼을 돌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 친구들이 많습니다. 그 친구들에겐, 그 수많은 마르다에겐 열심만이, 열정만이, 에너지의 과다한 소비만이 있었다. 준비위원회의 위원장 같은 일에 치여가는 마르다에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앉아 있는 것은 일종의 ‘사치’로 보일 수 있다. 수련회에 가서 말씀을 듣는 것이 사치일수 있습니다.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영어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고 자격증이라도 하나 더 따야하고, 집안형편이 넉넉지 않으니 나라도 벌어서 아르바이트를 해야하는데, 마리아의 일은 사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평가는 달랐다. 그는 오히려 마리아를 칭찬하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평가에 민감해야 한다. 그 분의 음성을 듣는 일이 없이는 모든 것이 무의미할 뿐이다. ‘종교’와 ‘신앙’의 이름으로 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하나님과의 교제 없이 섬기고 행사를 주관하며 심지어 교육을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하나님 앞에 우리가 다 내려놓아야 할 문제이다. 회개할 문제이다. 하나님과의 은밀한 만남이 없는 예배Worship은 ‘마르다적인 행동(액션)’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교리도, 신학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시스템도, 이론도 아닌 바로 기독교는 관계입니다.
그대는 마르다인가? 마리아인가?
모든 일이 있기 전에 먼저 ‘그 분의 말씀’을 들으라! 그 분의 음성에 민감하라! 그 분 앞에 앉아 있으라! 그 분 옆에 앉아 있으라! 예배의 시작은 바로 그 분 앞에 앉아 있는 마리아의 행동으로부터 시작함을 명심하라.
오, 하나님! 당신 앞에 더 앉아 있는 마리아처럼 그렇게 그렇게 그렇게 살게 하소서! 오늘 우리는 영혼의 위대함을 생각했던 마리아처럼,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알고 먼저 자신의 영혼과 인생과 삶을 지혜롭게 챙기고 준비하고 예배하는 인생되었음 좋겠습니다.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는 생활의 주인공’ 마리아처럼,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는 주의 사랑하시는 대학부, 그리고 모든 주의 백성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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