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포스팅은 누가복음 2장 21-40절을 본문으로 한 <하나님을 섬기면서 메시야를 잘 기다린 사람들>이란 주제로 한 여전도회 헌신예배설교입니다. 이전에 한 설교를 다시 업데이트하여 개정한 설교내용이기도 합니다. 로이드 존스의 <목사와 설교>에서처럼 설교자도 업그레이되지만, 설교문도 때론 재탕(?)을 할 수 있으며 설교자의 성장과 성숙으로 인해 설교문도, 설교도 업데이트되어지는 것이라고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오늘 헌신예배는 1-3브리스가 헌신예배이다. 지난주에 저희 어머니께서 생전 처음으로 입원을 하시고 수술까지 하셨다. 늘 여장부처럼 행동하시던 어머니께서 병원에 입원하시니 마음이 참 안타깝기도 했다. 어머니의 연배가 1-3브리스가 연배라서 설교준비하는데 다소 참고가 되었다.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는 것 같다. 아무리 승승장구하는 사람이라도 육체적으로 쇠하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 한계인 듯하다. 나이가 든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인생이 참으로 연약하고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는 사람이 젊어서는 깨달을 수 없는 지혜와 진리를 깨닫게 되는 점에서 특별한 것 같다. 인생은 60부터라는 말도 있듯이 아직 한창이신 60세 언저리에 계신 1-3브리스가 회원들에게 오늘 이 말씀이 은혜의 메시지가 되길 바란다.
그렇지만, 오늘날 나이가 든다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시대 분위기도 웰빙이니, 몸짱이니, 훈남이니 하면서 젊고 어린 것을 선호한다. 사람마다 처음 만나서 인사가 ‘아참, 많이 늙으셔서 보기 좋습니다!’, ‘참 늙어 보이십니다’ 이런 말은 정말 실례이다.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몇 년 전이었던가? 후배 전도사님과 함께 목욕탕을 갔다. 열심히 목욕을 기분 좋게 나왔다. 60-70대로 보이는 아저씨가 저를 한번 쳐다보고, 후배전도사님 얼굴을 한번씩 쳐다보셨다. 나랑 그 전도사님이랑 닮았는지 유심히 보시는 듯 했다. 그러더니 저한테 한마디 하셨다. 근데 그게 엄청난 돌직구였다.
대구사투리로 또박또박하게 이야기하셨다.
“(당신이) 아버지인교?”(당신이 이 사람의 아버지되십니까?)
정말 참담했다. 그때는 5년전, 30대 중반이었는데, 그 말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아직 그 충격의 진동이 느껴진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길 하는가? 나이가 들어가고 늙어간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30대 중반의 아저씨인 제가 신체건장한, 키 180이 넘는 청년의 아버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형인교? 사촌 형인교?”도 아니고 “삼촌인교?”도 아니고, “아버지인교?”
제가 그땐 첫째인 아들이 이제 막 태어났을 때인데, 한순간 50-60대의 중년아저씨로 둔갑해버린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세월은 장사의 쏜 화살처럼 날아간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 짐 엘리엇이 이야기한 것처럼,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으려고 하지 말고, 붙잡을 수 있는 것을 붙잡는 지혜가 필요하다. 붙잡을 수 없는 세월을 붙잡지 말고, 진리되신 그리스도를 붙잡기를 바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나이를 먹어가느냐, 어떤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나이가 들어가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로마제국이 전세계를 호령했다. 하지만 그 로마군인들의 갑옷을 자세히 보면 그 사람들의 신체나 덩지가 굉장히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혹자는 초등학교 애들중에서 좀 큰 애들 사이즈의 갑옷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비너스, 헤라클레스, 아프로디테, 켄타우로스-반인반마 동상 같은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누드상, 나체신상, 동상을 그렇게 웅대하게 지었는가? 이탈리아반도 남쪽 사람들은 신장이 작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그들의 힘을 의식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건물을 엄청나게 크게 지을 뿐만 아니라, 신상을 크게 세워 육체미를 과시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로마시대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고대사회에선 나이가 들어가는 것, 늙는다는 것을 굉장히 혐오하였다고 한다. 젊을 때 놀아야 한다는 놀자주의, 노세문화가 가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늙으면 병들거나 허약해지면, 젊을 때 너무 잘 놀아서 그런 것이라는, 젊은 날의 쾌락의 대가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사람의 생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우리시대는 젊음을 더 부각시키고 문화와 트렌드나 모든 것이 거기에 맞춰가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백발의 늙은 자의 아름다움이라고 하였다. 모두가 다 젊어지려고 하고 운동을 하고, 안 되면 더 나아가 연예인들처럼 보톡스를 맞고, 지방흡입수술을 하고 그렇게 하더라도 사람은 원래 나이가 들면 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질서이다. 그 자연의 질서에 너무 깊은 배신감을 느끼지 않길 바란다. 너무 배신감이 드시면, ‘아버지인교?’라는 저의 이야기를 기억하시면서 위로 받으시길 바란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의 주인공들은 나이가 지그시 든 사람들이다. 1-3브리스가 여전도회원 분들은 설교시작부터 나이 이야기를 해서 기분이 상하시진 않았나 모르겠다. 그러면 ‘아버지인교?’ 그걸 기억하시라. 성인 남녀가 나이가 차서 시집.장가를 가게 되면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다가 학교를 보내고 후에는 자녀들이 취업도 하고 또 시집,장가를 보내게 된다. 그러면 부모는 이제 조부모가 되는 것이다. 조부모가 되려면 그만큼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 시간을 되돌리고 싶으신 분들은 ‘수상한 그녀’란 영화를 보시면 많은 감동과 미소를 건네받으실 것이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들은 말 그대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메시야를 기다린, 잘 기다린 인물들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전에 한 때 유명했던 시인은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라는 뭐 그런 시를 쓰기도 했다. 기다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연로하신 어르신들, 1-3브리스가 회원들은 기다림에 아마도 익숙하신 분들일 것이다. 자녀를 키우면서 자녀가 등,하교하면서, 출퇴근하면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기다림은 여러분들이 더 많이 경험하였을 것이다. 기다림이라고 하면 지금 침몰한 세월호에서 실종된 자녀들과 가족들을 기다리는 유족만큼 절실한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오늘 그런데 그만큼 절실한 기다림의 사람이 등장한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셨을 때 만난 시므온과 안나는 평생을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믿음으로 살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일생은, 우리가 노년기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특별한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젊었을 때부터 준비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노년을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 무엇인가?
탄자니아 선교사로 10년 동안 지내셨다가 한국에 돌아오신 선교사님이 안식년 1년 동안 한국에서 지내시면서 너무나 많은 상심과 좌절을 하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이유인즉,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천국에 대한 기대나 소망보다는 60-70세에 직장에서 은퇴하면 걱정되는 노후연금이나 생계에 더 큰 염려가 가 있다는 것이다. 하늘소망은 없고, 오로지 이 세상, 이땅에서의 소망과 이생의 자랑만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 선교사님은 자신은 선교사라서 아무런 노후대책도 없기에 탄자니아로 돌아가 열린 하늘, 그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노년을 보내야겠다, 그 하나님만 노후대책을 삼아야겠다고 하셨다. 안식년을 맞이해 돌아온 한국이 이젠 이방나라 같고, 오히려 탄자니아가 더 고향같이 느껴진다면서 씁쓸한 뒷모습을 보이면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성도 여러분, 1-3브리스가 회원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노후를 준비하고 계시시는가? 어떤 준비를 해놓으셨는가요? 여러분의 노후준비와 노후대책과 오늘 이 사람들의 모습은 어떻게 다른가?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여러분들은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늙어가고 싶은가? 노년기에 예상되는 여러분의 자화상은 어떠합니까? 어떤 분은 ‘평생 봉사하다가 죽고 싶다’고 합니다. 어떤 친구는 평생 성품은 인자하면서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적인 삶을 살고 싶다고, 어떤 친구는 삶의 스타일에서 직업적인 열정이 투철하고, 신앙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기면서 외모는 인자하기를 바라는 친구도 있습니다.
나는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나이가 들어가길 원하는가?
오늘 본문을 통해 도전이 있기를 바란다.
먼저 21-35절에 등장하는 사람이다.
시므온: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던 사람(21-35)
예수님과 그의 가족이 예루살렘에 올라갔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구약법에 따라 정결예식이 찼다. 남자는 생후 33일이 지나야 산모의 몸이 깨끗하다고 생각했다. 23절을 다같이 읽자.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예수님의 가족은 율법에 의거하여 제사를 드렸다. 번제와 속죄제를 드렸는데, 레 12:8에 의거하여 그들은 산비둘기 한 쌍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정형편을 알 수 있다.
참고/ 레위기 12장/출산한 여인에 대한 규례, 어린양을 바칠 여력이나 여유가 없으면 산비둘기 2마리, 혹은 집비둘기 새끼 2마리를 가져다가 1: 번제물, 1: 속죄제물로 삼았다.
이런 예수님의 가족과 예수님을 기다린 사람이 있었다. 바로 25절에 나오는 시므온이란 사람이었다. 이 사람에 대해선 25-27절에 기술하고 있다. 먼저 25절의 기술한 대목을 읽어 보자.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시므온의 성품과 인격/ 그 사람이 의롭다고 하는 것은 법 없이도 그 사람은 살 수 있다고 하는 도덕적인 완전함, 무결점! 성격이 좋다는 말은 아니다. 선한 인격과 도덕적, 윤리적 흠이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
경건하여 ▶그가 영적인 사람이었다는 것! 종교적인 삶을 넘어 영성이 짙은 사람! Devout! 그는 독실한 신자! 교회만 출석하는 선데이크리스챤이 아니라 정말 열정적인 신앙가였다! 어느 정도의 선에 오르면 사람들이 ‘그 사람 참 경건하다’고 할까요? 그 경지는 굉장히 쉽게 오를 경지는 아닐 것이다. 여러분도 경건한 인물이 되시길 소원한다. 경건의 모양만 아니라 경건의 능력이 있는 자들이길 소원한다. 참, 그 사람 세속적이다, 세상적이다라는 말보다 경건하다는 평가를 받기를 바란다. 1-3브리스가 회원들은 더욱 그러하길 바란다. 시므온은 그런 삶의 바탕 위에 이러한 소망이 있었다. 그 소망이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 그의 소망이 바로 하나님께 있음을, 민족과 나라를 위해 기도했던 사람! 보통 기도 많이 하시는 분들을 보면, 너무 자기 자신, 개인만을 생각하거나, 개교회, 자기 가족에만 머물러 있는 경우가 있다.
EX)헐리웃 영화를 보면 가족을 위해선 폭력, 살인, 범죄는 가볍게 식은 죽먹기 식이다. 우리가 기도많이했다고, 영성이 좋다고 성도들을 대할 때 무례해선 아니될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때문에 우리가 가진 영성을 통해 언어폭력을 행해서도 아니되고, 무례함을 정당화해선 아니될 것이다. 은혜를 은혜되게 하시라!
민족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 바로 그 사람이 시므온이었다.
시므온. 그는 개인주의자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 기도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경건하게 대망하는 자였다. 만약 시므온이 지금 대한민국에 살아있다면 세월호의 참사를 위해 불철주야 기도하면서, 나라의 경제와 문화와 정치와 국방이 안정되기를 간절히 갈구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위로를 기다리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세월호사건으로 인해 안산쪽에는 매일 저녁기도회를 가지면서 세월호의 재난의 유족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한다. 어떤 경우라도 형제를 위해 기도하는 곳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줄 믿는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성령충만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시므온은 이러한 삶의 내용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살아온 목적이 있다. 마지막 소명, 목적이 있다.
또한, 26절을 봅시다.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삶의 목적이 분명한 사람이었다!-마치 이것을 다해야 자신의 인생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의 탄생과 등장을 보지 않고서는 자신의 인생의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여러분은, 올림픽의 마라톤의 유례를 잘 알 것입니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와 그리스 아테네간의 전투가 아테네 북쪽으로 40여킬로미터 떨어진 마라톤 평원에서 있었다. 극적인 아테네의 승리로 끝났다. 승리의 기쁨을 알리기 위해 전령 "필리피데스"를 아테네로 보냈다. 아테네까지 41.6km를 죽을 힘을 다해 달려간 그는
"우리 아테네군이 승리했다."
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이 유명한 마라톤의 전설은 1896년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에서 마라톤이라는 육상종목으로 부활했다. 이것이 마라톤의 유례입니다. 마치 승전보를 알리고 숨은 거둔 그 필리피데스처럼, 시므온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메시야가 이 땅에 온 것을 보기 전에는,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다! 승리의 주가 오셨다!”
이 장면을 목도하지 않고서는 죽지 않겠다는 확실한 성령의 신호를 받았다는 말이다. 어떻게 살면 이런 신호를 받을 수 있을까요? 의롭고 경건하고 ...성령에 그 위에 계시는 삶이 얼마나 놀라운 삶이었기에 그는 이런 사인을 받았을까요? 아니 어쩌면 우리는 그러한 무수한 성령의 사인을 놓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사인과 지시를 일상 가운데 보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너무 바쁘고, 분주하고, 관심사가 다른 곳에 있다보니 실상은 놓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7절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 성령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성령에 민감한 사람이었다! 성령의 지시와 감동으로 정확한 타이밍에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1-3브리스가 회원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이 이러한 인생이 되길 바란다. 펠리피데스가 마지막 '우리 아테네 군이 승리했습니다!'란 말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 것처럼, 시므온이 성령의 지시가 성취되어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본 것처럼 여러분의 사명도 하나님 앞에 그렇게 성취되길 소원한다. 여러분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사명을 믿음으로 잘 감당하고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는 인생 되길 소원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 그 성령 하나님은 천지창조를 하실 때도 역사하신 삼위 하나님이십니다. 그 성령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새로운 구원 역사를 감당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지금 그 예수님에게 다리를 연결시켜 줄 또 한 사람의 동역자를 만나게 되는데, 이 사람은 정말 예수님과는 어떤 육신적인 관계는 없었지만, 기도의 사람이었기에 성령 안에서 모든 것을 공유하였고, 성령의 지시를 받아 예수님께 직접 나아온 경우입니다.
29-35절의 말씀은 시므온이 예수님의 과거에 대해, 그리고 또 미래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구약적인 성취, 예수님의 위치와 앞으로의 역할, 영향력과 활약상을 보여준다.
과거/ 성경에서 예언한, 구약에서 그토록 대망하고 예언했던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바로 메시야적인 사역의 현재적 성취와 성과를 보여줌!
미래/ 예수님께서 메시야의 사역을 감당하실 것이다! 이제 메시야가 누군지 드러났으니 성경의 성취는 어느정도 이뤄졌다. 하지만 아직은 사역의 완성을 향해가는 진행형이다! 앞으로의 구속사역을 완성해가야 할 단계입니다.
그런데, 시므온의 기도는 독특합니다.
시므온의 기도...라틴어로 ‘주여 이제 놓아 주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왜 시므온은 이 땅에서의 삶을 평안히 마칠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겠는가? 26절에 보면,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감동의 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삶의 분명한 목적이 있었던 시므온!
자신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했던 사도 바울을 기억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십자가의 구속사역과 모든 공적 업무를 수행하신 이후 죽어가시면서 십자가상의 가상칠언 중 ‘테테레스타이’(다 이루었다!It’s Finished!)1)라고 하지 않았는가?
-다 이루었다는 말의 의미가운데, ‘그림을 그린 화가가 자신이 그림을 다 완성하고 더 이상 수정할 것도, 보정할 것도 없는 완벽하다는 의미로 그 말을 썼다고 한다’
시므온의 ‘다 이루었다’는 표현은 바로 눈크 디미티스!이다.
자신의 길, 소명을 다했다는 시므온의 한 마디!
‘주재여, 이제는 종을 놓아주시는 도다!’
하지만 지금 예수님은 사역도 시작하지 않으셨다. 공생애 사역을 하려면 시간이 다소 남았다. 어린 예수님이 완전히 영적으로 탁월하다 하더라도 아직은 십자가의 길과는 다소 물리적인 시간이 남아있다. 하지만 시므온의 미션은 여기까지였다. 메시야! 민족과 나라, 열방, 인류를 위한 구원자, 메시야를 위해 그토록 기도했던 대망했던 시간들, 그런데 그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만났고 뵈었다는 것으로 그의 미션은 종결되어진 것이다. 거기까지가 시므온의 사역이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여러분은 인생 말년에 시므온처럼 ‘주여, 이제는 종을 평안히 놓아 주소서’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눈크 디미티스라는 이 말씀은 14세기 때까지 찬송시로 사용되어졌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고군분투의 영적 삶, 돌아볼 때 후회하지 않을 삶, 자기의 소명과 소임을 다한 후에 가지는 후련함과 만족함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소원합니다. 1-3브리스가 회원 여러분의 인생이 시므온과 같은 생이길 소원한다. 하나님의 소명을 완수한 후, 마침표를 정확히 꽝 하고 찍기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늘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우리는 또 한 사람의 인물을 보고자 한다.
안나: 금식과 기도로 섬기며 기다리던 사람(36-40절)
안나의 삶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그녀의 삶이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36-37절: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그녀의 소망은 오직 그리스도뿐임을 알 수 있다. 안나의 나이가 84세인지, 아니면 과부된 후 84년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오랜 세월동안 그녀는 외로이 살았다는 것, 그리고 외롭지만 주님 앞에서 신실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성경학자들은 과부된지 84년이라면 그녀의 아주 어린 나이인 14세에 결혼하였다고 치고, 7년 동안 결혼생활을 하다가 84년, 그럼 무려 105세가 되는 할머니인가? 긴가 민가 한다. 하지만 성경학자들은 안나의 나이는 84세였을 것으로 의견을 모은다. 왜냐하면 105세가 진짜 많은 나이이긴 하지만 105세의 나이로 이렇게 활발하게 사역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인생은 얼마나 보람 있는 삶이었겠습니까?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밤낮으로 했던 삶의 방식이 무엇이었는가?- 금식하며 기도했던 삶! 그렇다고 1-3브리스가 회원들이 모두 집에 가지도 않고 성전에서만 지낸다면 각 가정이 난리가 날 것이다.
중요한 포인트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으로 생활했던 안나의 삶을 닮자는 것이다. 안나는 여러분들보다 더 고통스러운 인생의 역경이 있었다. 충분히 짐작가능하지 않은가? 그녀의 삶은 처절한 한이 서린 삶이었지만, 그 한과 고통과 아픔이 그녀의 삶을 더 경건하고 거룩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고통과 아픔이 있는가? 가정의 배우자나 자녀들로 인해, 가문으로 인해 아픔과 상처가 있는가? 해결해야할 문제와 근심거리가 있는가? 여러분이 몸담고 있는 브리스가 여전도회 가운데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가? 그 모든 환난과 근심과 염려로 인해 여러분이 성전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안나처럼 더욱 성전을 떠나지 않기를 바란다. 주 앞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기를 바란다.
힘들면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우리는 힘들면 힘들수록 더욱 주의 전에 모여 기도하고, 금식하고, 주를 가까이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인줄 믿는다.
여러분, 허물많고 죄많은 우리가 주님을 닮기 위해선 다른 게 없다. 환난과 고통의 터널을 지나야만 한다. 사람은 가만히 놔두면 죄를 짓고, 죄를 먹고, 죄를 마시고 사는 인생이기 때문에 자기가 얼마나 처절한 죄인인지를 알려면 고난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 고난의 풀무를 통해 우리의 인격이 주님의 인격을 닮아가는 것이다. 인생에게 고통이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천국의 시민권자가 되려면 천국의 시민답게 훌륭한 인격, 겸손한 인격이 주어져야 한다. 그것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철저한 하나님의 고난의 학교를 통과하여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겸손할 줄 안다. 은혜라는 뜻의 이름, 안나, 그녀의 모든 고난의 삶의 과정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두텁게 만들었다! 인간적으론 별 재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한나를 하나님은 어떻게 사용하셨는가?
예언자로 사용하셨다. 38절입니다.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안나는 자신의 할 일을 다했습니다. 그녀는 세례요한과 같은 역할을 여자로서 친히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안나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오래 장수하였다고 합니다. 안나 ‘은혜’라는 의미! 안나는 시므온과 마찬가지로 나름대로의 예수님의 환영하고 맞이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세례요한에 앞서 말이다.
하나님은 홀로 된 한 여인의 일생을 통과하면서 그녀를 단련시키셨고, 그녀의 금식과 기도와, 성전중심의 모든 삶을 받으셨고, 헌신을 받으셨다. 그녀의 헌신은 어린 아기 예수를 환대하고 예비하는 결과를 낳았다. 여러분의 헌신과 섬김은 여러분의 가정에 충분한 희생의 밑거름으로 작용해왔을 것이다. 이제는 여러분의 교회를 향한 헌신과 섬김과 기도가 교회의 부흥과 발전의 밑바탕이 되길 소원한다.
그리고 누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39절에서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시므온과 안나가 예언했던 삶과 사역을 준비하기 위해, 시므온과 안나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다가 늙어가고, 후에 그 메시야의 주인공이신 소년기의 그리스도는 율법적으로 완전한 삶을 사셨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준비단계의 두 사람의 든든한 배경가운데, 예수님은 이렇게 자라가셨습니다. 40절입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저는 이 두 사람, 시므온과 안나의 삶과 바탕, 영성의 백그라운드 위에 예수님께서 더욱 온전하게 자라가실 수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우리 교회 다음 세대 또한 전교인들 가운데, 특별히 1-3브리스가의 헌신과 섬김과 열정과 기도의 바탕위에 더 바로 세워질 것으로 소망한다.
우리는 이 노년의 두 신자들에게서 어떤 성품을 배울 수 있습니까?
1)의롭고 경건, 영적이었다! 무엇보다도 기다림! 오래 참았다. 기도로 준비했다!
2)기다림...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믿음!
우리가 지금 준비해야 할 것은?
오실 메시야를 기다렸던 그들, 메시야 사역을 구비했던 그들!
이제 1-3브리스가 회원들은 오신 메시야,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것을 기다리는 소망으로 시므온과 안나처럼...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라! 1-3 브리스가 회원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고통으로 인해 더 주님을 대망하시길 소원한다. 여러분의 기도가 다음세대를 위해, 교회, 아니 대한민국의 영적 부흥과 발전의 디딤돌이 됨을 기억하라! 세월호의 침몰로 인해 생사를 알 수 없는 자녀와 가족을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을 여러분이 무엇보다도 더 잘 알기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대했던 시므온처럼 간절히 기도하는 1-3브리스가 회원들이 되길, 모든 주의 백성들 되기를 소원한다.
오래참음...메시야를 기다렸던 사람들의 특징!
소망의 사라진 시대에. 소망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소망의 사람이 되자!
그리하여 하나님을 섬기면서 늙어간 안나와 시므온처럼 믿음의 인생을 온전히 살다가 주님 앞에서 감사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주의 권속들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①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나서 더 이상 보탤 것이 없을 때
②장사꾼이 노예 시장에서 노예를 사고 값을 모두 지불했을 때
③재판관이 법정에서 죄에 대한 모든 대가를 치러지고 깨끗하게 되었을 때
④제사장이 성전에서 흠이 없는 제물이 온전히 바쳐졌을 때에 사용하는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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