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때때로 어떤 사람은 큰 자라고 하는가? 큰 사람? 원어성경에선 메가스1)라는 말을 사용했다. great라는 말을 사용했다. 큰 사람, 위대한 사람? 위대한 인물?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주 앞에 큰 자’라는 말을 했다. ‘주 앞에’라는 말이 잘 안 다가오니깐 반대편에서 의미를 탐색해보자.
주 앞에’ 주님은 하나님이시니깐, 반대말은? ‘사람들(인간들) 앞에’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 앞에서 큰 자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인기가 많은 연예인? 많은 10대들이 흠모하고 동경하는 연예인들, 꽃미남꽃미녀, 훈남훈녀? 인기가 많은 만큼 그들의 사생활 하나하나까지도 철저하게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이 연예인이다. 언론과 카메라의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는 사람들, 그 인기가 많은 사람을 큰 사람이라고 하는가? 그건 아닐 것이다. 그들은 단지 인기가 많은 연예인일 뿐이다.
죽어서도 인기가 많은 연예인이 있다. 미국의 제임스 딘이다. ‘자이언트’라는, ‘에덴의 동쪽’이란 영화에도 출연했는데, 인기도 엄청 많았다. 그 제임스 딘이 불행한 교통사고로 죽은 그 고속도로 상에는 제임스 딘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행사를 한다고 한다. 죽어도 그 이름이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회자되고 입에 오르내리는 인기연예인, 이전에 우리나라 자동차 광고에도 등장하기도 했다. 죽어서도 다른 나라의 티비에 등장할 정도로 인기 있는 이런 사람이 정말 사람들 앞에서 큰 사람인가?
과연 우리들 중에 후세의 사람들에게 죽어서도 꺼지지 않는 인기의 불꽃을 남기는 자들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대단하지 않은가? 정말 자이언트한 인기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친구의 인기의 비밀이 있다. 그 비밀은 그가 최고의 전성기에 꽃다운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이다. 전성기의 최고의 꽃다운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늘 ‘꽃미남 제임스 딘’으로 기억한다는 것이다. 만약 제임스 딘이 나이 많이 들어서 70, 80세 죽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청년, 중년, 노년의 모습을 다 보았기 때문에 별로 크게 인상적이지 않을 것이다.
교통사고로 안타깝게 죽었기에 지금도 제임스 딘을 추모하며 그 고속도로에 사람들이 모이는데, 만약 노인이 되어 죽었다면 사람들은 그 사람의 마지막 죽은 모습을 보고 별 인상이 남지 않을 것이다. 볼 거 다 보았기 때문에 별로 어필할 것도 없다.
그래서 제가 한 가지 귀뜸해 드리는데, 여러분들이 만약 후세들에게 인기가 있으려면 뭔가 하나 걸쭉한 해 놓고, 최고의 절정기에 불의의 사고나 요절을 하면 된다. ㅋㅋ
아니면,
돈(재물)이 많은 자를 큰 사람이라고 하는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김우중의 책을 정말 감동 깊게 읽었던 나의 대학 초년생 시절, 그러나 그의 뒷모습은 너무나 초췌하다. 알렉산더 대왕은 젊은 나이에 그렇게 많은 영토와 대륙을 정복했지만, 가지고 간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자신의 무덤에는 자신의 빈손을 강조하며, 묻으라고 하지 않았나?
권력과 명성이 탁월한? 업적과 공적이 많은 사람을 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카르타고의 한니발과 로마의 스피키오가 나눈 대화이다.
스키피오: 우리 시대의 최고의 군인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한니발: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다.
스키피오: 첫째는 그렇고 그럼 두 번째는 누구인가?
한니발: 병법의 천재, 에페이로스의 피로스 왕이다.
스키피오: 그렇다면 세 번째는 누구인가?
한니발: 바로 나, 한니발이다.
스키피오: 만약 포에니전쟁에서 로마(스키피오)가 지고 당신이 이겼다면?
한니발: 그럼 내가 제일 첫 번째이다.
피로스왕은 자기 아버지가 너무나 많은 영토를 정복했다고 투덜거리기도 했던 왕이었다. 그러한 명성, 명예, 권력...사람들 앞에서의 fame~
성도 여러분!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의미 있고 인상 깊은 대통령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부산에 중고서점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 서점 주인은 박정희 대통령을 노랠 불렀다. 노무현 반대하면서 말이다. 광주에 가면 정치이야길 끄집어내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이 사람들 앞에선 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신체조건, 신장(키)이 큰 사람을 표면적으로 ‘진짜 큰 사람’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골리앗과 같은 거인, 3m의 거인 같은 사람은 큰 사람이다. 키는 굉장히 컸는데 얼굴생김새는 꽃미남이었을까? 거인인 사람치고 얼굴이 미남인 사람은 좀 드물지 않나? 최홍만도 거인이다. 농구선수들, NBA의 농구선수들! 미국의 야구선수들은 진짜 크다. 얼굴을 보면 진짜 동안이고 어린애 같은데 막상 실제로 보면(비록 TV지만) 진짜 크다!
아무튼 큰 사람은 키가 큰 사람, 덩지가 큰 사람, 덩발 좋은 사람! 사람들 앞에 섰을 때 한 주먹 할만한 사람! 그런 사람을 향해선 big이라 한다. great라고는 하진 않는다. 오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메가스’, ‘큰’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특별한 사람을 일컫는 것일 것이다. 큰 인물이자 멋진 사람은 종종 있다. 빌 게이츠?-자신의 엄청난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갑부-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 대통령? 스티븐 시걸?(난 이사람 진짜 크게 보인던데).ㅋㅋ 더군다나 사람들 앞에서, 사람들이 평가하는 기준에서 큰 사람은 대충 이런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 큰 사람이 곧 주 앞에서 큰 자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근데 성경에선 요한, 세례 요한을 주 앞에서 큰 자라고 말한다.
주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큰 자라고 했다. 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그러한 삶을 살 것임이 예견되어졌다. 더군다나 모태에서부터 성령 충만함을 입었던 것이다. 태어나서부터 사람의 생이 시작되는 것인데, 성경상의 예언들을 보면 출생 전부터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을 볼 수 있다. 출생 전부터 성령 충만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주 앞에서 큰 자’……성경상에서 보면 그가 술을 멀리하고 입에 대지 않는 철저한 절제와 자제의 삶을 살았던 것이 크다. 그러한 삶의 절제와 자체의 습관이 성령충만함의 바탕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근데 중요한 것은,
(15)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이것은 그의 삶에 대한 평가, 그의 존재에 대한 평가이다.
포도주나 독한 술(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이것은 출생 후 에 있는 일이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이것은 출생 전에 예견된 사실이다.
출생 전의 성령 충만함이 예정되어 있어 요한이 포도주와 독한 술, 소주의 음료를 마시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결정론적 관점이다. 이것은 출생 전의 하나님의 섭리이지만, 요한의 후천적인 삶의 노력과 결실이 함께 모여진 것이며, 이러한 결실은 하나님 앞에서 ‘큰 자’라는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 가운데 선의 선택함의 조화 가운데 나타난 결과가 바로 ‘주 앞에서 큰 자’가 아닐까?
여러분들이 태어날 때 어떤 몽조와 환상과 비전이 있었는가? 주의 사자가 나타나는 세례요한과 같은 비전은 아니더라도 나름대로의 그 몽조와 환상과 비전이 이루어지려면 오늘 세례 요한처럼 자신을 그 비전 앞에 드리는 헌신이 필요하다. 그냥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적극적인 삶의 습관이 필요하다. 세례 요한에겐 사람들이 즐기는‘포도주와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는’금욕적인 삶의 방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비전을 위한 절제와 금욕의 삶이 있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당대 종교지도자들은 이토록 절제하면서 사역을 한 세례요한의 이러한 사역스타일과 예수님의 사역스타일을 비교하면서 오히려 예수님에 대해 책잡으려고 하기도 했다. 왜 세례요한은 금욕적이고 경건하게, 너무나 외롭고 소박하게 사역하는데, 왜 예수님은 늘 사람들을 몰고 다니면서, 식사도 자주 하시고, 집회도 자주하시고 완전 세례요한과 다르게 사역하느냐고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사역스타일의 차이였다.
세례 요한은 스스로 자원하였다. 자신이 부요하거나 부하게 살 수 있었고 그렇게 사역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스스로 청빈과 금욕을 신조로 살았던 것이다. 그것은 성경적이 예언의 성취가 세례 요한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습관으로 성취되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과 비전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그 비전을 성취하기 위해선 지속적인 노력과 헌신이 필요하다. 여러분은 거룩한 비전과 꿈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자신을 절제하며 경계하며 살고 있는가?
세례 요한의 삶과 사역스타일을 한 번 보라!
(막 1:6)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말 그대로 ‘순례자(나그네), 고행자’의 유형이었다. 그것도 광야에서. 세례 요한이 집에 돈이 없거나 빚이 많거나, 가족 모두 없는 고아라서 이런 삶의 유형을 취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구별된 자였고, 그러한 구별된 자의 규율을 충분히 지키면서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을 잘 준수하였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소명과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누워서 떡 먹기 식으로 막연한 기다려선 아니 된다. 막연하게 어찌 되겠지!라는 그런 부정적인, 소극적인 자세는 버려야 할 것이다. 종종 성도님들 중에 자신이 예전에는 정말 영적으로 대단했고, 비전도 꿈도 대단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고백하는 경우를 본다. 그런 말은 지금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말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비전의 성취를 위해서 자신의 욕망과 인간적인 우선순위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삶의 라이프스타일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3.30 전교인 입양의 날이란 프로젝트, 하나님의 비전을 위해 우리가 세례요한처럼 광야에 나가는 자발적인 헌신이 필요하다. 거룩한 비전의 성취를 위해, 목표가 200명인데, 우리가 움직인다면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꿈쩍하지도 않으면 주일날 외치는 구호는 한낱 슬로건, 메아리에 불과할 것이다. 여러분의 자발적인 헌신과 섬김이 필요하다.
저희 대학부, 청년회에선 지난주 임원들과 모임에서 이번에는 이렇게 준비했다. 작년에 행복나눔축제시에도 이런 일정이 있었다.
*청춘의 봄 3주 일정
첫째주: 새친구VIP와 COffee Time을 가지고,
둘째주: 새친구VIP와 CCM동영상을 카톡을 선물하고,
셋째주: 새친구VIP에게 마음의 편지를 쓰기
물론 이렇게 해도 새친구는 안 올수도 있다. 시대 자체가 완악해서 마음의 문을 잘 안 연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도 절반이 이 일정에 동참할지 의문이다. 기성세대나 신세대도 마음이 웬만해서 잘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파레토의 법칙이란 게 있다. 100명 중에 20명이 80명을 커버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100명의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80은 이야길 듣지 않거나 방관하고 오로지 20%정도만이 순종하여 움직인다는 법칙이다. 이번 전교인 입양의 날에 반드시 순종하는 자에겐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입양아와 커피를 마시든지, 과자를 사주던지, 편지를 쓰던지, 선물을 사주던지 어떤 방식으로든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나아가는 자는 바로 우리 시대의 세례요한인 줄 믿는다. 우리시대의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인 것이다.
해도 안 되더라! 해도 별 소용이 없더라!고 무조건 주저앉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다음세대에 한국교회의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저는 20년 전에 들었던 그 말이 아직도 귀에 맴돈다. 전에도 한번 말씀드렸다.
“London was changed.
Society was changed.
But Church was not changed!”
우리 도시도 변했고, 사회도 변했는데, 교회는 왜 변하지 않았냐는 그 런던기자의 지적이 가슴판에 남는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H. David Thoreau라는 작자가 있었다. 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였지만 세속의 부와 명성을 쫓지 않고 고향인 콩코드로 돌아와 자연 속에서 글을 쓰며 일생을 보냈다. 초월주의 사상가 랄프 왈도 에머슨의 영향을 받아, 자연을 통해 희열을 얻는 삶의 방식을 깨닫게 된다. ‘자발적 가난’을 주창!
소로우는 1845년 콩코드 주변의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집을 짓고 최소한의 간소한 생활을 하면서 이른바 ‘자발적 가난’이 가져다 주는 풍요로움을 추구했다. 생활에 필요한 만큼만 밭을 일구고 나머지 시간에는 자유롭게 여가를 즐기면서 동식물을 관찰하거나 독서와 명상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월든’은 이후 생태문학의 고전으로 평가받으며 ‘19세기의 경전’으로 칭송되고 있다.
1860년 어느 추운 겨울날, 숲에서 나무의 나이테를 세다가 독감에 걸린 소로우는 이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결국 1862년 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소로우는 신앙적으로 본받을 것이 없다. 하지만 자신의 철학을 삶으로 실현한 인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을 위해 자발적 가난을 삶으로 보여준 세례요한에 대해서 하나님은 ‘주 앞에서 큰 자’라고 하셨다. 그가 <주 앞에 큰 자>라고 여김을 받는 것은 단순한 술을 절제하고 마시지 아니하는 이런 소극적인 대목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절에 세례 요한의 삶의 면모를 그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16)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하나님 앞에서 큰 자, 주 앞에서 큰 자의 정의는 바로 16절 구절에서 나온다.
소극적인 금욕의 자세를 넘어, 성령 충만한 선천적 자질을 넘어, 후천적인 삶의 평가는 바로 ‘많은 영혼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자’이다. 하나님께로 리턴하는 자를 많게 하는 삶의 결과가 바로 ‘주 앞에서 큰 자’의미이다.
[NLT]눅 1:16
And he will persuade many Israelites to turn to the Lord their God.
17절에 좀 더 부연설명하자면,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세례요한은 엘리야의 심장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백성들에게 전했던 사람이다. 주를 위해 세운 백성을 준비하셨다고 한다. 이번 3.30 전교인 입양이 한국교회의 다음세대를 세우는, 우리 교회의 다음세대를 세우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길 소원한다. 사람들이 무어라고 하던지 간에 하나님의 비전 앞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을 역사를 일으키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과연 주앞에서 큰 자의 사명을 감당하길 원하는가? 우리는 비전의 원대함 앞에 우리는 한없이 작고 허물과 죄로 죽은 인생이지만, 순종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일하실 줄 믿는다.
우리는 과연 어떠한 ‘큰 삶’을 원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세례요한은 주앞에서 큰 자였다. 야베스의 기도에서 야베스가 이야기했던 믿음의 지경이 넓혀지기를 소원한다. 우리의 집의 평수, 사이즈가 커지면 편리하고 좋다. 좁은 차를 바꿔 더 큰 차, 더 좋은 차, 차의 평수를 늘리면 더 편하고 좋다. 더 많은 나의 휴식과 쉼과 여유가 있으면 재충전할 기회도 많다 훨씬 좋을 것이다. 사람마다 다들 자신을 크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우선순위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존재인지, 아니면 그것이 자신의 소유(물)인지 그것이 관건이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소유를 크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를 크게 하려고 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크기를 늘리는 어떤 방법이나 도구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올인all-in할 때 그의 삶은 자연스럽게 커지는 것이고, 그는 자연히 ‘주 앞에서 큰 자’가 된 것이다.
성도 여러분, 주 앞에서 큰 자로 서기를 소원한다.
하나님의 비전, 3.30 전교인 입양의 날을 맞이하여 영적 입양아를 위해 헌신하고 섬기는 수고가 있기를 원한다. 하나님 우리에게 입양아를 주시고, 입양자의 수고가 있길 원한다. 믿음의 수고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우리가운데 있게 하소서. 우리가 일하면 우리가 일할뿐이지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하셨으니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옵소서! 세례요한처럼 주 앞에 큰 자라는 칭찬을 받는 믿음의 사람들 되게 하소서! 다같이 합심하여 기도하자!
1) …… mevga" ejnwvpion ((tou')) kurivou,
For he shall be great in the sight of the Lord, and shall drink neither wine…
주님 앞에서 큰 자, 주님의 시각, 주님의 면전 앞에서 In the face 큰 자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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