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굉장한 예술 작품으로 취급한다. 그것은 비극미, 즉 비극만이 주는 장엄한 맛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왕하 9장에 등장하는 또 다른 비극의 장면을 목도하게 되는데, '어떤 비극의 주인공이길 원하십니까?'라는 주제로 설교한 포스팅이다.
왜 희극도 아닌 비극이 사람들에게 찬사와 눈물과 인정을 받는단 말인가? 사람의 영혼과 정신을 뒤흔드는 그 무엇이 있기에 세익스피어의 비극은 지금도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측면에서 세익스피어의 비극은 문자 그대로 비극 이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비극이 뿜어내는 장엄한 멋과 카타르시스가 관객을 감동시키게 때문이다.
세익스피어의 비극과는 다른 처참하고도 야만적인 비극
하지만 오늘 우리가 보는 한 사람의 비극은 읽는 독자들, 보고 있는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류의 비극이 아니라 말 그대로 ‘비극’,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처참하고도 야만적인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태어나는 것이지만 잘 죽어야 한다고 말들을 한다. 죽는 순간에 비참하게, 꼴사납게 죽으면 그 죽는 당사자는 그만이지만, 그 후손들이 그 후유증을 앓게 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잘 죽으면, 후손들도 복을 받게 된다.
짐 엘리엇 선교사의 순교는 비극이긴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선 다르다
짐 엘리엇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DVD를 본 적이 있는데, 그는 살인족인 아우카 부족(에콰도르의 와다니 족)의 창에 찔려 죽어갔다. 그를 포함한 5명의 모든 선교사들은 아우카부족을 만나 몇 마디 나눠보기도 전에 창에 찔려 죽었다. 한 선교사는 창을 들고 돌진하는 원주민을 향해 권총을 꺼내 들었지만 그들을 향해 총을 쏘지 않고 하늘을 향해 쐈다. 짐 엘리엇이 창에 찔려 죽어가면서 아우카 부족의 한 친구를 재차 창을 찔러 그를 죽이려고 할 때 그의 마지막 한 마디는 바로 이것이었다.
“우리는 당신들의 친구입니다.”
그렇게 죽어간 5명의 순교자들로 인해 아우카 부족은 훗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그 중에서 한 명은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 훗날 짐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그 부족을 위해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다는 후문도 있다.
짐 엘리엇의 이 순교사는 비극이지만 감동의 비극이고, 하나님 나라에선 희극중이 희극이다.
아합 왕가의 몰락, 이세벨의 처참한 최후가 보여주는 비극
그러나, 오늘 왕조 역사상 가장 사악했던 왕비로 꼽히는 이세벨, 그 여인의 죽음의 장면은 이와는 정반대이다. 30절에 이세벨은 자신이 저지른 수많은 죄악으로 인해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임을 미리 간파하고 있었다. 왕하 9:22에서 보더라도,
22-요람이 예후를 보고 이르되 예후야 평안하냐 하니 대답하되 네 어머니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하더라
악처라도 이런 악처가 없었다. 남편 아합이 전쟁터에서 죽고 이스라엘에는 심한 폭풍우가 예상되었다. 그 중심에 예후가 있었다. 사건들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을 감지한 이세벨은 냉정한 초연함과 심지어 아이러니한 익살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는 눈과 머리를 단장했는데, 이는 그녀가 예후를 유혹하려 했기 때문이 아니라(그녀의 말이 이 사실을 보여준다), 이 세상을 품위 있게 떠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시작하는 말은 18, 19, 22절의 예후에게 전한 질문을 다시 반복하지만(문자적으로‘ 그것이 평안이냐?’). 이번에 그 질문은 의도적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녀는 예후를 시므리라고 부름으로써, 그에게 왕을 죽였으나 단지 7일 만에 자신도 처참하게 죽고만 또 다른 군대장관을 생각나게 했다(왕상 16:9-19).
그녀의 죽음은 무시무시하게 야만적이었다. 그녀는 창밖으로 던져졌고 피가 담과 말에 튀었다. 그리고 그 시체가 밟혔다. 사체가 완전히 엉망이 된 것은 35절에서 알 수 있다.
35-그 두골과 발과 그의 손 외에는 찾지 못한지라
(아마도 예후가 먹고 마시기 전에 이세벨의 사체를 개들이 먼저 건드린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36절에 말하듯이 모두 하나님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결과이다. 엘리야를 통해, 엘리사를 통해, 그리고 모반자이자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 예후를 통해서 말이다. 그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한지 37절에 나온다. ‘ 그 시체가 이스르엘 토지에서 거름같이 밭에 있으리니 이것이 이세벨이라고 가리켜 말하지 못하게 되리라 하셨느니라’타인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고 엄청난 영적, 육적인 죄악을 범한 이세벨의 최후는 비참, 그 자체였다! 그의 아들 요담의 최후도 만만치 않았다.
- [왕하 9:24-왕하 9:25]
- (24)예후가 힘을 다하여 활을 당기어 요람의 두 팔 사이를 쏘니 화살이 그의 염통을 꿰뚫고 나오매 그가 병거 가운데 엎드러진지라(25)예후가 그의 장관 빗갈에게 이르되 그 시체를 취하여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밭에 던지라 네가 기억하려니와 이전에 너와 내가 함께 타고 그의 아버지 아합을 좇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이 아래 같이 그의 일을 예언하셨느니라
우리가 이 여인의 최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합 가의 악을 방치해 두시지 않고 전멸시켜 버리셨다는 점이다. 바아사의 집안같이 또 여로보암의 집안같이 전멸시키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 현 세상의 어떤 세력이나 반항하고 멸시하고 악을 행사하는 세력, 그것이 국가의 세력이든, 개인의 세력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냥 방치해 두지시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한참 방치해 두었다가 내세에서나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아합의 집안을 하나님은 현세에서 폐하셨다. 그 집안은 불과 4대에 걸쳐 임금 노릇을 했다. 오므리, 아합, 아하시야, 그리고 요람까지 불과 한 45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폐하시고 특별히 아합의 경우는 불과 20여년 만에 폐하시고 만 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한 가문의 패망과 멸절이었다. 혹시나 우리가 타인에게 범죄한 행위나 죄의 이력이 있다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해결하고 용서를 구하고 평화가 넘쳤음 한다. 아합과 이세벨의 빗나간 욕심과 우상숭배와 사악한 행위는 그 도가 너무나 지나쳐 흔적조차 찾아 볼 수가 없다. 자신을 위해, 그것도 45년간 이란 시간동안 왕조의 권력자 행세를 하기 위해 그렇게 발버둥친 꼴이 되었지만 결국 그들은 심판을 면하지 못했다. 현세의 영광과 눈 앞의 욕심을 위해 휘둘렀던 죄악의 광기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야만 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걷고 있는 길은 어떤 비극의 길인가? 비록 힘들고 어렵고 맘 아프지만 밀알처럼 생명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영혼을 구원하는 비극의 길인가? 자신과 개인과 집단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욕심과 권력과 인기와 같은 잠시 후면 사라질 것들에 목을 맨 나머지 주위도 아랑곳하지 않던, 자신의 생명, 자신의 소유, 자신의 모든 것이 소중한 것을 안다면 다른 이의 모든 것도 소중한 것임을 알아줘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비극의 전철을 밟아선 아니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비극의 주인공이길 원하시는가?
저주받은 인생의 비참한 비극의 주인공의 길은 여러분과 전혀 상관없기를 소망한다. 순교자의 아름다운 비극의 주인공으로 여러분의 이름이 올려지길 원한다.
오늘은 열왕기하 9장 30-37절에 나타난 아합가문과 이세벨의 최후를 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은 이들의 비극적인 결말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또 다른 비극 아닌 비극에 대한 대목도 같이 상고해 본 설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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