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열왕기상하

열왕기상 19:1-4, 엘리야의 부흥(부활)

by Message.K 2024. 3. 31.
반응형

구약성경 열왕기상 19장 1-4절을 가지고 '엘리야의 부흥과 부활'에 대한 주제로 대학 청년부를 대상으로 한 설교이다. 부활을 기대하지만 그러하지 못한 현 시대의 원인과 이유, 엘리야의 부흥이 지체된 이유, 그러나 다시 회복되면서 부흥과 부활의 자리로 나아가는 대목을 살펴보았다.

 

열왕기상 19:1-4, 엘리야의 부흥(부활) 설교 썸네일
열왕기상 19:1-4, 엘리야의 부흥(부활)

 

 

 

부활을 갈망하는 시대의 오만과 편견

오늘은 부활절이다. 1년마다 돌아오는 절기이다. 고난주간 후에 부활이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고난이 없으면 부활이 없다는 것이다. 고난이 없으면 영광이 없듯이, 고난과 고통의 시간이 없으면 부활의 영광도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처절한 십자가가 없었다면, 예수님의 화려한 부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No Cross, No Crown!

  이것은 우리 인생의 진리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모두다 편의주의와 쾌락주의와 한탕주의에 빠져있다.

 

1. 편의주의comfort-mania

  편안한 것을 너무나 추구하는 시대가 되었다. 윈도우가 나오기 전에 ms-dos가 있었다. 일일이 명령어를 다 쳐야 했다. 하지만 윈도우가 등장하면서 키보드 없는 마우스시대가 열렸다. 사람들은 마우스가 처음 나왔을 때 그 마우스가 무언지 의아해했다. 마우스는 쥐인데? 하지만 빌게이츠가 만든 윈도우는 마우스를 같이 등장하면서 전 세계의 가정과 직장을 석권했다. 그래서 50조가 넘는 돈을 거머쥔 빌 게이츠를 13년 째 세계 최고의 갑부의 자리매김을 해 준 것이다. 힘들어하는 것을 싫어하는 시대이다. 아주 이름 있는 회사에 어렵게 들어갔지만 일이 너무 힘들다는 이유로 1달 만에 나오는 취업생을 보았다. 너무 바쁘고 힘든 것은 우리 시대의 적성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2. 쾌락주의pleasure-mania

  우리 시대는 쾌락으로 뒤범벅되어 있다. 사탄의 3S정책-sex, sports, screen

사람들은 편안한 쿠션에 앉아 모든 것을 즐기는 시대가 되었다. 가만히 있어도 죄를 지을 만한 여지는 너무나 많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거짓의 아비인 마귀는 현대인들을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혹하여 타락시키고 있다. 이러한 육체적인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밤문화와 어두움의 권세는 이제 우리의 친구로 자연스럽게 옆에 와 있다. 즐겁고 재미있고 웃기고 눈을 번쩍 뜨이게만 하면 도덕적, 윤리적인 기준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상대주의가 들어섰다. 텔레비전의 광고는 끊임없는 선정성을 요구하고 연예인들은 돈이 얼마이든지간에 이뻐지기 위해선,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선 주사-초등학교시절에 우리는 얼마나 주사를 무서워했는가?-도 스스럼없이, 칼질도 스스럼없이 하는 시대가 되었다. 눈에 보기 좋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육신적인 쾌락에 대해 끊임없이 목말라하는 시대와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기억하라!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들 정도로 부국강명을 누렸던 로마제국이 붕괴한 것은 바로 ‘도덕적 타락, 도덕성의 상실’ 때문이었다. 도덕성과 윤리성이 결여된 과잉적인 쾌락 추구는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의 뒷통수를 맞을 것이다.

 

3. 한탕주의hot-tube religion

 사람들은 ‘한탕주의’, ‘한방’, ‘대박’을 노리고 있다. 로또복권에서부터 시작해서 시험과 성적과 취업과 신앙에 있어서도 ‘대박’을 추구하는 추세이다. 점진적이고 조용한 성장과 진보를 추구하기 보다는 갑작스런 성장과 해결을 노리고 있다. 고난 없는 영광, 십자가 없는 부활...이러한 한탕주의는 ‘돈이면 모든 것이 된다, 돈이 최고!’라는 배금주의, 물질만능주의에서 연유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한탕주의를 경계하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는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하자 베드로는 대뜸 무엇이라 했는가? 그런 십자가의 길이니 고난의 길을 피해버리라고 말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마 16:23)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우리 시대는 편의주의, 쾌락주의, 한탕주의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고 깊이 심취해 있다. 이러한 영향력은 우리의 진정한 부활과 부흥에 큰 폐해를 끼치고 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엘리야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부활을 꾀하는 시간이 되었음 한다.

 

 

왜 부활과 회복이 지체되는가?-원인과 이유

엘리야의 개인사를 통해서 그가 영적인 부활과 영적인 부흥이 지체된 이유를 같이 나눠보자.

 

-말로 인한 정신적인 충격(2절)

 엘리야는 지금 이세벨이라는 ‘악의 화신’으로 간주할만한 그리스 신화의 메두사처럼 엘리야의 숨통을 조으고 있다. 기억할 것은 이러한 엘리야가 18장에서만 해도 의기양양했던 불의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했다는 사실이다. 850대 1의 엄청난 영적 전쟁과 신들의 전쟁에서 그는 간절한 기도로 그 영적인 승리를 쟁취했었다. 하지만 말 한 마디로 그의 삶이 흔들리고 있다.

(2)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한 마디 말이 이처럼 큰 파장을 일으킬 줄을 누가 알았는가? 그 대선지자였던 엘리야를 침몰시키는 이세벨의 발언이었다. 영적인 기적을 산출해냈던 선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말 한 마디로 이렇게 허물어지는 광경을 보라!

  우리는 이 대목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말 한 마디로 살기도 하고 죽을 수도 있는 인물이다. 그러기에 말 조심해야 한다. 지체들에 대해, 지체들에게 말을 할 때에 한 마디 잘 못 던진, 무심코 내뱉은 말이 폭언이 될 수도 있고, ‘살인의 언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연못가에서 즐거이 놀고 있는 개구리들에게 무심코 사람이 던진 돌로 개구리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피곤과 지침(4절)

(4)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엘리야가 지금 이봉주 선수처럼 몇 시간동안 마라톤을 한 것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의 대단한 영적인 박빙승부를 하고 먹지도 못하고 하루 동안 광야 길을 거닐었다. 얼마나 피곤했겠는가? 우리가 길을 가다가 목이 마르면 물이라도 마실 수 있지만 팔레스타인의 광야는 정말 살인적인 더위와 습도로 인해 기갈에 허덕일 수밖에 없다. 살인적인 더위로 인해 죽을것만 같았다. 사람하나 없는 그 곳, 광야에서 하룻동안 길을 걸었다. 너무 힘들었다. 너무 피곤하니깐 만사가 귀찮다. 자살은 그리스도인의 금지행위이고 자살하면 지옥간다는 말을 정말 귀에 딱지 앉도록 많이 들었던 엘리야였을 텐데 그도 인간인지라 너무 힘드니깐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주목할만한 것은 엘리야가 기도 아닌 기도를 하는데 ‘자살을 위해 구하는 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엘리야의 솔직한 고백이다. 우리가 정말 삶이 너무 힘들어 자살하고 싶을 때,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 엘리야의 자살시도, 자살기도를 기억하자. 자살하고 싶을 때 그 기분과 심경을 하나님께 한 번 이야기해 보라. 기도할 분위기가 아니다. 자살하고 싶을때는.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의 세밀한 마음의 풍경까지도 파악하고 계신다는 것을 꼬옥 기억하라!

 

  여러분은 어떠한가? 요즘 피곤한가? 지쳐 있는가? 학교생활과 교회생활과 가정의 형편과 모든 것들이 여러분을 지치게 하는가? 그러한 육체적인 피로와 정신적인 피곤이 여러분을 더 다운되게 만들 수도 있다. 천하의 불의 선지자, 엘리야도 다운되었는데, 너무 다운되어 자살을 생각했는데 나는 더 하지 않겠는가? 엘리야를 통해 위로를 얻기를 바란다.

 

-바쁜 스케줄과 바쁜 사역, 심도있는 일의 후유증(18장의 배경과 문맥적 상황)

  빌 하이벨스 목사님의 ‘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 Too busy not to pray’란 책제목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너무 바쁘다 보면 기도도 안 된다. 보통사람이 다 그렇다. 엘리야도 그러했다. 강력한 사역이 있었다. 왕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고 예언을 하고 우상들과의 전쟁을 혼자서 치루어야만 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너무 바빠서 어떻게 자신을 추스릴 시간도 없었다. 그래서 더 피곤했고 더 피로에 휩싸이게 되었다.

 

-소명에 의한 삶이 아닌 감정에 압도된 삶(13절)

 엘리야는 이세벨의 폭언에 휘청거렸다. 사역도, 일도, 삶도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피곤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너무 바빴고 지쳤다. 레포트도 써야하고 교회 임원일도 해야 하고 교회 이사문제로 인해 대학부까지 동원되었었다. 터원들도 신경 써야 하고 장학금은 받아야 하는데 봄의 유혹적인 시선뿐만 아니라 춘곤증까지...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환경과 상황을 탓하면 탓할 수 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어디에 있는가? 한번쯤 집에서 하루종일 잠만 잤으면 좋겠다, 모든 일상사와 일상의 의무와 짐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유유히 흔적 없이 떠나는, 잠수를 타고 싶은 계절과 분위기이기도 하다. 엘리야가 그러했다. 이세벨의 말로 인해 충격을 먹고, 도망치다 싶이 피난의 여행으로 간 곳이 광야의 로뎀나무 아래였다. 거기서 그는 너무나 힘겨운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40일 동안을 그곳에 보냈다.

(8)So he got up and ate and drank, and the food gave him enough strength to travel forty days and forty nights to Mount Sinai,* the mountain of God.

  

엘리야의 감정이 무너진 것이다. 사역도 성공적이었고 평가도 좋았다. 850대 1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한 장본인이었다. 그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던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주시기를 간구하면서 어떻게 기도하였는가?

(42)아합은 먹고 마시러 올라갔다. 그러나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몸을 굽혀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이러한 강력한 기도의 사람이 감정 하나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이러한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13절에서 말씀하신다.

(13)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는 지금 소명에 이끌린 삶이 아니라 감정에 압도된 형국이다. 40일 동안 이러고 앉아 있는 엘리야의 가냘픈 마음을 헤아려보라. 아마도 엘리야는 A형이지 않았을까?

 

  하나님께서 때때로 여러분에게 물으신다. 올해를 시작할 때의 넘치는 패기와 힘과 에너지, 그래 우리는 할 수 있어! 그리고 대학부수련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했다. 이번 학기는 어떻게든 잘 살아 보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개강을 하고 3월이 지났고 어김없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찾아왔다’, ‘바람 많은 이 곳에도 봄은 왔다’ 봄과 함께 하염없이 무너지는 우리의 경건의 생활들...엘리야가 그랬다. 피곤하고 귀찮고 사람들이 뭐라고 수근대고 교회는 어지럽고 봄은 유혹을 하고 있다. 감정에 따라 살아라!!! 하지만 우리가 그러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으신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리스도인이여, 소명에 의해 살아가자. 감정에 이끌려 살 때 돌아오는 후회는 정말 막심하다. 수업을 재껴보라, 학점이 나오지 않는다, 학점이 안 나오면 F가 뜨고 학사경고가 뜬다! 밤샘을 해 보라, 그 다음날을 잠으로 보상해야 하고 하루가 허무하게 지나가 버린다. 아 젊은 날의 아까운 시간들이여! 우리의 삶을, 젊음을,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부활을 막는 것들...

-영적 침체(3, 4, 9절)

3절-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폭언을 듣고 도망쳤다. 누굴 위해? 하나님을 위해? No~ 그 자신을 위해For his life

 윌리엄 템플은 ‘자기중심성’, ‘이기심’이 바로 죄의 근본이라고 했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할 때 영적 성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 침체가 온다.

4절-누가 그를 광야로 보냈던가? 아니다.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의로 광야로 들어갔다. 그런데 3절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에게 사환이 있었다. 그러니깐 비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적인 수종을 드는 심부름꾼, 종이 있었다는 것이다. 엘리야는 그 종과 함께 도망치며 피난길에 오르다가 그 종은 브엘세바에 두고 혼자서 광야로 들어간 것이다. 더 어두운 곳에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자신만의 감정과 고독과 외로움의 함정에 더 빠져보고자 그는 ‘스스로’ 광야로 들어간 것이다. 거기서 혼자 있으니 생각나는 것은 오로지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살’이었다. 진짜 아이러니하지 않는가? 사환이라도 옆에 있었으면 그런 생각은 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자기만의 무덤을 자기 스스로 판 것이다.

  영적 침체는 이처럼 혼자서 무덤을 파는 경우가 많다. 여러 사람들과 같이 고민하고 이야기하며 생활하는 사람들에겐 영적 침체가 찾아올 수 없다. 서로의 약점을 공유하면서 서로 돌아보고 케어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히브리서의 말씀을 보지 않았던가?

(히 10:24)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영적 침체에 늘 허우적대려면 혼자서 늘 생활해보라. 위험하다. 우리 인간의 죄인인지라 혼자 있으면 더 자기 자신을 상처 나게 만든다. 우리가 주일날 혼자서 집에서 개인예배를 드리지 않고 이렇게 공동체적으로 예배드리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9절-엘리야가 자발적으로 들어간 곳은 ‘굴’이었다. ‘그곳 굴’이었다. 물론 이곳은 하나님의 산 호렙에 있는 굴이었다. 모세의 시내산이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십계, 돌판을 받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이기도 하다.

  어둡고 침침한 장소에 혼자서 털어 박히기 위해, 짱 박히기 위해 잠수를 탔던 것이다. 최고의 위대한 잠수부는 엘리야였다!!! 영적 침체는 어둠의 장소와 친하다. 노래방이나 피시방이나 나이트클럽이나 술집에서 영적 부활과 부흥을 경험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 있는가? 없다. 영적 침체는 장소를 무시할 수가 없다.

 

-영적 교만(10, 14절)

(10)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14)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두 번씩이나 반복하고 있다. ‘나만 남았다, 나만 열심히 특심이다, 나만 살아남았다’. 자기중심성의 극치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왕상 19:18절에 분명히 엘리야의 신앙의 동역자들, 믿음의 절개를 지킨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나님은 반박하신다.

(18)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영적 교만은 영적 침체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엘리야의 영적 교만은 우상숭배하지 아니한 자신의 순수한 믿음의 절개에 대한 심각한 자부심과 프라이드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 교만이었다. Ex> 한국교회 내에서의 ‘고신’교단의 신사참배 거부에 대한 굉장한 자부심과 공명심의 일종의 영적 교만이 될 수도 있음을 주의!

 

 

 

부활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부활은 하나님의 만지심에서부터(5-8절)

우리의 영적 부활과 소생은 하나님의 기름부으심과 만지심에서 시작된다. 누가 나를 만져야 내가 일어설 수 있는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 5절: ‘천사가 어루만지며...’
  • 7절: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우리에게 부활이 있기 위해선 하나님의 만지심이 필요하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나를 만져주세요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만져주심, His Touch가 간절히 요구되는 시간이다. 내 삶과 가정과 직장과 학교와 교회와 민족과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만지심이 있기를 기도하자.

 

 

  -부활은 세미한 소리로부터(11-12절)

(11)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부활과 소생과 갱신함은 굉장한 소음을 동반하지 않는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하나님의 산 호렙’에 올랐다. 자신의 불평과 하소연을, 넋두리를 내려놓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크고 심각한 바람, 바위, 산, 지진...이러한 것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고 임재하시지 않았음을 기억하라!

  12절에 부활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엘리야의 영적 회복과 소생은 어떻게 출발하는가?

(12)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우리 대학부의 부흥은 ‘세미한 소리’,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를 듣는 가운데 일어난다. 우리 대학부의 부활은 하나님은 ‘세미한 소리’(조용하고 속삭이는 소리a small sound; a gentle whisper(NIV): a brief sound of silence: 조용하고도 곱고 섬세한 음성: 콜 데마마 닥카)에서 시작된다.

 

 여러분들, 일주일동안 얼마나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큐티책을 펴며, 성경책을 펴는가? 터장보고서를 보고서 많이 놀랬다. 여러분의 경건의 생활이 아직 훈련되지 않았음에. 하지만 희망은 있다. 지금부터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From now on~

  그냥 고만고만한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고자 한다면 지금과 같이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미지근하게’ 살아가면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미지근한 것을 굉장히 싫어하신다.

(계 3: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사람들은 찬양하는 자리에는 많이 모인다고 한다. 찬양은 대세이다. 흐름이다. 하지만 기도하는 모임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의 거침없는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찬양도 좋지만, 화려한 연주와 우렁찬 함성과 젊은 피가 주는 찬양의 제사도 좋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정한 부활과 부흥은 바로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 a small voice를 경청하는 것에서 시작됨을 기억하라. 엘리야는 이 세미한 음성을 듣고 다시금 일어나서 하나님의 사역을 잘 마무리하였다. 엘리야가 영적 침체와 영적 교만에 빠졌다고 해서 그가 지옥에 떨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솔직한 모습으로 인해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하셨고 불말과 불수레를 타고 승천하는, 살아서 천국으로 향하는 주인공이 된 것이다.

  우리 모두 세미한 음성을 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께 늘 민감하여 매일 매일 일어서며 부활하며 부흥하는 대학부가 되었음 좋겠다.

 

 

구약성경 열왕기상 19장 1-4절의 본문을 토대로 선지자 엘리야의 부흥이 지체된 이유와 원인을 살펴보면서 그가 어떻게 다시 회복되었는지, 다시 부활되었는지를 살펴보면서 영적인 도전을 가했던 부활절 대학부 예배 설교문을 공유해 보았다. 

 

 

 

열왕기상 19장, 영원한 챔피언은 없습니다

2014년 한 학기를 달려왔고, 전반전을 마쳤다. 오늘 이 수련회는 2014년 한 해의 어쩌면 축구경기의 Half-Time과 같은 시간이다. 하나님께서 오늘 전반전을 어떻게 돌아보고, 후반전은 어떻게 달려가

kkarl21.tistory.com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