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열왕기상 16장 23-34절에 등장하는 오므리 왕조에 대한 영적인 평가와 해석을 한 설교인데, 제목은 '누가 성공과 번영을 주는가?'이다. 오므리 왕조가 다스린 북 이스라엘을 앗수르의 살만에셀 2세가 '오므리의 집'이라고 할 정도로 번영을 누렸으나, 하나님 앞에서의 평가에 대해 알아보자.
Prologue...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화려했던 시기, 가장 황금기 같은 시기가 있었던가? 예를 들어, 우리 민족에게 가장 화려했던, 성공과 번영을 누리던 시기가 있었던가? 언젠가 헌책방 주인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대목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분은 박정희 대통령의 예찬론자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기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오늘 우린 투표를 했다. 여러분에게 성공과 번영을 줄만한 후보와 당을 지지하며 투표권을 행사했을 것이다. 이 사람, 이 당은 정말 우리 국민들, 우리 지역사회에 성공과 번영을 주었음 좋겠다는 마음으로 말이다. 나름대로의 기대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국가이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선진국이라고 하기엔 좀 머하고, 개발도상국의 때가 조금 남아 있지만 선진국으로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시기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의 현재 중점적인 산업은 공업-반도체, 항공산업, 통신위성, 컴퓨터, 핸드폰 등 첨단공업 발달, 3차 산업(서비스업) 다양화-에 이어 이제는 4차 산업으로 넘어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농업과 수산업 같은 1차 산업이 주를 이루었다. 고대에는 더 그러했다.
우리가 알다 싶이 이스라엘은 유리하며 방황하던 출애굽 광야시절을 지났다. 그들은 이제 가나안에 정착한 후 농업에 손대기 시작했다. 1차 산업인 농경 생활을 시작하면서 이스라엘은 바알 숭배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나님은 분명히 가나안의 신과 거민을 멸절하라고 명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들과 동거하게 되었고, 서서히 그들의 신들도 점차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스라엘인들은 농사를 처음 짓기 시작하면서, 적절한 비와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며 이방신인, 가나안 신들의 능력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있어 바알은 성공과 번영을 약속해주는 존귀한 존재로 등장하게 되었다.
누가 성공과 번영을 주는가?
오늘날도 우리는 하나님 대신 우리에게 성공을 보장해준다고 하는 것들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그 우상들이 지껄이는 유혹의 속삭임을 듣는다.
“이것만 있으면, 이것만 하기만 하면...”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이 땅에서 성공과 번영을 목표로 하여 좇는 무리가 되지 말고,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따라야 한다고 분명히 선포하고 있다. 오므리 왕가는 이러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오므리 왕가의 오므리, 그리고 그 아들 아합을 보면서 성공과 번영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같이 나누었음 한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성공과 번영, 그리고 형통함의 기준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는 형통한 사람, 성공한 사람은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가? 우리가 잘 아는 형통한 자를 대변하는 인물, 바로 요셉을 들 수 있다.
- (창 39:23)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 (NIV)The warden paid no attention to anything under Joseph's care, because the LORD was with Joseph and gave him success in whatever he did.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살펴볼 것은 성경에서 ‘형통’이란 말을 쓰고 있는데는 항상 따라다니는 것이 있다.
- (수 1:8)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 (시 1: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 (시 1:3)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 (슥 7:7)여호와가 이전 선지자로 외친 말을 너희가 청종할 것이 아니냐 그 때에는 예루살렘과 사면 읍에 백성이 거하여 형통하였고 남방과 평원에도 사람이 거하였었느니라
성경상에서의 형통한 자, 성공한 자의 공통점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형통이 좌우된다는 것이다. 오늘 말씀은 골자는 바로 이것이다. ‘형통함은 말씀을 순종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다른 어떤 것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왕 오므리(23-28절)
오므리는 북 이스라엘 왕국이 끊임없이 모반과 쿠데타로 인해 여로보암의 죽음 이후 26년 동안 벌써 왕조가 4번이나 바뀌는 가운데 등장한다.
그런 오므리는 몇 년을 통치했으며, 어떤 업적을 남겼는가?
- [왕상 16:23-왕상 16:24]
- (23)유다 왕 아사 제 삼십 일년에 오므리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 이년을 위에 있으며 디르사에서 육년 동안 치리하니라(24)저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 이름을 그 산 주인이 되었던 세멜의 이름을 좇아 사마리아라 일컬었더라
12년 동안 통치하였다고 한다. 오므리가 사마리아를 수도로 결정한 이유는 지정학적으로 사마리아는 우수한 요새지이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언덕은 해발 90미터 높이의 산이었다. 이곳은 많은 군사들이 주둔할 수 있는 형태의 고지로 북쪽으로 아람국을, 서쪽으로 앗수르 제국을, 동쪽으로 수리아를 견제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여러 나라가 사마리아를 공격했지만 실패하고 앗수르조차도 오랜 공격 끝에야 이스라엘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왕하 17:6). 이 곳은 소위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오므리는 종교적인 관점에서는 악한 왕이었지만, 실제로는 강력하고 유능한 통치자였음을 알 수 있다. 사마리아가 가지는 지정학적인 중요한 위치와 외교적인 수완능력, 안목과 통찰은 오므리가 굉장했음을 알 수 있다. 오므리 왕은 세상적 관점에서 보면 정치와 군사에서 대단한 능력을 가진 제왕이었다. 12년의 통치기간을 통해 강력한 왕조를 세운 그는 모압을 점령하여 그곳을 식민지로 만들어 그 지역에 히브리인들을 이주시키기도 했다. 나름대로 엄정한 법 질서와 체제를 구축해서 수백 년이 지난 예언자 미가의 시대에도 ‘오므리의 율례’라는 것이 민간 생활에 확립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강대국 앗수르에서도 적이지만 만만하게 보지 못했다. 훗날 오므리 왕조가 멸망한 후에도 앗수르의 살만에셀 2세가 북방 이스라엘을 가리켜 ‘오므리의 집’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하지만 성경은 이러한 카리스마가 넘치는 오므리에 대해서도 ‘그 베푼 권세’라는 말로 압축하고 있다.
- [왕상 16:25-왕상 16:27]
- (25)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26)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여 그 헛된 것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케 하였더라(27)오므리의 행한 그 남은 사적과 그 베푼 권세가 이스라엘 왕 역대 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님의 평가는 어떠했는가?
오므리가 아무리 정치적 수완이나 외교적 능력이나 다른 부분에서 출중한 면모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평가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라고 평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노를 불러오게 했다. 진노의 심판을 불러오게 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성경상에서의 ‘성공에 대한 평가’는 세상적인 평가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예를 들어, 일만원권의 주인공인 세종대왕을 평가할 때 그의 업적이나 정치적인 위업을 보면서 평가한다. 그 세종대왕의 인격이나 성품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진 않는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정복했던 알렉산더 대왕, 나폴레옹 황제, 징키스칸을 평할 때 그의 정복에 대한 과감한 의지와 용기와 업적을 평가하지, 그의 도덕적 인격이나 성품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는 기준은 우리와 다르다는 것이다. 일국의 왕이 가진 자신만의 리더십과 능력과 수완능력으로 일구어낸 업적이나 성취를 보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성품과 인격을 보았던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성공’이며 ‘형통’이다.
세상의 것과 세상적인 평가와는 얼마나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삶이 영적으로 성공한 삶? 사회적으로 성공하였다고 해서 영적으로 절대 성공하였다고 볼 수 없다. 반대로 영적으로 성공하였다고 해서 꼭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세속적 성공’과 ‘영적인 성공’은 꼭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아직도 오므리의 ‘그 베푼 권세’, 세상의 수많은 제왕들과 황제들이 누렸던 ‘그 베푼 권세’처럼 우리들도 ‘우리에게 베푼 권세’에만 눈이 멀어 있진 않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한가? 사회적으로 성공하였는가? 세상적으로 성공하였는가? 그렇다면 영적으로 성공하고 있는가? 형통하고 있는가?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으면서 세상적으로 누리는 성공은 오히려 우리에게 해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라!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형통한 삶을 누리고 있는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누리고 있는가?
이스라엘 왕 아합(29-34절)
오므리의 아들, 아합은 22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하지만 그가 행하였던 악, 세상적인 악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서 행한 악’은 무엇인가?
- [왕상 16:31-왕상 16:34]
- (31)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하나님의 명령과 율법을 업신여기며,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사고방식과 생각에서 일단 죄가 출발한다. 죄는 원래부터 생각함에서 시작한다. 그 생각함은 그의 결혼으로 이어지는데 그 결혼이 외교적이든, 정치적이든지 간에 아합이 신앙적인 관점과 안목이 많이 멀어져있음을 알 수 있다. 이세벨은 바알 제사장의 딸로서 열성적 바알 숭배자였다. 하지만 아합은 정략적인 결혼에 자신을 맡겼고 그것은 패가망신의 원인이 되고 만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가? 자녀들의 결혼을 앞두고 아니면 자신의 결혼을 앞두고 무엇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있는가? 아합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겼다. 그것은 진리이긴 했지만, 보이지 않는 진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들도 그렇지 않는가? 배우자를 선택하고, 자녀들의 배우자를 고를 때 우리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비성경적인 기준들!
아합은 처음에 결혼할 때는 바알을 섬길 것까지 생각했을까? 단순히 정치적이고 정략적인 결혼에 불과하다고 스스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죄는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
여러분은 어떤가?
- (32)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사당 속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그리고서 죄의 행동이 나오는 것이다. 단을 쌓는 행동함이 나타나는 것이다. 말씀을 가볍게 여긴 생각은 이제 말씀을 무시하는 행동으로 드러나게 된다.
- (33)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단을 쌓는 행동은 곧 우상, 목상을 만드는 행위로 번지게 된다. 그냥 만들어져 있는 것을 숭배하는 것도 문제지만 거기서 한 술 더 뜨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든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32절에서 더 나아간, 진화된, 타락한 죄악상임을 알 수 있다. 아합의 죄도 진화하고 있다. 죄는 진화하는 힘이 있다. 이러한 행위가 하나님을 더욱 진노케 만들었던 것이다.
- (34)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저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여리고는 베냐민의 변경에 있는 도성이다. 요단강 서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여리고가 원래는 베냐민 지파에 주어진 곳이지만 남북으로 이스라엘이 갈릴 때에는 이렇게 저렇게 해서 북쪽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니깐 아합은 그곳을 요새화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거기에는 요단 동편으로 가는 통로를 확보하려는 군사상의 목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벧엘 사람이 히엘이 왕의 명령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자기들이 잘 알고 있는 역사상의 사건이 있었다. 여호수아가 어떻게 여리고성을 무너뜨렸는지 그리고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하신 말씀이 있었다. 우리가 강가나 바다를 지나게 되면 이런 문구를 보게 된다.
‘이 곳은 수심이 깊으므로 수영이나 물놀이를 절대 금합니다’
는 식으로 경고, 금지의 푯말 말이다.
여리고도 그러한 곳이었다.
‘이 곳에 다시는 건물을 짓거나 건축하는 행위를 금합니다. 만약 이를 어길 시 뒷감당은 알아서 하시오!’
- [수 6:26-수 6:27]
- (26)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27)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명성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
그만큼 하나님의 명령이나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을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하나의 미신 취급하듯이 여겼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은 아합의 오만은 그 시대에(16:34) 퍼져 있었고 국민들에게도 당연히 영향력을 미쳤던 것이다. ‘어디 그럴 리가 있는가? 쓸데없는 조바심이고 걱정일 뿐이다. 지금까지 별 일 없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찌 되었는가?
...>저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우리가 설마설마 하면서 간과했던 하나님의 말씀은 없는가? 그러한 요소들이 우리가 세상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형통한 삶을 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불순종의 작은 요소들이 우리의 삶을 그늘지게 만들 수 있음을 명심하라!
아합의 종교정책과 여로보암의 종교정책의 비교
아합의 종교정책 | 여로보암의 종교정책 | |
[왕상 16:31-왕상 16:33] (31)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32)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사당 속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33)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 |
[왕상 12:27-왕상 12:29] (27)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28)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29)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왕상 12:31-왕상 12:32] (31)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32)팔월 곧 그 달 십 오일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 지은 산당의 제사장은 벧엘에서 세웠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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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 잘못된 결혼으로 인한, 잘못된 종교의 유입으로 인해 오므리의 정치적인 사마리아 성의 건축은 아들, 아합 대(代)에는 정치적인 것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범죄에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 | 이스라엘은 종교사회, 신정주의theocracy 국가였다. 종교가 국가전체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바르지 못한 여로보암의 그릇된 동기, 유다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이 종교적인 중심지였기에 백성들의 종교심을 모으기 위해 의도적으로 금송아지를 만듦으로써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은 획득하였을지 모르나 하나님 앞에서 그것은 부당한, 옳지 못한 행위였다. 금송아지를 만드는 행위...십계명의 제2계명, 다른 형상(form)을 만들지 말라고 했는데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고 영적 우상숭배를 장려했던 지도자의 책임이 서려 있다. |
영적인 평가 | 이전의 왕들보다 더 악하게 평가받았다! | 하나님의 왕 되시는 나라가 아니라 일국의 왕이 주인행세를 하는 이스라엘이 되어버렸다! |
아합은 나라의 행복과 번영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다. 오늘날 우리가 행복과 번영의 근원으로 숭상하는 것들로는 무엇이 있는가?
또한 우리가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아합의 범죄는 아합 당대의 범죄만이 아니었다. 여로보암 시대에 이미 자행되었던 범죄였다. 죄는 이렇게 유전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부모가 해결하지 못한 죄악은 자녀들에게 유전되는 힘이 있다. 그 죄악은 유전된다. 그 죄악은 전염된다. 그 죄악은 진화한다.
여러분의 당대에 해결하지 못한 죄악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자녀가 당하는 죄악의 심판, 죄의 후유증은 없는가?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시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다시금 우리를 새롭게 하시도록 기도하시길 바란다.
아합의 행복과 번영을 위한 우상숭배는 오늘날에도 퍼져있다. 과연 어떠한 것이 있을까? 외모지상주의로 인한 수많은 병폐와 범죄들이 판을 치고 있지는 않는가? 이 모든 것이 행복과 번영을 위한 우상숭배가 아닐까? ‘우리만 행복하면 그만, 보기 좋으면 그만, 기분 좋으면 그만’이라는 행복지상주의, 번영지상주의!
아합은 보편적인 인간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것도 일국의 왕, 지도자, 그리스도인들은 달라야 했다.
누가 성공과 번영을 주는가? 누가, 어떤 것이 형통한 삶을 보장해주는가?
(시 97:7)조각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긍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이 땅에서 형통한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심판 길에서 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신다. 자신의 행복과 번영을 구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기쁘시게 하고자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는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고백하며, 신앙과 행동의 동기를 점검해 보라!
잘 먹고 잘 사는 것, 호의호식하는 것이 형통한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다. 그러나 그것이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하고 깨끗하고 바람직한 삶이 아니라면 허무한 것이라는 성경적인 메시지를 우리가 바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뽑은 지도자가 아무리 세상적인 성공과 번영을 누리게 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평가는 단순하다. 말씀의 원리에 입각하였는가? 세상의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마찬가지.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가 베푼 권세’를 하나님은 신경쓰지 않으신다. 그것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배설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말씀에 의한 형통한 삶’, 진정한 성공과 번영은 바로 하나님! 만복의 근원은 바로 우리 하나님에게 있음을 기억하자!
우리에게는 과연 어떤 모습이 있는가?
열왕기상 16장 23-34절의 본문에 드러난 오므리 왕조의 세속적인 성공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번영과 성공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면서 인생에 있어 '과연 성공과 번영은 누가 주는가?'에 대한 성경적인 해답을 설교한 포스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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