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음(7:54-8:1상)
54절:
스데반의 변론과도 같은 설교에 그 심판관들도 흥미를 가지고 들었습니다. 경청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논증의 성격이 분명해지자, 그들의 분노와 증오심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신성모독이며, 쉐키나에 대한 뻔뻔스런 모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에 찔려: 문자적으로 ‘톱질하여 두 조각이 났다’는 맹렬한 증오를 나타냅니다. 이를 가는 것은 분노의 표시입니다.
55-56절:
청중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있는 동안, 스데반은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여 조용히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자 갑자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환상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제 그에게 있어서 군중들의 분노의 몸짓이나 대적들의 고함 소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의 현현’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소리질렀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우리의 상황과 환경과 삶이 때론 사람들의 분노와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갈등으로 점철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내면은 어떠한가입니다. 스데반은 성령충만했습니다. 인제 죽을 것인데, 인제 사람들의 분노와 모함과 핍박에 의해 죽을 것인데, 그는 완벽한 하나님의 임재와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은혜가 있길 원합니다.
몇 해 전에, 예수님도 스데반과 비슷한 죄목으로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대적자들의 증거가 합치하지 않자, 대제사장은 그 죄수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메시야인가를 맹세로 고백하라고 강요했습니다. 그 죄수는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막 14:62)
고 대답하였습니다. 더 이상의 대답이 필요없이 그는 신성모독죄로 정죄받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스데반이 예수와 동일한 장소에서 예수 대신에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예수의 말이 신성모독이나 거짓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장해주시고 성취시키신 참된 진리라고 주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산헤드린이 이전에 결정했던 예수의 사형이 비극적인 실수였다는 것을 인정하징 않는 한, 당연히 스데반의 논리는 신성모독죄로 정죄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예수님이 신약전체에서 말씀하신 호칭인 ‘인자’를 유일무이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와 스데반이 연결되어진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는 것은 그의 백성들이 이제는 성전 제사와 예식에서 벗어나서 더 직접적이고 마음을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나아가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성막과 성전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이셨지만, 이제 우리를 죽으신 예수님은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시기에 예배는 영적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특정한 선민에게만 주어진다는 특정설의 시대는 이제 지나간 것을 의미합니다. 다니엘의 환상대로,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오는”
때는, 곧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때인 것입니다(단 7:13,14). 메시야의 주권은 이제 차별없이 모든 나라를 포함하고 유대인의 전통적인 성전 예배와 같이 어느 한 나라의 국교나 종교적인 특권을 주는 어떤 제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심문에 대한 다니엘서의 구절과 시 110편의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을 결합시킨 것이다. 이 시편 구절의 의미는 메시야는 이제 하나님의 오른쪽으로 앉도록 초대되었습니다. 또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메시야가 거기에 앉아 계신 분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면 스데반은 독특하게 인자를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자로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서 계신 자세는 그가 왕과 제사장으로 하나님 우편에 계신 인자일 뿐만 아니라 스데반의 지금 죽어가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증인으로서의 인자의 모습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이제까지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했습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그의 종을 하나님 앞에서 시인하고 계신 것입니다. 법정에서 증인이 서 있는 것처럼, 증인의 마땅한 자세는 서 있는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지상의 법정에서 정죄받고 있는 스데반!그가 하늘의 법정에 증인을 요청했고, 그 지상법정의 증인은 하나님의 우편에 서서 스데반의 변호사요 보혜사가 되신 예수님 자신이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복음으로 인해 핍박받고 고난받을 때 이 장면을 기억하라. 스데반은 지금 순교직전에 지상의 법정, 하늘의 법정에서 증인으로 서 계신 예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분이 여러분을 증언하고 변호해주실 것이란 사실이다.
57-58절:
곁에서 듣고 있던 청중들은 율법에 의해 공정한 판결과 재판을 내리기보다 자기들의 법률의 규례를 무시하고 스데반을 ‘신성모독자’라는 항목으로 싸잡아버린다. 그리고 그들은 광분한 나머지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 죽여버린다.
59-60절:
스데반은 재판관들이나 사형 집행인들에게 자백하지 않았으며, 대신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라고 높아지신 보호자께 자신을 부탁했습니다. 이 말은 십자가상에서 주님의 마지막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그러나 놀라운 차이점은 예수님은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맡겼고, 스데반은 그의 영혼을 아버지께 맡긴 예수님께 맡겼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초대기독교가 예수님의 본질적인 신성을 믿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한 가지 스데반이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죽이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마지막 기도를 올리고 그는 잤다. 그렇게도 잔인했던 죽음과는 어울리지 않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표현입니다. 이 말을 하고 자니라...순교를 달게 받아들인 스데반의 영혼에는 알맞은 표현입니다.
1상: 이런 모습을 목격한 친구가 있습니다. 장차 위대한 선교사로 나아갈 사울입니다. 그는 지금 박해자로 스데반 곁에 서 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설교를 다 들었습니다. 스데반이 이야기하는 구질서와 신질서는 결코 양립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스승 가말리엘의 잠정적인 조치도 그에게는 맞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보이게 이 둘 사이의 타협은 절대 불가능하고, 구질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새로운 믿음이 제거되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사울은 증인들의 옷을 맡음으로써 공적으로 스데반의 사형에 찬성을 표하게 됩니다. 그는 이 순간을 결코 쉽사리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행 22:20
한 사람의 죽음과 그 옆에 서 있는 또 한 사람! 복음에는 언제나 이런 반전의 드라마가 있습니다. 스데반이 죽으면서 모든 것이 끝인 줄 알았지만, 그 순교의 희생위에 세계선교의 주자인 사울이 서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나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복음의 이런 반전드라마가 있길 원합니다.
박해로 인하여 흩어짐(8:1하-8:3)
1하: 스데반의 죽음은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하려는 움직임의 신호가 되었습니다. 이 공격의 주된 표적은 예루살렘 교회의 헬라파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그 일파의 지도자였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예루살렘 교회가 거의 히브리파로 구성되게 되었습니다. 12사도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던 것은 부분적으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부분적으로는 대중들의 분노가 그들을 향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헬라파의 지도자들에게 향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박해를 받아 흩어짐으로써 예수께서 행 1:8에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지상 명령이 성취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이 박해로 인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살전 2:14)
가 탄상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참된 능력이고 승리인가? 는 4절의 구절이 말해줍니다.
이런 스데반의 순교,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에 가한 박해와 흩어짐은 결국 더 복음을 확장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우리에게 당면한 고난과 환난과 아픔과 상처가 때론 우릴 옥죄어오지만, 그 고난 후에 영광이 있음을 기억합시다.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하나님은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전파와 선교에 박차를 가하게 하시고, 후에 바울을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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