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된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반응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반응은 신속했고 긴급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설교가 긴급했기 때문입니다. 17절에 베드로는 요엘서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말세라는 말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씀을 들으면서 유대인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은 그 청년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성령의 메시지는 그들의 가슴을 찔렀던 것입니다. 말씀이 그들을 마음을 37절에서 찔렀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말씀이 우리 가슴판을 찌를 때 우리의 반응과 태도도 즉각적이고 긴박해야합니다. 백성들의 반응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사도들에게 묻는 청중들의 반응입니다.
이 반응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가져야 할 태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좋은 영화나 감동적인 글이나 드라마를 보고 나서 가슴뭉클 할 수 있습니다. 때론 눈문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마음에 찔림의 역사는 없습니다. 그냥 한 자락의 감동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찌를 때 우리는 반응해야 합니다. 어떤 행동이 따라와야한다는 것이죠. 베드로는 그런 그들에게 38절에서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행동이 있을 때 선물이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우리가 말씀을 받고 찔릴 때 우리는 회개로 반응해야 합니다. 회개는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유턴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참회와 회개를 구분해야 합니다. 참회는 도덕적 가치 판단에 중심된 도덕적 반성입니다. 성경은 참회하고 구원받으라고 하지 않고 회개하고 구원받으라고 합니다. 참회는 도덕적이라면, 회개는 전인격적인 회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회개할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회개하고 난 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고 합니다. 여기서 세례는 우리가 구원받고 죄사함 받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세례는 물세례와 성령세례로 흔히 구분합니다. 물세례와 성령세례는 동시적입니다. 그렇다고 물세례와 성령세례 사이에 기계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3:16에서 세례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오셔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옛 세례와는 구별되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세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 그리고 그 세례가 가져다주는 성령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준비했던 세례요한의 세례는 우리는 더 이상 받을 수 없습니다. 요한은 죽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는 세례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분이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의 이름이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인생이 그리스도와 함께 물 속으로 들어가면서 자신도 죽는 것입니다. 물 속에 들어갔던 인생은 도저히 자력으로 살아날 수 없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물 속에서 일어나면서 부활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이 상징적인 의미의 세례는 참으로 은혜로운 것입니다. 그 누구의 이름도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경험할 때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베드로가 강조하는 강조점이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39절에 약속이라고 합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하고’
베드로의 메시지는 긴박하고 급박했습니다. 말세에 성령을 부어주실텐데 마음이 찔린자들은 다 회개하고 성령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이죠. 더 나아가서 왜 우리가 회개하고 성령을 받아야 하는가? 40절에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패역한 시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반역하는 패역한 세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 시대와 세대 가운데 우리가 구원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구원받아야 할 대상들은 우리들뿐만, 우리 당대 뿐만 아니라 ‘너희 자녀’즉 다음세대와 시간공간적으로 먼데 있는 사람들이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는 모든 대상들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여 회개하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 이 패역한 세대 가운데 구원받을 줄 믿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먼데 있다고 해서, 그 어떤 대상을 제한두지 않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많은 사람, 3000명의 사람들이 신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여 반응하고 회개한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부흥이고 회복이고 대각성입니다. 하지만, 그 영적인 깨어짐을 지속적으로 가능케하는 것은 바로 42절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우리 신자들의 모임에는 언제나 ‘사도의 가르침’이 중심부에 있어야 합니다. 사도의 가르침, 말씀이 있을 때 성도들이 방황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수많은 행사와 프로그램이 있다하더라도 거기에 말씀이 있어야 영적 방황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말씀, 성도들의 모임에는 사도의 가르침인 말씀이 항상 그 중심부에 있고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 교제하는 것은 자신의 소유를 같이 나누면서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물질이 있는 것이 네 마음이 있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서로의 필요에 자신의 것을 헌신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이 들어갈 때 신자의 물질생활도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물질의 나눔, 깊은 교제와 더불어 육적인 교제인 떡을 떼며(성찬+육적 식사) 무엇보다도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들어가고, 교제가 나타나고, 떡을 뗀 후에 교회의 방향은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받고 교제가 뜨거워졌는데 교회의 방향이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기도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그들이 받은 말씀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건강한 교회는 말씀과 교제와 떡을 뗀 후에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야’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이러한 열정이 전세계로 복음이 뻗어나가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의 설교에 대한 청중들의 태도를 보았습니다. 말씀에 대한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 우리는 말씀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교회는 이 구원과 성령의 선물에 대한 약속을 어떻게 시대와 세대 가운데 증거해야 한다는 것과 건강한 교회는 말씀을 중심으로 기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오늘도 받은 말씀을 가지고 오로지 기도하는 교회의 삶, 진정한 신자의 삶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설교 > 사도행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로운 삶의 길⑤ 사도행전 1장 8절, 성령의 능력.1 (0) | 2021.11.20 |
---|---|
사도행전 1장 8절, Acts29 (0) | 2021.09.29 |
사도행전 2장5-13절, 난 곳 방언으로 (1) | 2021.09.28 |
사도행전 7장 54절-8장 3절, 무엇이 참된 능력이고 승리인가 (0) | 2021.09.27 |
사도행전 5장 17절-32절, 사도들이 박해를 받다 (0) | 2021.09.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