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3:26-41을 텍스트로 하여 '복음은 이야기가 아니라 사이렌이다'란 주제로 한 설교이다.
17-41절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된 이스라엘의 구속사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요지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이며, 나사렛 예수는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하신 그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26절에 ‘형제들아’라고 말하면서 다시 청중들에게 바울은 믿음의 결단을 촉구하는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은 아브라함의 후손과 이방인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안디옥 회당에는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입교한 이방인들과 입교 예정 이방인들이 같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구원의 말씀(26절)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27-28절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죽기 전후의 상황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9-30절은 예수의 부활과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상황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27절에서 예수님을 못박아 죽인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안식일마다 말씀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말씀이 주인공이 예수님인지, 그 선지자들이 그렇게 이야기했던 주인공이 예수님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 무지의 비극이 결국 그들을 예수님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말씀의 청지기라고 하는 자들이 선지자가 이야기했던,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바로 예수의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했던 비극이 왜 발생했습니까? 그들이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죄인의 특징입니다. 그 별볼일 없는 촌동네 나사렛 출신의 청년이 무슨 자격으로 메시야가 될 수 있단 말이냐? 그러면서 그들의 구원의 메시야를 거절했습니다. 우리 또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고집과 아집과 관념과 사상과 철학이 너무 견고하면 말씀이 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진리가 지나가는 잔소리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죄인은 원래 경청하는 습관이 없습니다. 죄인은 원래 자기만 듣고 싶은 것을 듣고 싶어합니다. 자기를 비난하고 판단하고 경책하는 소리를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우리 죄인들은 우리의 치부가 무엇이고, 우리의 약점이 무엇인지 늘 주의를 기울이며 하나님의 음성을 민감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기의 상처가 너무 크면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문제와 상처와 아픔이 너무 크면 하나님의 능력을 여러분도 모르게 거절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배후에 계신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 예수님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고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의 듣지 못하는 악습도, 우리의 해결되지 않는 문제, 깊이 파힌 상처도 치유되어지고 해결되어지는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있을 줄 믿습니다.
왜 예수가 구원이냐?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셨지만, 거기 죽음에서 머물러 있을 수 없으셨습니다. 그는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나 제자들을 복음의 증인으로 세우셨습니다. 바울의 설교는 단순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31절에 바울은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12제자와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을 지칭합니다. 거기에 바울은 없었기에 그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에서 체험하고 난 후에 이제는 32절에서 ‘우리도’라고 합니다. 우리도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복음이 사도들이 체험한 복음으로 비춰져서 복음이 우리의 복음이 아니라 그들의 복음이 되고 있진 않습니까? 복음은 그들의 복음, 저들의 복음일땐 능력이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복음의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나의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학청년회 새로운 새친구들이 오면 제가 복음을 소개하고 영접기도를 시킵니다. 거진 다 복음을 영접하는데, 게중에는 좀 생각해보겠다며 보류하는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서 교회를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겐 복음의 ‘우리의, 나의 복음’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관리들, 가장 하나님의 말씀과 성전에 가까이 있었던 관리들은 예수님을 못박아 죽이는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들도 동일하게 복음이 그들의 복음, 자기의 복음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무지의 참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구원의 복음이 ‘우리의 구원의 복음’이 되어 그것을 증거하는 21세기의 증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선, 새 개의 구약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시편 2:7로 아마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 그 위가 견코케 될 다윗의 후손은 그분의 아들이 될 것이라는 약속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둘째,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34절)에 대한 이사야 55:3입니다. 그 복은 오직 다윗의 후손이 부활했기 때문에, ‘확실한’ 즉 영원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는 썩음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시편 16:10입니다(35절). 다윗은 죽어서 땅에 묻히고 썩었습니다(36절).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다윗의 자손은 썩임을 당하지 않습니다(37절). 이 세 본문은 모두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의 메시야적 본문으로 간주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하면서 바울은 38-41절에서 삶과 죽음간의 선택을 청중들에게 설교합니다 38절에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즉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죄사함을 얻는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바울은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다른 어떤 이름도, 어떤 인물의 힘입어 죄사함을 얻는 경우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죄사함을 얻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 사람을 힘입어 죄사함을 얻고(38절)
이 사람을 힘입어 의롭다하심을 얻게되는 것이며(39절)
그 어떤 사람도 모세의 율법의 조건을 온전히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곳에 길이 있고 생명이 있고 인생의 답이 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40-41절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사람(예수그리스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지 않거나 거부하는 자들에게 미치는 엄숙한 경고를 바울은 거침없이 이야기합니다.
그는 청중들에게 예언자들의 위협적인 경고를 상기시킵니다. 41절은 하박국 1:5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심판의 도구로 바벨론을 선택하셔서 결국 그 나라를 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듣지 않고 멸시하고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형벌과 심판이 있음을 바울은 설교를 통해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복음은 좋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복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게 하는 어떤 신화나 전설이 아닙니다. 복음은 현실이며, 복음은 영적 사이렌을 울리게 하여 마음에 반응을 얻고자 합니다. 오늘도 우리 인생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그분을 신뢰하므로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가 그분안에서 해결되어진다는 믿음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여 소망가운데 살아가는 믿음의 증인들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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