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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사도행전

사도행전 9장 10-19절, 사울의 회심②

by Message.K 2021. 9. 26.

 오늘 글은 지난번에 이은 사울의 회심이야기 두번째 스토리이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큰 이벤트를 접할 수 있다.

 

 

먼저, 바로 사울의 회심, 사울의 변화이다.

 

사울은 여기서 분명하게 변했다는 내용은 없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통해 특별히 역사하시고 15절에서처럼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택함을 받은 그릇이란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 눈을 뜨지 못하는, 이전에는 행동주의자이며, 혈기와 의기양양했던 사울은 이제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사울이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처음으로 그 삼일 동안 금식하고 기도한다는 말이 아니다. 사울도 바리새인들처럼 기도했을 것이고, 마음을 잡고 마음이 어수선해지는 것을 막고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그도 역시 아마 바리새인들처럼 일주일에 한 두 번씩 금식기도를 했을 것이다. 다메섹에서의 큰 영적 체험이 사울의 믿음에 큰 변화를 준 것이다. 이제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를 통해 사울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따라서 성령께서 그의 영과 함께 그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라는 것을 증거함에 따라 하나님 아버지께 새롭게 또 직접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진리라고,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산산조각나면서 무언가 강한 충격과 도전을 경험한 사울로서는 많은 생각과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그는 13절의 아나니아의 말대로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친 인물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경험하고 있다. 하나님은 정말 자신의 반대편에서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원수노릇하는 죄인들을 껴안으시고 그를 향해 15절에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했다.

 

 

 

-이방인: 당시에 복음은 아직 이방인의 경계를 넘기가 힘든 시점이었다. 서로 인종과 계급과 성별과 국적과 경계에 목을 매던 시기였다. 하지만 사울은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지는데 쓰임을 받을 것이다.

 

- 임금들: 세상의 수많은 권세자들이 있다. 그 권세자들에게 하나님의 도를 전하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하고 또한 특권이기도 하다. 아무나 그 앞에 서서 복음을 전할 수 없다. 그런데 사울이 바로 그 자리에 선다고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자신의 동족들인 이스라엘에게도 동일하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그릇으로 사울이 선택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릇으로 사울이 거듭나기 위해선 16절에 뭐라고 하는가?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바울은 이제 이방인 개척자, 선교사로 활동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많은 고난이 그 앞에 가로막혀 있다. 그 모든 것들이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세계선교를 위함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선 우리도 얼마의 고난을 분명히 받아야 할 것입니다.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분량의 고난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변화를 위해선, 변화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선 고난이 필수적입니다.

 

 

 

 

  두 번째,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아나니아라는 한 사람의 용기입니다.

 

아나니니아는 기도의 사람이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부르실 때 그는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고 고백합니다. 3일동안 앞 못보고 기도하는 중에 있던 사울(11절)을 찾아가라고 하십니다. 아나니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 기도하던 그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친 인물’, 기독교와는 원수와도 같은 인물이었다. 또한 14절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결박한 권한을 대제사장들로부터 위임받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주님은 사울의 현재와 과거를 보시지 않고, 사울의 미래, 사울의 소명을 그에게 말씀해주신다. 아나니아에게도 분명 두려움과 떨림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주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기독교의 대적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사울에게로 다가간다.

 

 

 

우리에게 이런 용기가 있는가?

아나니아는 기독교의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이 사울에게 주의 명령에 단순하게 순종함으로 나아간다. 아나니아의 용기는 가상하다. 윌리암 바클레이는 ‘기독교역사의 잊혀진 영웅들중의 하나’라고 아나니아를 칭했다. 아나니아는 여기 사울의 회심과 소명 사건에 잠깐 등장하다가 사라져버리고 그 후에 더 이상의 이야기를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다가갔기 때문에 기독교는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다메섹의 제자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하며 제일 먼저 한 말이 무슨 말인가? “형제 사울아”(17절) 사울의 회심 후의 첫 친구로서 또 사울을 형제로서 환영해준 첫 기독교인으로서 또한 주의 사명을 사울에게 충실히 전해준 사람이 바로 아나니아이다. 한 사람의 과감한 순종과 용기가 기독교 역사를 새로운 길로 접어들게 한 것이다. 아나니아의 이 안수기도가 사울을 사도권을 인증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그 당시 노회도, 총회도 없었다. 안수기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경험한 사울, 그리고 그 사울을 향한 아나니아의 순종과 안수기도, 그렇게 해서 사울의 소명은 신비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한 사람의 변화, 사울의 변화와 회심!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환경과 삶과 말씀에 변화되고 있는가?

 

한 사람의 용기와 순종, 아나니아의 단순한 순종과 용기가 복음의 판도를 바꾸는 계기를 마련했다. 오늘 우리는 하루를 통해 과연 어떤 변화와 어떤 용기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한번 생각해보는 말씀이 되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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