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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사도행전

사도행전 15장 22-35절, 안디옥교회의 혼란이 해소되다

by Message.K 2021. 9. 25.

22-29절 예루살렘 회의의 결론

  이방인도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이방인이라도 유대교의 전통의 일부는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주장에 반대하며 예루살렘 교회 회의는 이방 기독교와 유대 기독교인 사이에 구원론상 아무런 차별도 없음을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의 거리낌 없는 교제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규정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된 사항을 글로 써서 안디옥교회에 통보하여 더 이상의 혼란이 없도록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야고보와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동의한 사항을 이들을 통해 보내고, 또한 유다와 실라를 바울과 바나와 함께 안디옥교회에 보냈습니다. ‘바사바라 하는 유다’는 안식일의 아들이란 의미로 누가는 그를 선지자라고 설명했습니다(15:32). 이 사람은 여기서 언급될뿐 이후에 다시 등장하지 않습니다. 실라는 이후에 중요한 인물로 부각되고, 2차전도여행시에 바울과 함께 동행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언제 어떻게 어느 곳에 쓰임받을지 모릅니다. 길게 롱런하면서 오랫토록 섬길 수도 있고, 바사바라하는 유다처럼 짧게 쓰임받고 언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역사의 기록에 남든, 남지 않든 간에 하나님 앞에서 쓰임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매일의 최선을 주님께 드리는 일꾼들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문득 안디옥교회 가는 것을, 위대한 사도 바울과 바나바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 다 대단한 영적 거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안디옥교회는 이 두 사람을 굉장히 신뢰했고 이들의 방문을 반겼습니다. 하지만, 바울과 바나바 뿐만 아니라 유다와 실라도 안디옥교회의 혼란을 수습하는데 분명 필요했기에 그들도 같이 파송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일등을 중요시합니다.

일등만 기억하지, 2등, 3등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사역에 있어서도 잘 나가고 일등만 중시하는 문화와 풍토는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아니면 얼마나 잠깐 동안 사역한다하더라도 그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함께 일하고 동역한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늘 기억합시다.

 

 

 

23절 하-29절까지는 예루살렘 회의에서 결정한 내용을 담은 편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발신자, 수신자를 밝히고, 문안인사하는 편지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수신자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이었습니다. 안디옥이 언급된 이유는 이방인이 구원받기 위해 할례를 받아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이 시작된 장소입니다(15:1).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이 수신지로 언급된 이유는 이 지역의 수도가 안디옥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있어 믿음이외의 다른 그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은 사람들만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령과 우리는...옳은 줄 알았노니’(28절)

 

라고 편지에 언급해 결국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 뒤에는 성령의 개입이 있었음을 밝힙니다. ‘이 요긴한 것들’(28절)이라는 말은 반드시 필요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네 가지 금지사항(29절)-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 매어 죽인 것과 음행‘은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방 기독교인들과 유대 기독교인들이 교제하고 연합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본질적인 부분외에는 굉장히 관대하고 포용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서에서도 보면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위해 배려하고 이해하고 포용해야 하고 때론 희생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먼저 안 자로서, 새가족이나 새로운 교인이 교회에 왔을 때 복음의 근본적인 진리를 제외하곤 다른 것에 성도들에게 짐을 지워선 아니될 것입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라’(28절)

 

 

이렇게 해야 처음 믿는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 됩니다.

 

 

 

 

26절에 보십시오. 잘못된 이론과 가르침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은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누린 성도들입니다. 그러기에 새롭게 믿음의 반열에 들어 선 사람에게 기본적인 진리와 복음에 대해 명확하게 가르치되, 다른 부차적인 것들로 짐을 지우게 해선 아니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복음 안에서 자유하고 있는지를 돌아봅시다. 더 나아가 초대교회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여러 가지 신앙적인 주제들에 대해 혼신의 힘을 다해 그들의 마음을 읽어주고 그들의 입장에서 믿음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고 우리가 배울만한 일인 것입니다. 항상 교회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배려하고, 먼저 믿은 자가 나중 믿은 자를 생각하며 고려하며 위해 섬길 수 있는 그런 믿음의 여유가 필요하겠습니다.

 

 

 

 이로 인해 유대교 기독교인과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은 이렇게 하나되는 목회적인 실천과 행동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안디옥교회에 방문한 예루살렘 회의에서 파송한 이들로 인해 안디옥교회는 어떠했습니까? 31절...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냥 편지만 보낼 수도 있는 차원이었지만, 이 네 사람의 방문은 안디옥교회를 다시 새롭게 하고 힘을 북돋워주는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역을 하면서 사람의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고 케어와 상담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당사자에게 큰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돌아봐주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자를 위해 섬겨주고 헌신하는 아름다운 예루살렘 회의의 제도적인 해결책과 섬김이 안디옥교회를 더욱 건강하게 해 주었습니다. 때론 우리의 수고와 헌신과 섬김이 우리에게 불편하고 힘이 들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유다와 실라에겐 피곤하고 지친 일정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방문으로 인해 교회가 다시 새롭게 되어지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돌아봄의 역사가 충만하여 교회가 날마다 힘이 나는 교회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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