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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사도행전

사도행전 17장16-21절, 한가로움에 막혀버린 귀

by Message.K 2021. 9. 19.

아덴은 바울의 전도여행계획에 들어있던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형제들과 재회하기 위해 한가롭게 그 고색창연한 도시를 거닐면서 건축과 조각의 걸작들을 볼 여유를 가졌습니다. 아덴은 전 시대의 정치적인 주도권을 상실한 지는 오래였지만, 고전 시대에 이룩한 최고 수준의 문화는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거기가 아무리 문명과 철학과 예술과 건축이 우월하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면서 느낀 것은 다름 아닌 분노였습니다. 그 분노는 무엇에 대한 분노였는가? 바로 아덴에 넘쳐나는 ‘우상숭배’때문이었습니다. 격분했다고 했습니다.

 

 

고전 10:20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왜?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상이 가득찬 것이란 표현은 ‘그 도시가 우상들 밑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도시가 ‘우상들로 완전히 덮어 씌워져 있다’는 말입니다. ‘우상들에 의해 푹 잠겨 있었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바울은 16절에 격분했다고 했는데, 격분했다는 이 동사에서 ‘발작’이란 단어가 나왔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 동사를 신약성경에서 단 한번 사용했는데, 고린도전서에서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라고 묘사할 때였습니다. 격분한 바울의 이 상태는 미완료 시제동사로 쓰였기 때문에, 바울이 아덴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에 대한 지속적이고도 일정한 반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을 우상들에게 드려지고 있는 아덴이란 도시에 대해 거룩한 분노를 표현한 것입니다.

 

 

  헨리 마틴은 19세기 초에 이슬람 국가인 페르시아에서 표현했듯이,

 

‘만일 예수님께서 영광받으시지 않는다면 나는 계속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분이 항상...치욕을 당해야 한다면, 그것은 내게 지옥일 것이다.’

 

헨리 마틴의 심경보다 더 한 바울의 심경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거룩한 분노에 사로잡힌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는 사람들과 만나 변론했습니다. 회당에서, 장터에서 그리고 광장에서 변론하고 논쟁했습니다. 회당에선 유대인들과 경건한 사람들과, 장터에선 매일 만나는 사람들과, 광장에서 철학자들, 당대 주류철학인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과 논쟁하고 변론했습니다. 그 변론은 목적은 복음전파였습니다.

  하지만, 철학자들은 18절에서 바울을 가르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이 말장이란 말은 스페르모로고스spermologos를 번역한 것인데, 램지는 그것은 ‘아덴의 은어다운 특성을 나타내는 단어’라고 했다. 문자적 의미는 ‘씨를 쪼아먹는것’이라는 것이며, 여러 가지 씨를 먹는, 또는 썩은 고기를 먹는 새들에 대해 사용되었다. 새들로부터 사람들, 곧 시궁창 같은 데서 주운 음식 찌꺼기를 먹고 사는 부랑자나 거지들에게 적용될 때 사용된 단어였다. 자기 머릿속엔 별 독창적인 사상이 없으면서 여기저기서 지식의 부스러기들을 주워 모으며 거리낌 없이 다른 사람의 사상을 표절하거나 ‘남에게 얻어 듣는 이류지식을 열심히 찾는 사람’, 허풍선이, 앵무새, 지능적 수다장이, 무지한 표절자 라는 번역으로 나왔다.

 

 

  굉장한 것에 촉수를 세운 무리들! 아덴의 철학자들이 그러했다. 새로운 것에 혹했다. 바울이 말하는 복음을 들어보니 이제껏 듣지 못한 이야기라 그들이 혹했던 것입니다. 이상한 분위기이다.

 

19절에서는 아레오바고에서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이냐?’라고 묻습니다. 20절에선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고 합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면 지루해하고, 빠른 것이 아니면 지겨워하고, 색다른 것이 없으면 흥미가 떨어지는 분위기가 바로 그때의 분위기였다. 진리가 새롭고, 진리가 흥미로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은 단지 새로운 철학과 사상에 관심이 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분위기는 지금의 우리 시대의 분위기와 흡사합니다.

 

   

  왜 그렇게 사람들은 재미와 흥미를 추구하는가? 그들의 배후의 세계관 때문이다. 세상을 구원하는 구원자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부정과 거절이 낳는 것은 이 땅에서의, 현세에서의 욕망과 쾌락밖에 더 있는가? 에피쿠로스 학파는 낙관적인 세계관이고, 스토아학파는 비관적인 세계관으로 볼 수 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경향은 언제나 그 배후에 이러한 생각의 기초가 있다.

 

21절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All the Athenians and the foreigners who lived there spent their time doing nothing but talking about and listening to the latest ideas.)

 

 

  사람들은 흥미롭고 새롭고 편안하고 안락한 것을 추구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웰빙과 행복과 무병장수 등을 추구하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혹여나 아덴 사람들처럼 그렇게 살아가고 있진 않습니까? 바울은 그런 시대의 사람들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묻고 답하고 질문하고 답변하고 변호하고 변증했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했던 바울의 모습입니다. 바울이 이방 신들이 창궐한 그 분위기 가운데 예수와 부활을 전했습니다(18절). 사람들은 저마다 듣기 좋은 소리, 듣고싶어하는 소릴 듣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와 부활을 빼면 시체인 것입니다. 한가로움에 막혀버린 그 당대의 모든 사람들 앞에서 홀로 복음을 전하는 아덴의 바울을 떠올리며 혹여나 복음을 전하면서 당한 외로움과 아픔과 상처가 있다면 위로받으시길 바랍니다. 다원주의와 물질주의, 배금주의, 황금만능주의, 그리고 이단들이 판을 치고 있는 시대가운데서 복음안에 있는 예수와 부활을 증거하고자 외치는 우리 시대의 바울들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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