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이 '왕의 복음'인데, 그 왕이 2장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1-12의 본문을 가지고 '왕이 나셨습니다'라는 주제로 설교한 내용이며, 보이지 않는 나라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대적하는 세상 왕 헤롯, 율법이 옆에 있지만 왕을 거부한 종교지도자들, 이방인이었지만 왕을 왕되게 예배한 동방박사들의 태도에 대해서도 알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1-12, 왕이 나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족보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 족보는 14대로 나눠집니다. 아브라함-다윗-바벨론포로-그리스도, 이렇게 연결됩니다.
- ①아브라함: B.c 2000년 약속받은 왕국
- ②다윗: B.c 1000년 잠정적인 왕국
- ③바벨론: B.C 600년 심판받은 왕국
- ④예수그리스도의 탄생: 그리스도, 완전한 왕국
두 왕국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왕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보이지 않은 왕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아기 예수로 오신 것입니다. 근데, 그 때 예수님이 태어난 지방은 확연히 보이는 세상의 왕, 헤롯왕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헤롯왕은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과 자원을 다하여 그 권력에 자리에 오른 사람입니다
지혜와 모략과 능력을 다하여 유대인의 왕이 되었습니다. 헤롯은 에돔족속 출신으로, BC 73년에 태어나 유대나라의 고관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BC 40년, 파르티아가 유대를 침략하자 급부상하는 강대국 로마로 망명하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클레오파트라의 연인 안토니우스와 장차 로마 평화를 이룬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공동으로 통치하던 때였습니다.
로마에 망명한 헤롯은 33세에 불과했으나, 명석한 두뇌와 현실적 사고방식, 출세를 위한 강한 의지로 로마 지도층의 호의와 신뢰를 획득합니다. 그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로마 시민과 원로원의 친구이자 동맹자’라는 칭호를 받고 유대 땅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유대로 복귀한 그는 파르티아의 후원을 받던 왕을 물리치고 왕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가 로마 지도층과 얼마나 친분이 있었는가는, 애굽의 클레오파트라가 헤롯의 유대 땅을 달라고 했을 때 안토니우스가 그것을 거절했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정치적 입지는 안토니우스가 죽고 아우구스투스가 황제가 되었을 때에도 견고하였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서, 땅에서는 거대하고 웅장한 성전을 지어줍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의 지지와 환심을 받게 된다. 헤롯은 실로 외치(外治)와 내치(內治)에서 성공을 거둔 자기주의(selficism)의 정상에 올라 있습니다.
요즘 시대는 모두가 자기, 자아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시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자기가 최고의 신으로 등극하여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도, 교회도 자신의 비위나 이익에 맞지 않으면 갈등을 일으키고 다툼을 일으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가 다 그러합니다.
디모데후서3:1-5에서는 말세의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고 하면서 가장 먼저 특징을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라고 했습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자기만의 왕국을 훌륭하게 세우고 견고하다고 생각하는 헤롯왕 시대와 세대 가운데 아기 예수가 태어났습니다.
헤롯왕은 흔들립니다. 자신이 만들고 치장한 왕국이 동방박사들의 행보에 이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는 질문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섬기고 자기만을 최고로 여긴 왕국이 ‘유대인의 왕’으로 올 왕에 대한 소식으로 자존심에 금이 가고 기분이 나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탄절입니다. 나라가 어수선합니다. TV뉴스를 보면 정신이 혼란스럽습니다. 2000년전 유대땅도 로마제국의 압제와 헤롯왕의 정치로 인해 백성들이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기득권을 가진 특권층, 로마에 기생하여 권력을 쥐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은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상황과 환경과 시국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왕이 나셨도다!’, 인류를 위해 ‘예수라는 왕’이 탄생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한 해를 살아가시면서 얼마나 많은 아픔과 슬픔과 눈물과 상처로 달려오셨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살았지만 내게 쥐어진 결과물은 나를 더 힘들게 하고 나를 더 아프게 한 상황은 아니었습니까? 세상은 죄인들의 아수라장입니다. 우리의 모습도 죄의 아수라장으로 범벅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기 예수님이 이 땅을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할렐루야!
당시 헤롯왕에겐 예수님은 원수이고, 권력의 걸림돌이고 장애물입니다.
자기가 이뤄놓은 모든 권력의 금자탑을 해코지하는 인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헤롯왕처럼 여러분의 삶과 인생을 거추장스럽게 만드는 인물로 전락하진 않았습니까? 예수 믿고 나니 제대로 되는 게 없다고 푸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어두움을 추방시키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심지어 헤롯왕 안에 있는 어두움의 권세도 물리치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하지만 헤롯왕은 그 예수님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왕이 아니라 헤롯 자신이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자기를 왕으로 모신 헤롯왕이나 종교지도자들에겐 눈에 가시입니다. 용납할 수 없는 존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헤롯왕은 7-8절에 심각한 관심을 보이면서 자신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고 하면서 예배하는 척합니다. 예배하는 척하는 헤롯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길 바랍니다.
성탄절 아침에 어린아이들이 성탄절이라면 마냥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우리들도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길 소원합니다. 자기가 왕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방해꾼입니다. 자기사랑, 자기자랑, 자기기만, 자기교만, 자기자만, 자기오만, 자기욕심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빌 3:18에서 빌립보교인들을 향해 바울은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
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 눅 21:34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는 방탕함/술취함/생활의 염려로 둔하여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주님이 탄생하셨을 때, 헤롯왕은 마음의 좌소에서 내려오지 않고 십자가의 원수로 행했습니다. 오히려 우리들은 날마다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져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무감각하며 너무나 식상하게 맞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십자가의 원수된 세상을 향해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여러분, ‘왕이 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과 인생의 모든 질고와 수고하고 무거운 짐과 질병을 치유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되신 그리스도가 이 땅에 아기 예수로 겸손하게 오셨습니다. 겸손하게 오셨기에, 왕으로서의 자질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진 않습니까? 오히려 대왕으로, 황제로 기세등등하게 출현하셨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셨을까요?
하나님의 지혜는 그 반대였습니다. 없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약한 사람들의 입장을 배려하셔서 친히 베들레헴 마굿간에 왕이 나신 것입니다. 그의 삶 자체가 겸손 자체였고, 그 겸손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여러분 마음에 예수님을 모실 공간이 있길 소원합니다. 아무도 마리아의 출산을 도와줄 방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짐승들, 마굿간의 짐승들이 주님의 탄생을 목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나 낮은 곳에서 낮은 자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시고 선택하신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그 주님, 우리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주님을 성탄절에 여러분의 가슴에 다시금 모시길 바랍니다.
헤롯왕은 거짓예배자로 등장한다면, 반대로 동방박사들이 왕의 탄생, 예수님의 탄생을 경배하고 축하하기 위해 먼 길로부터 참된 예배자로 옵니다
동방은 현재 쿠르드 족속이며, 박사들은 당시 지혜자들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이방인들입니다.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왔습니다.
‘유대인의 왕’의 ‘그의 별’을 보고 축하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멀리서도 척 보면 압니다. 그들은 정말 멀리서도 척 보면 알아보고 예수님을 찾으러 왔습니다. 헤롯왕은 예배하는 척 했지만, 동방박사들은 진실로 예배하러 왔습니다. 유대인들, 율법에 가까이 있었던 수많은 지도자들조차도 예수님을 외면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이방인들인 동방박사들이 예물인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들고 성탄절 축하객으로 온 것입니다.
반대로, 당시 율법학자들, 종교지도자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율법을 항상 옆에 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배하지 몰랐습니다.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은 예배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유대인들도 아니고, 율법도 모르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별을 보고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이방인들인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예배하였다는 것은 앞으로 이방인들조차도, 출신성분에 상관없이 예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올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열방과 민족이 예수님을 예배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믿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예수님을 예배할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땅에 선교사로 오신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셨던 2위격의 예수님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선교사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그 어떤 종족과 부족도 이제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를 경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동방박사가 드린 세 가지 예물인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예수님은 전세계적인 메시야의 영향력을 드러낼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황금과 유향은 구약시대 동방(아마 메소포타미아)에서 온 아마도 스바 여왕이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게 가져온 예물들을 반영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메소포토미아와 아라비아도 다윗의 아들, 메시야 예수의 영향력이 뻗치게 될 것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에게 모든 민족에게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이제 메시야의 전세계적인 통치에 대한 예언은 그런 방식으로 실현될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드린 예물은 고대 사회에서 왕이나 신에게 드리기에 적합한 예물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이방인이었지만, 최고의 선물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께 어떤 선물을 생일선물로 드리길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어떤 예물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있는 선물은 여러분의 마음이요, 중심입니다. 10절 말씀에 보면,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우리가 예수님의 생일을 맞이하면서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는 심령이 오늘 우리가 주님께 드릴 가장 큰 선물입니다.
성도 여러분, 인류의 죄를 구원할 왕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그리고 아기 예수님을 위해 여러분은 어떤 예배자의 모습으로 나아가길 원하십니까? 앞서 이야기한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 ①자기만의 왕국을 세우기에 급급했던 헤롯대왕의 모습입니까?
- ②아니면, 늘 하나님의 율법을 가까이 두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의 존재와 탄생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던 목석과 같은, 죽은 시체와 같은 율법학자들입니까? 종교지도자들입니까?
- ③아니면, 별을 보고 쫓아가 예수님께 가장 최고의 선물을 바쳤던 동방박사들입니까?
이 성탄절 아침에, 우리의 심령을 선물로 주 예수님께 드리는 진정한 성탄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살았던 우리의 연약하고 죄인된 습성과 습관과 삶의 방식을 주님께 회개합시다. 헤롯왕처럼 십자가의 원수로 자기만의 생각과 고집과 탐욕으로 얼룩진 죄악을 주님께 회개합시다. 진정한 예배가 아닌 거짓된 예배로 하나님을 기만했던 헤롯대왕의 죄악을 청산하고 회개합시다.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오직 마음이 둔하여져서 율법 옆에 있으면서도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살았던 종교지도자들, 유대인들과 같은, 우리의 죄인된 삶을 회개합시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동방박사들처럼 최고의 선물을 주님께 드립시다. 우리의 순수하고 정결한 심령을 주님께 성탄절 아침에 드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 되시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2:1-12에 나타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아보면서, 그 왕을 대하는 세 부류의 인물들의 자세로 첫째, 자기애가 가득한 헤롯왕, 둘째, 율법을 늘 옆에 두지만 예수님에 관심없는 종교지도자들, 마지막으로 이방인이었지만 예수님을 예배한 동방박사들의 자세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과연 왕에 대한 관심이 있는가? 질문해 본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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