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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로마서

로마서 5장 6-11절, 라이언일병구하기Saving the Private Lyon

by Message.K 2022. 3. 5.

라이언 일병 구하기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아는가? 여러분들 중에 대부분 그 영화를 보셨을 것이다. 그 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영화이다.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있는 미국군대에서 벌어진 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전쟁을 통하여 무수한 부상자들과 사망자들이 속출되는 가운데 우연히 이름이 같은-라이언-, 그러니깐 성이 같은 사람을 3명(브라이언 라이언, 죤 라이언, 폴 라이언 이런 식으로)이나 발견하게 된다. 모두 사망자 명단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용감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죽어간 병사들의 가족들에게 서신을 띄우는 그 과정에서 이 일이 발견되어 상부로 보고되어지게 되는데 알고 보니, 그 라이언이라는 성을 가진 3사람은 형제들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안 상부의 장군은 놀라면서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가족의 형제는 4형제였는데 3형제는 모두 죽고 오직 막내 라이언만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장군은 이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급히 그 막내 라이언 일병을 구하라고 특별 명령을 내리게 된다. 물론 이 와중에 다른 장군은 그러한 것에 대해 반기를 들면서 모든 생명은 중요한 것인데 굳이 다른 병사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그 라이언 일병을 구할 필요가 있는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라고 의아해했다. 그러자 그 상관은 그에게 예전에 남북전쟁 당시에 있었던 또 하나의 참상을 편지로 보여주는데 거기에는 5형제가 고스란히 시체로 남아 돌아가게 된 것에 대한 에이브라함 링컨의 안타까움과 가슴 아픈 사연을 무엇으로 보답하여야 할 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내용의 편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 5형제의 어머니에게 보내졌던 편지였던 것이다.

 

 

 

 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 작전에 참석한 소수의 병사들은 결국 무사히 라이언 일병을 구하게 된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몇 명의 병사들과 또한 이 작전을 이끌던 대위(톰 행크스)도 운명을 달리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 조금은 모순되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어떻게 한 명을 살리기 위해서 갔다가 서너 명의 목숨이 유명을 달리했다는 것에 대해서 그러할 것이다.

 영화중에 톰 행크스 대위와 그의 부하인 상사가 나누는 대화에는 이러한 말이 튀어 나온다. ‘나는 이제껏 70여명의 대원을 잃었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1명의 대원이 죽음으로 인하여 100명의 병사들이 살아 남을 수 있었다.’ 1명의 병사의 죽음은 100명의 병사들의 목숨을 살리게 했다는 그 대위의 발언은 실로 감격적이지 아니할 수 없다.

 

 

 

 유태인인 스필버그의 이 영화는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또 한 사람의 생명이 고귀하게 지켜지게 되었다는 것을 다분히 강조한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스필버그의 영화는 그러한 면을 많이 지니고 있다. 그가 유태인이기에 그의 신앙관을 영화에 담아 놓았다고 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쉰들러리스트, 딮 입팩트....)

 라이언은 열심히 자기의 삶을 살아 온 뒤에 대위의 무덤을 찾아가 그는 고백한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대위님’ 그렇게 말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자기의 가족들을 뒤에 두고서 말이다.

 

 

라이언일병구하기 포스터입니다. 사실적인!
라이언일병구하기(출처: https://extmovie.com 캡쳐)

 

라이언 일병은 구할만한 자격은 있나?

 우리는 오늘 이 본문을 보면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생각해 본다면, 연상해 본다면 아주 이해가 잘 될 거라고 생각한다. 톰 행크스가 분한 그 대위와 몇몇의 병사들이 죽음을 가져갔던 그 대가로 인해 막내 라이언 일병은 생명을 가져갈 수 있었다.

 

 V.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의인을 위하여 죽는 것도 드물며(rarely) 선인을 위하여 죽는 경우도 혹 있긴 하지만 잘 없다는 것이다.(might possibly dare to die)

 

영화 이야기를 더 하자면 라이언 일병을 구하러 가는 그 자그마한 소대보다 작은 그 무리들은 라이언 일병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그 놈이 정말 자기들이 구하러 갈만한 자격이 있는가?’ 에 대해 생각한다. 정말 겁쟁이 같고 총알이 날아오면 오줌을 쌀 정도로 멍청하고 바보라면 자기들이 목숨을 내놓고 구할만한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그토록 찾고자 했던 라이언 일병은 적들이 우글거리는 최전방에 있으면서 형들의 비보를 들었을 때 집으로 빨리 가고 싶다고 하기보다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겁쟁이처럼 비굴하게 집으로 가기는 싫다는 말을 남긴다. 그는 병사들이 생각하기에 “정말 구함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군인”이었던 것이다. 오늘 성경의 본문은 이러한 일들이 과히 쉽지만은 않다고 이야기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그리스도의 구속

 세상에 어느 누가 여러분 자신의 생명과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며 가치 있게 받아들여지는가? 여러분의 생명이 붙어 있기에 삶이 가능하며 여러분이 지금 살아있기에 친구가 있고 가족이 있고 애인이 있고 취미가 있고 특기가 있고 직업이 있는 것이 아닌가? 자기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페라리라는 외제 스포츠카를 아는가? 그 차는 한 대에 9억 이나 한다. 하지만 그런 페라리가 비록 시속 300km로 아무리 달려도 차체가 떨리지 않고 불안치도 않지만- 제 차는 100Km만 넘어도 핸들이 떨리고 차체가 불안하다-그런 페라리가 여러분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의 목숨과 삶은 이처럼 중요한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자신의 목숨을 그것도 자기에게 처자식이 있다면 그 목숨은 1개 이상의 목숨인 것이다. 허나 그러한 목숨을 다른 사람을 위해 버린다는 것은 과히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라이언일병은 그러한 희생을 받을만한 사람, 적어도 그러한 자격이 있는 군인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속된 말로 그는 ‘본전치기’를 해도 무방한 그런 군인이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하는 장면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신이 인간이 되셨다. 신이 인간이 되어 인간의 죽음을 맛보셨다. 가장 처참하고도 치욕적인 나무십자가의 형틀에서 죽으셨다. 마치 짐승처럼 죽으셨다. 지금은 기독교의 보편적인 상징이 된 십자가가 처음에는, 그것이 직접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일반적인 죄인의 처형과 관련되어 있다는 이유로 인해 회피되었던 기록도 있다(Micheal Gough, J.H.Miller..).

 

 온 인류의 고통과 죄와 슬픔과 아픔과 상처를 홀로 감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

 

그의 피를 보라!

그의 눈물을 보라!

그의 땀방울을 보라!

그의 벌거벗은 몸을 보라!

그의 속옷 하나 걸치지 않은 그의 파리한 몸과 앙상한 뼈를 보라!

그 분이 우릴 위해 죽으셨다. 아무 것도 아닌 우리의 인생을 위해 죽으셨다.

Christ died For us!

 

 

 

 

불경건한 우리들, 죄인들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삶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가치 있다고 해도

내가 하는 공부가 내 장래에 도움이 되고 내 미래의 꿈에 큰 기여를 한다고 해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아르바이트나 직업이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밥 빌어먹지 않게 하고 내 용돈의 씀씀이를 커버할 수 있게 한다해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삶의 라이프스타일이 남들에게 아무런 해나 폐를 끼치지 않고서 나만의 세계를 건축하고 아무런 문제없이 살아간다 해도,

내가 남들이 주저하는 교회의 봉사활동과 임원의 직책을 성공적으로 감당하고 있다고 치더라도,

내가 하는 취미활동과 하비가 나를 더 건강하게 하고 나의 기쁨과 만족감을 더 크게 한다 하더라도,

그 모든 활동과 삶과 존재에 대해서 하나님의 선언은 단호하다. 아주 강력하게 촉구하시면서 말씀하신다.

 

 V.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 하여 죽으셨도다(...at just the right time, When we were still powerless, Christ died for the ungodly)

 

주님은 말씀하신다. “경건치 않다”(ungodly) 하나님을 믿는다하면서도 하나님 없이 생활하고 하나님 없이 먹고 하나님 없이 공부하고 하나님 없이 마시고 하나님 없이 알바하고 하나님 없이 모든 삶의 행위를 하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신다. ‘경건치 않은 이 인간들아!!!’ 우리 자신의 인생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하지만 그러한 삶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은 의외로 단호하다. 엄포를 놓는 발언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사랑과 그의 십자가의 그 의미심장한 죽음과 그 부활과 값진 영생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던 인간들이었다. 주님의 마음에 들기보다는 자신의 마음과 취향과 기호와 편함과 유익에 더 기민하고 민감했던 자들이었다. 라이언 일병보다 더 미약하고 더 천박하고 더 이기적인 삶을 사는 자들이 바로 우리들이었다. 요즘 시대가 어떠한가? 이른바 사이버시대가 아닌가? 이러한 시대가 더 우리시대의 젊은이들을 이기적이고도 개인적으로 만들고 있다. 마우스 하나로 세계를 섭렵할 수도 있고 마우스 버턴을 한 번 클릭함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과의 통신도 쉽게 접속시켰다가도 쉽게 해제시킬수 있는 시대가 아닌가? 그러나 시대 탓으로만 돌리기엔 우리 자신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성스럽지 못한 것이 아닌가?

 

 

 

 

성삼위일체의 하나님의 마음

 성 삼위일체 하나님은 무척이나 고민했을 것이다. 이 어그러진 인간세계, 아무리 사랑을 베풀어도 그 끝을, 그 깊이를, 그 진의를, 그 대척점을 발견치도 못하는 사람들을 또 다시 구원하여야만 하는가? 또 다시 하나님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와 생채기를 남긴 채 사람들을 향한 가슴을 열어 젖혀야만 하는가? 또 다시 하나님의 마음은 썩어문드러져 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을 향한 두 팔을 벌려야만 하는가? 그러나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하나님은 이 어리석고 부패한 인간세상을 또 다시 한번 회복시키시고 생명의 제 2창조를 위해서 주저함 없이 “그리스도여 네가 가라! 성자여 네가 가라!”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구속사역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주님이 이 땅의 세계로 내려오신 것은 마치 피나리어(식인고기)가 가득한 강물에 사람이 뛰어든 것과 같은 것이다. 죄가 없으신 그 분이 죄에서 우릴 구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죄인들을 위해 오신 그리스도

우리가 연약할 때에When we were still powerless(V.6) 그 분이 오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While we were still sinners(V.8) 그 분이 우릴 위해 죽으셨던 것이다.

 

우리가 무기력할 때, 그 분이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우리가 여전히 죄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우리에게 오셨다. 우리가 죄를 거의 짓지 않고 죄책감에서 거의 탈피했을 때, 우리가 선을 많이 행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거의 주지 않았을 때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를 많이 지어 그 죄의 무게에 눌려 죽어갈 때,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준 상처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해 온 몸과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져 신음하고 있을 때, 아무도 나를 받아 주지 않고 냉대하며 조소 섟인 발언들로 날 짓뭉갤 때 주님이 나에게 오신 것이다. 주님이 그러한 우리를 위해 오신 것이다. 주님이 그러한 죄인들을 위해 오셨다. 선인을 위하여 죽는 사람은 어쩌다가 간혹 볼 수 있겠지만-언젠가 일어났던 교통사고사건(남편은 죽고 아내와 친지들만 살아남은 사건-차가 난간을 들이받아 강에 빠진 사건)

 

 

 그러나 죄인을 위하여 죽는 사람은 없다. 자기와 반대되는 의견과 삶의 양식과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을 향해 자기의 목숨을 던지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인을 위해 그 목숨을 버리셨다. 그의 신성을 벗어 던지시고 하나님의 그 영광된 삼위의 제2위격의 자리를 버리시고 인간의 가장 비참한 자리에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진노의 자식인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십자가를 아는가?

그가 어디에서 죽었는가? 바로 십자가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V.8)

 

여러분 십자가를 아는가?

 십자가는 당시 알려진 세계의 변두리에 살던 “야만인들”에 의하여 고안되어서, 뒤에 희랍인과 로마인에게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아마 이것은 지금까지 행해졌던 모든 처형 방법 중에서 가장 잔인한 방법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람이 극도의 고통을 느낄 때까지 죽음을 늦추기 때문이다. 거기에 달린 사람은 여러 날 동안을 죽지 못하고 고통을 당할 수도 있었다. 로마인이 이 처형 방법을 택했을 때에도, 그들은 살인, 반란, 혹은 무장 강도의 죄를 범한 범죄자, 그 중에서도 노예나 외국인 혹은 사람취급을 못 받는 사람들(nonpersons)에게만 이 형벌을 가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로마의 장군 바루스(Varus)가 주전 4세기에 자기네 동족 2,000명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에 크게 분노했으며, 예루살렘을 약탈할 때에 장군 티투스(Titus)는 그 도시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이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세워 놓을 만한 공간도....사람을 달 십자가도”찾을 수가 없었다.

 

 

 로마 시민들은 극단적인 국가 반역죄를 제외하고는, 십자가형에서 면제되었다. 키케로가 행한 연설에서 십자가를 “crudelissimum taeterrimumque supplicium, 가장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형벌”이라고 비난했었다. 조금 더 내려가서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로마 시민을 결박하는 것은 범죄이고, 그에게 매질을 하는 것은 가증한 것이고, 그를 죽이는 것은 거의 살인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로마 시민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도 끔찍한 행동을 묘사할 수 있는 적절한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살인죄로 고발된 고참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라비리우스(Gaius Rabirius)를 키케로가 주전 63년에 변호해서 성공한 적이 있는데, 그 때에 그가 한 말은 더욱 분명하다. ““십자가”라는 단어는 로마 시민에게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 그들의 눈과 그들의 귀에서까지도 멀리 사라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 일(즉 십자가 처형 절차)의 실제적인 발생 혹은 그것을 견디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예상, 아니 그것을 단순히 상상하는 것까지도 로마 시민과 자유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로마인들이 십자가를 무서운 것을 간주했다면, 그 이유야 다르지만, 유대인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대인들은 “나무”와 “십자가”를 구별하지 않았으며, 또한 나무에 달리는 것과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도 서로 구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십자가에 못박힌 범죄자에게는 자동적으로,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3)라는 율법의 끔찍한 진술을 적용시켰다. 그들은 하나님의 메시야가 나무에 달려서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서 죽으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트리포(Trypho)는 자기와 대화를 나누던 기독교 변증가 저스틴(Justin)에게 유대인의 그런 생각을 다음과 같이 나타냈다.“ 나는 이 점을 극히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공포의 대상이었고 두려움의 상징이었던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셨던 것이다. 왜 그렇게 쓸데없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나? 우리나라의 전두환처럼 혁명이나 쿠데타를 일으킬려다가 그렇게 되었는가? 아니다. 오직 하나의 이유만이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해서였다....”(But 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 in this)

 

 하나님께서 자신의 세상에 대한 사랑을,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보여주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사람을 죽일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유독히 그 처참하고도 비참하기 짝이 없는 십자가에서 주님을 죽이는 방법으로 구속을 성취하셨는가 라고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이 말씀에 하나의 노예가 되어 아직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도들은 이 사실에 대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서 죽었다는 사실에 당황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만한 인물이라고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최소한 사도들은, 예수님이 담당하신 것이 바로 우리의 저주였음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그 십자가에 형틀에 죽이신 이유는 바로 우리들의 죄의 참상을 고발하시기 위해서였다. 죄에 의해 일그러진 우리의 형상을 하나님은 가시적으로 십자가에서 보여주셨던 것이다. 우리가 당할 형벌의 무게가 어떠함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셨던 것이다. 그 십자가에서 자신의 사랑을 진술하셨던 것이다. 변호하셨던 것이다.

 

 

 

십자가의 저주는 우리의 저주

 예수님이 담당하신 그 저주는 바로 우리의 저주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고자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셋째,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넷째, 그리스도는 우리의 죽음을 죽으신 것이다.

 

 

 

현대판 예수

 1988년 유럽의 알베이니에 엄청난 지진이 일어난 적이 있는데, 이 지진으로 인해서 어린 아기와 엄마가 무너진 건물 속에 갇히게 되었다. 손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를 두고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엄마는 손가락을 깨물어 아기에게 피를 빨아먹게 했다. 그들이 6일 만에 구조되었을 때 지나치게 흘린 피 때문에, 아기는 살았지만 엄마는 끝내 숨지고 말았다. 영국<런던 타임>지는 이 사건을 향해 ‘현대판 예수’로 규정했다.

 

 엄마의 피가 없었으면 살아남지 못했을 그 아기처럼 여러분들도 예수님의 피, 그리스도의 피가 없다면 살아남지 못하고 멸망 받아 마땅할 죄인들이 아닌가? 우리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서 작전에 뛰어들었던 그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우리 주님께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시고자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 분을 여러분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셨다. 아무런 보장도 확증도 보험도 없이, 확인서나 보증서도 없이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죽으셨다. 여러분이 어떻게 나올지 에 대한 아무런 기약도 없이, 보증서도 없이, 담보도 없이...

 

 

이것이 바로 기독교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스도를 모십시오. 그가 당신을 반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맞이하십시오. 그가 당신을 환영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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