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데살로니가후서 3장 6-18절의 본문을 가지고 <바울의 본을 따라>란 주제로 설교한 내용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일만 만드는 사람들'에 반하여 자신은 자비량선교사로 일하면서 본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평화를 해치고 있는 집단, 세 집단의 사람들에 대해 언급한다.
첫째는, 핍박자들이 있었다. 1장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1:5)이다.
둘째는, 몇몇 거짓 교사들이 있었다.
이러한 거짓 가르침에 대항하여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들이 전에 사도로부터 받은 가르침 안에 굳게 서야 했다. 이것이 2장의 강조점이다.
셋째로, ataktoi 즉 규모 없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만난 자들이며, 일부 주석가들은 그들을 ‘게으름뱅이’라고 칭한다. 그들에 대한 묘사는 3장에서 이전보다 더 명확하게 나온다. 무책임하고 ‘중뿔나게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바울이 개인적으로 편지를 통해서 이미 가르친 것들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제 모종의 엄하고 권위 있는 명령을 내려야만 했는데 그것은 거의 출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바울의 두 번째 서신, 그의 ‘역사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간단하게 분석해 보면, 1. 그리스도의 재림(1장), 2. 적그리스도의 반역(2장), 3. 그리스도인들의 책임(3장)과 같다.
권리보다도 본으로 V.6-9
데살로니가후서에 나타난 데살로니가 교회의 분위기는 종말에 대해 오해하면서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그릇된 종말론으로 말미암아 바울이 사역한 교회가 흔들리고 위태하기까지 하였다. 바울은 이러한 이들의 행위자들에 대해서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6절)라고 말하고 있다. 종말론이 잘못되면 규모가 없이 행동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분명한 철학과 생각을 정립한 신앙인이라면 종말에 대한, 미래에 대한 생각 또한 심각하고 진지하다. 하지만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일종의 쾌락주의자들과 안일주의자들이 존재하였던 것 같다. 바울은 이들의 질서 없음, 규모 없음-철학과 기독교 세계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행동주의자들의 모양새-, 그리고 바울이 전했던 복음의 교리에 어긋난 자들에게서 ‘떠나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의 이단아적인 생각과 이단적인 행동들로부터 단호하게 떠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순수하고 투명한 100%의 물이 담긴 물병에다 1%이상의 더러운 액체나 물을 집어넣으면 깨끗한 물이 그 더러운 물을 정화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깨끗한 물이 더러워진다. 이와 같은 원리로 사람들의 생각과 사상 도 그렇다는 것을 바울은 알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혹하는 자들에게 단호하고 분명한 삶을 보여줬는데 그것은 바로 바울이 일하는 모습이었다. 바울은 자비량사역자, 선교사였다. 그는 천막을 지으며 그것을 만들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사역지의 교회에서나 성도들로부터 나오는 사례로 생활하기 보다는 오히려 보다 더 선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오해를 사지 않고 선을 끼치고 덕을 끼치기 위해서였다. 바울은 열심히 일하였던, 일만 하고 저녁시간에는 쉰 것이 아니라 아니면 저녁시간에 일하고 낮에는 쉰 것이 아니라 주야로 일하고 복음을 전하고 주야로 복음을 전하고 일했던 자신의 삶을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7절에 그렇게 적고 있다. 7-8절에서 바울은 왜 자비량 사역자, tentmaker를 했는지에 대한 동기를 적고 있다. 바울은 자신에게 분명히 헌금을 받아서 사역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이 희생하고 수고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일면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도전을 주고 있다. ‘일을 하지 않는 무리들’에게 도전이 되고 가르침이 되는 것이다.
[살후 3:7-살후 3:8]
(7)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없이 행하지 아니하며(8)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바울에게도 분명히 그럴 수 있다.-9절. 하지만 바울이 그렇게 한 이유는
(9)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러한 바울의 선교사로서의 삶, 선교사적인 삶과 마인드는 우리에게 도전이 된다. 인간은 원래 죄성을 가진 존재이고 타락한 존재라서 자신을 돌아보기에 급급하고 자신의 유익에 만족하면서 다른 것들에 편함과 relax를 추구하지만 바울은 그와는 반대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여러분들은 어떠한가? 자신의 것을 내려놓고 다른 이의 유익과 만족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했던 바울처럼 여러분들도 그러한 믿음과 희생과 헌신의 본을 보여주는 그러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일만 만드는 사람들 V.10-15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역사상 성실하고 진실하고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은 문제를 별로 일으키지 않았다. 오늘날의 정치계에서도 흔히 볼 수 있지만 열심히 일하는 자들에게는 틈이 없다. 하지만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 일종의 백수건달들에게 더 문제의 소지는 잦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일하지 않는 백수 건달들이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들은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었다. Troublemaker들이었다.
They are not busy; they are busybodies1). For we hear that there are some who walk among you in a disorderly manner, not working at all, but are busybodies.
바울은 이런 자들을 향하여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말한다.
12절, 바울은 그러나 이러한 자들에게 대하여 ‘떠나라’고 말하면서 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바울은 이런 자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들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구원이 필요한 존재임을 바울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특히 한국 사람들은 ‘다르다=틀리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다른 것과 틀린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태도가 우리의 진리를 사수하고 고수하는 부분에서는 견지되어야 할 것이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포용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래서 바울은 14절의 강력한 어조의 메시지와 15절의 부드러운 어조의 메시지를 같이 하고 있다.
[살후 3:14-살후 3:15] (14)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15)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 같이 권하라
가르침이 다르고 교리적인 차이가 있는 자들에게 대하여 마땅히 부끄럽게 해야 할,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원수처럼’ 지내선 아니됨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포용심이 있어야 한다. 진리에 대한 보수는 당연히 필요하지만, 그러나 사람에 대한 자비가 우리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와 견해가 다른 이들에 대해 감싸안을 수 있는 넉넉한 가슴이 필요하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진리에 대한 충직한 사수와 종말에 대한 확실한 신앙을 지켜가야 할 것이다. 시작과 끝이 확실한 우리 기독신앙을 확실하게 부여잡기를 바란다. 바울의 마지막 인사로 말씀을 마무리하기를 원한다.
[살후 3:16-살후 3:18]
(16)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18)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주의 평강이 일마다 때마다 V.16-18
데살로니가 교회는 외부적으로 많은 핍박과 환난이 존재하였다. 그러기에 평화가 더욱더 절실히 요구되는 곳이었다. 바울은 여기서 ‘평화’를 말하고 있다. 주님의 평화를 말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평화, 무사안일주의 그러한 것이 아니라 진실로 샬롬을 고대하는 그들에게 주님은 샬롬이 되신다. 우리들이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어투의 ‘평안’, ‘샬롬’이 아니라 전투적인 삶 가운데서 평안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전쟁터에서 빗발치는 총탄과 폭격과 엄청난 포탄들의 흔적 가운데서 잠시 휴전을 취한다거나 휴식을 취하는 것은 정말 꿀처럼 단 체험이다. 훈련소에서 훈련병들이 50분 동안 정말 빡시게 훈련을 받다가 10분간 휴식을 취할 때의 그 쉼은 정말 말 그대로 ‘안식’이다. 하나님이 주신 샬롬은, 주님의 샬롬은 이러한 것들을 능가하는 초자연적이며 초월적인 체험일 것이다. 바울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말한다.
(16)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
‘때마다’, ‘일마다’-하나님의 평안은, 평강은 anytime, anywhere에서 필요한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것을 알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권리를 주장하기 보다는 본을 보여준 선교사였기 때문에 더 그러하다. 주님의 평안이 없이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더 갈급하게 그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Now the Lord of peace himself give you peace always by all means. The Lord[be] with you all.
1) busybody [bízibɑ̀di / -bɔ̀di] n.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 중뿔난 사람
오늘은 데살로니가후서 3장 6-18절의 본문을 바탕으로 <바울의 본을 따라>란 주제로 설교한 내용입니다. 바울의 자비량선교사로 사역한 이유는 일만 만들고 일하지 않는 이들에게 본을 보여주기 위한 이유였다는 이야길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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