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골로새서 4:7-18 본문을 가지고 <교회를 향한 인사.하나님 나라의 동역자들>이란 주제로 한 설교입니다.
마치 오늘 본문은 영화가 끝이 나면 마지막장면에 Credit장면이기도 하다. 출연자 누구누구, 스탭 누구누구, 제작자 누구누구 ...그렇게 표현될 것이다. 오늘 본문은 출연진 가운데 포함되는 사람들이 해당될 것이다. 주연은 바울이라면, 감독은 성령님, 제작은 하나님 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바울의 추천장(7-9)
두기고는 바울의 절친이자 매우 귀한 특사중의 한 사람. 그는 아시아 지방 출신, 제3차 전도여행이 끝나갈 무렵 바울과 함께 했었다. 헬라에서부터 마게도냐를 통해, 소아시아를 가로질러 예루살렘까지 되돌아가는 구제를 위한 전도여행을 하고 있었다(행 20:4). 즉 그 여행에서 두기고는 바울보다 앞서 마게도냐에서 드로아까지 가서 그곳에서 사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울이 로마감옥에 첫 번째로 투옥되어 있던 시간에 로마에서 어느 정도 바울과 함께 지내다가 이제 약 4년 후에 두기고는 사도로부터 골로새와 빌레몬으로 가는 서신을 목적지까지 운반하는 일을 위탁받았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에베소서도 함께 전하는 사명을 받았다. 그에 대한 설명은 ‘사랑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군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되었다고 말한다.
여러분은 사랑받는 형제이고, 신실한 일군인가?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되었는가?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받은 사랑을 간직한 자만이 사랑을 줄 수 있다. 욕심이나 정이나 에로스는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사랑, 아가페는 주기가 힘들다. 가정마다 상처가 없는 가정은 없는 것 같다. 나도 상처없이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아니더라. 그걸 어떻게 아는가? 결혼하고 나면 안다. 부부가 서로와 서로의 인격이 부딪힐 때 진정한 서로의 알몸 이면에 있는 내면의 진면목을 보는 것이다. 총각 때 손봉호 교수가 한 말을 기억한다. ‘부부는 이불 속에서 알몸과 알몸이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인격이 부딪힌다’고! 총각때는 정말 그럴까 생각했는데, 정말 그렇다. 인격이 다듬어지지 않으면 외모도, 돈도, 자가용도, 멋진 집, 높은 연봉과 인기, 명예도 소용이 없다. 다듬어지지 않으면 물러서야, 헤어지고 이혼도장 찍고 하는 것이 결혼이고 관계이다.
여러분, 사랑을 많이 받으라! 사랑을 많이 받으면 사랑을 줄 줄 안다. 사랑을 받을 줄 모르는 사람은 줄 줄도 모르는 사실! 하나 우리 그리스도인이 다행인 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의 전적인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다! 아낌없이 내게 부어졌기에 그 사랑으로 인해 내 자아상과 내 인격이 조금 나아진 것이다.
편지를 쓸 당시 종이가 그렇게 풍부한 것도 아니었고 값이 싸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이 많은’ 바울이 자기 편지를 대필해야 했던 상황도 좋은 것은 아니었다. 편지의 어떤 부분들은 쓰이기보다는 구술되었다. 따라서 그와 유사한 이유들 때문에 바울은 계속해서 내가 저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낸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피차간에 위로하고자 함이었다.
또한, 9절에선 오네시모를 같이 보낸다고 말한다. 빌레몬서에서 보시다시피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노예)이었다가 도망쳐 바울을 만나 회심하였다. 그가 회심이후에 얼마나 충성스런 종이었는지 몬 1:12에 보면 ‘내 심복’이라고 하였는데, 헬라어로 심복은 ‘심장’이란 의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한 오네시모가 두기고와 함께 바울서신을 전달하는 귀한 사명을 감당하였다. 오네시모를 품었던 바울이 있었기에 복음의 역사는 더 활기가 찼다!
여러분, 교회는 변화가 있어야 맛이다. 우리가 피자맛집을 갔는데, 디저트만 맛있더라고 하면 거기에 무슨 매력이 있겠는가? 교회의 제맛은 변화에 있다. 변화가 없으면 교회의 생명력도 끝이다. 늘 만나는 사람들, 늘 보는 사람들, 늘 반복되는 대화의 주제들! 지겨운 곳엔 교회의 존재가 있을 수 없다. 우리 교회는 사내커플이 아닌 교내커플이 많다. 성인부부들 중에서도 교회커플 결혼한 경우가 많다. 좋은 현상이다 자매를 수출하지 않아도, 다른교회로 빼앗기지 아니다! 파송하지 않아도 좋다. 그래서인지 교내 이성교제가 참 많다. 좋은 현상이긴 하지만, 만약에 깨지면 그 뒷감당은 누가 하는가? 단물 쓴물 다 빼먹고 마시고 나 몰라라 하면 그 사람은 누가 책임지는가? 그래도 집안에 부모가 믿기라도 하면 덜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이서요제가 깨지면 웬만하면 신앙도 버린다. 애인버리면 신앙도, 믿음도 져버린다. 아후!
교회는 살아있네! 살아있어야 한다! 오네시모가 완전 노예, 몸종같은 인물이었는데 바울을 만나서 ‘심장’과 같은 인물, 심복이 되었다는 것은 복음의 충격이요, 복음의 전율이다.
우리 공동체에 이러한 변화가 있었음 한다. 변화의 물결이 덮길 바란다. 생각이 변하고 사상이 변화하고 철학이 새로워지는 교회! 청년.대학부 생각이 완전 노인대학수준이라면 그것도 문제이다. 주 여호와의 신이 임하지, 이성교제의 신이 임하면 아니 된다! 이성교제의 신은 삼손에게 자주 임했다! 여자 때문에 망했던 삼손을 여러분을 기억할 것이다!
청년 대학부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일 감당하는데 있어서 신실한 일꾼으로, 주님의 심복, 심장이 되는 일꾼이길 소원한다. 복음으로 인해 변화된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헌신자로 견고하게 세워지는 우리교회 모든 권속들이 되기를 소원한다.
바울의 안부(10-18)
10-14절은 바울의 동역자 중에서 유대 태생인 세 사람-아리스다고, 마가, 그리고 예수 유스도-과, 또한 이방 태생인 세 사람-에바브라, 누가 그리고 데마-이 골로새 교회에 문안을 하고 있다. 특별히 아리스다고, 마가 그리고 예수 유스도, 이 세 사람을 한 데 묶어서 사용한 것을 보면 이 셋이 모두 유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거의 확실하다. 모두 “...그리고...그리고...” 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아리스다고가 데살로니가인이었기에 유대인이 아니다라고 하는 이도 있지만, 데살로니가에서 회심한 사람들 가운데 유대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 의견은 옳지 않다. 바울은 11절에서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다’는 말씀은 주목할 만하다. 그들은 할례파였다. 이것은 바울의 동족들이 자기에게 깊은 실망감을 주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바울은 자기가 자기 민족과 멀어졌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의식했다(롬 9:1-5). 그리고 유대주의자들이 자기를 의심하는 사실에 대해서 무감각하지 않았다. 특별히 여기에 ‘위로’에 사용된 단어 ‘파레고리아’는 신약성경에서는 오직 이곳에서만 사용된 말로서, 이 말은 ‘진통제’라는 말의 어원이 되며, 고통을 달래 준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가운데 그 세 사람이 보여주었던 관심과 헌신이 남달랐음을, 위로, 진통제의 위로가 되었음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란 큰 은혜를 나눴다는 것에 더욱 감사하고 있다.
사랑하는 청년 대학부 여러분! 우리에게 분명히 약점, 결점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아킬레스 건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발목잡히게 해선 아니될 것이다. 신학교 3학년때 후배중에 담배피는 1학년 후배애를 만났다. 알고보니 잘 아는 누나의 동생이었다. 이전에 리더였던 누나의 동생이 같은 동아리에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누나의 열심과 신앙과는 달리, 그 친구는 완전 outsider였다. 거친 모습이 많았다. 그때 친한 후배놈이 이 친구와 친구였다. 친한 후배놈, J의 친구 K는 아웃사이더! J는 그 친구와는 신앙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월했다. 하지만 몇 년 후, J는 군대를 가서 신앙을 거의 해체해버렸고, J의 친구 이 놈은 신학교와서 다시 믿음을 건축한 것이다. 이제는 K이란 친구가J란 친구에게 신앙적으로 권면하는 것이다. ‘네, 그렇게 살면 안 된다!’. 그 말은 몇 년전에 J가 K에게 했던 말인데 말이다.
여러분, 믿음은 현재이고, 현재는 선물이다. present is present! 여러분을 발목 잡고 있는 것을 계속 잡히게 놔두면 변화가 없다. 그것을 넘어서라! Beyond하라! 기기에 역사가 일어난다. 헬스 다닐 때-지금은 그런 몸매가 안 되지만!-근육이 커지는 경우는 언제나 내가 10번 역기를 들었다 놓았다고 치자, 그 10개가 내 한계다. 근데 1개 더 하는 것이다. 미친다. 쥐어짜서 힘을 낸다. 그런데 그 1개가 미친척하고 한 것이지만, 그게 내 10개에 플러스되어 11개의 근력으로 남는다. 그러면 다음에 할 때는 11개는 쉽다. 그때 다시 12개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근육과 알통은 커지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상처와 문제와 아픔과 콤플렉스도 놔두면 늘 근육없이 쳐진 살에 불과하다. 하지만 한계에 노크를 하면 할수록 거기에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팽창의 역사가, 부흥의 순간이 오는 것이다. 내가 늘 지금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살것으로 꿈꾸는가? 거기서 더 진보된 나를 꿈꾸고 비전을 갖고 목표를 세우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나를 더 만들어가실 것이다.
12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에바브라가 문안을 하는데 그에 대해 설명하기를,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였다고 말한다. 부단히 애써 기도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1) 13절: 에바브라는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수고가 심한 고통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골로새교인을 향한 격앙된 에바브라의 처신, 격양된 염려를 언급하는 것일 수도 있다.
누가복음의 저자, 의사인 누가에 대해서, 그리고 지금은 아니지만 훗날 세상을 사랑하여 떠난 데마에 대해서 안부를 전한다. 15절: 라오디게아의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이 있는 교회에 문안했다.
16절에서 이 편지를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게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하나는 골로새서이고, 또 하나는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이야기하는데 이것을 혹자는 에베소서라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그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하다. 가장 명백한 결론은 바울이 오늘날에는 존재하지 않는 서신을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냈다는 것이다.
17절: 골로새서에서도 역시 누군가가 담당하여 목회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골로새서가 쓰여져서 도착했을 때의 수신자는, 루카스 계곡에 있는 교회들의 목회자였던 에바브라가 될 수 없었다. 그 때 그는 바울과 함께 로마에 있으면서 그곳에 안부를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골로새서의 수신자는 누구인가? 두드러진 유사성으로 미루어보아 잠정적인 목회자는 바로 다름아닌 아킵보가 아닐까 싶다. 교회가 아킵보에게 주어진 직분을 “이루라”는 분부를 내리고 있다.
사랑하는 청년 대학부 여러분, 여러분이 맡은 2013년 직분을 삼가 이루길 바란다.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책임감없는 사람들은 크게 쓰임받지 못한다. 지금부터라도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신 하나님 앞에 헌신하겠다고 작정하고 최선을 다하자! 다양한 사람들이 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애쓰고 힘쓰고 있다. 우린 동역자이자 영적 파트너이다!
마지막으로 은혜로 축복하고 있다. 은혜는 가장 크며 가장 기본이 되는 축복이다. 그럴만한 가치도 없는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을 변화시켜서 영광을 향해 이끄시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이다. 사도는 은혜(화평을 따르리는)라는 말로써 편지의 서두를 열었다가 이제는 골로새서의 신자들에게 다시 한번 권위있는 이 은혜를 언급함으로써 편지를 끝맺는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들은 다양하였지만 공통된 것은 그들에겐 변화가 있었다! 심장처럼 뛰며 일하고, 진통제처럼 사람들이 고통당할 때 그들의 위로가 되었음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 그들이 바로 우리들, 여러분들이 되었음 좋겠다!
1) 1: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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