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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1장 24-29절,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by Message.K 2022. 3. 10.

신약성경 골로새서 1:24-29의 본문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제목을 가지고 설교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집안청소를 할 때에도 전부 다 치웠다고, 다 끝났다고 좋아라 한다. 하지만, 어딘가 누군가 다시 집안의 쓰레기를 이곳저곳에 내던져버리고, 먹다 남은 과자부스러기가 다시 돌아다닐 때 청소를 다한 부모의 입장에선 이만저만 화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시 해야 일이 남아 있을 때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우리집 막내는 정말 감당이 불감당이다. 흘리고 더럽히고 어지럽히고 싸고 던지고...어서 속히 똥기저귀 떼는 날을 소망해본다.

 

 

 

  어릴 적 이 숙제만 다하면 놀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숙제를 해서 완벽하게 처리했나 싶었는데, 갑자기 떠오르는 미뤄둔 숙제나 과제가 생각날 때, 또 해야할 일일 생각날 때 그 때 기분은 정말 을씨년스럽다.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은 과히 쉬운 감정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대목이다.

 

 

 

 

  사도바울은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아직도 고난이 남아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영 기분이 찝찝한 것이 도대체 뭘 말하겠단 말인가?

 

 

 

 오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다 받지 않으시고 남겨 놓으신 것이 있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 우리를 위해 모든 고난을 다 받으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한 사역을 “다 이루셨다!”(테텔레스타이)-다 지불했다, 완벽하게 깔끔하게 다 처리했다! Wonderful이다! (요 19:30).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못 다 이루신 무엇이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는 먼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이것을 바울은 바로 같은 24절에서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따라서 교회가 고난을 받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몸이 고난 받는 것이며, 이는 곧 그리스도께서 고난받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주님의 교회가 고난을 받으면 주님 자신이 고난을 받으시며 아파하시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주님과 주님의 교회는 머리와 몸의 관계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지금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고난받으시는 것처럼, 사도 바울도 교회를 위해 받는 고난을 기쁨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이것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사용된 ‘채운다’는 단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 사용된 ‘안타나플레로오’라는 희랍어 동사는 단지 ‘가득 채우다, 보충하다’라는 동사가 아니라 그 앞에 ‘안티’라는 전치사가 덧붙여 있다. 전치사 ‘안티’의 개념은 ‘맞은 편, 상대편에 있는 그 무엇’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이는 곧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고난받으시는 것처럼 사도 바울이 또한 ’자기 편에서‘ 고난받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바울의 고난 사이에 유사성과 연합성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사도바울이 그리스도께서 받아야 할 고난을 ’대신‘받는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헤르먼 리덜보스가 여기 24절의 ‘그리스도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역사적 고난으로 보고, 그의 고난의 부족한 것을 바울이 ‘대신’ 채운다고 혹여나 본 것은 큰 잘못이다.

  하지만, 주님이 교회의 머리시되고, 그의 몸된 그리스도인들, 오늘 본문의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육체에 채운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고통당할 때 그분은 그냥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고 구경하기만 하고 무신경하게 무슨 강건너 불 구경하듯이 대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아파하고 같이 눈물 흘리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고난은 ‘한번에, 영원히’ 대속사역이 성취되었지만, 이런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바울이 회심 전에 주님의 교회를 핍박할 때 주님께서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행 9:4) 교회 역사상 많은 충성된 순교자들이 주님 때문에 핍박당하고 고난 받을 때 주님 자신이 아파하시고 핍박받으신다고 증거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우리는 여기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고난받으시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사도 바울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함께 ‘자기편에서’고난받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어거스틴, 루터, 칼빈, 뱅겔 등).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남은” 것은?

 바울이 예컨대 고후 1:8-10에서 묘사했듯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바울처럼 복음을 위해 큰 고난을 경험할 모든 이들의 미래의 고난이었다.

 

 

 빌립보서 2:30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헬, 아나플레로오) 함이니라(목숨을 걸었다고 말함)

 

 

 

  하나님은 ‘내가 교회의 일꾼이 된 것은’에서 일꾼은 헬, 오이코노모스이다.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청지기 내지 일꾼은 로마세계에서 큰 집안이나 사유지를 관리하는 자였다. 로마세계에 널리 사용된 단어였다. 바울의 책임은 말씀을 이루는 것이었다(24절, 헬/ 안타나플레로오.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우는 일은 말씀선포가 이루어질 때(헬, 플레로오, 25절) 발생한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고난을 받으며 죄사함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단회적인 고난과 희생이라고 선포한다.

 

 

 

 

 바울이 당한 고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무엇이었나?

진정한 종이란 소책자에선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고 섬기고 봉사할 때 나타나는 결과가 감사와 찬양과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 뿐만 아니라 ‘스트레스’도 온다고 말한다. 세상에서 받는 스트레스와 다른 성경적인 스트레스가 있다. 바울에겐 어떤 고난, 어떤 정신적, 영적, 육체적 스트레스가 있었을까?

 

 

 

바울이 당한 스트레스

[고후 11:24-고후 11:28]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육체적 스트레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영적, 정신적 스트레스)

 

 

 

복음을 위한 스트레스를 마다하지 않는 바울!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자발적인 바울의 헌신으로 이루어진 결과이다! 받기 싫은데 억지로 받은 것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로 인해 따르는 모든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불신앙에서 오는 염려에 빠질 수 있음을 기억하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그러한 육체적, 영적, 정신적 스트레스로 올 수 있다.

  

 

 

 

 

바울이 가진 스트레스에 대한 ‘내적 탄력성’?

 

(1:11)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고후 7:4)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9:14)And in their prayers for you their hearts will go out to you, because of the surpassing grace God has given you.

(7)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리운 자 같을지라도 너희로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13:7)Now we pray to God that you will not do anything wrong. Not that people will see that we have stood the test but that you will do what is right even though we may seem to have failed.

 

 

        

청년에 때에 꿈을 향해 달려간 사람들의 삶-나는 심었고!

  1866년 8월 조선땅의 복음화를 위한 부품 꿈! 제너럴 셔면호를 탄 청년 토마스,

그는 성경책을 가지고 평양 대동강으로 향한다 그러나 불타는 배, 강물에 떠내려가는 성경책들, 사랑하는 조선에 첫발을 딛자마자 처형당하는 청년 토마스! 떠내려가버린 헛된꿈!

 

“영원한 것을 위하여 영원하지 못한 것을 버리는 사람은 결코 바보가 아니다”

 

아우카 부족을 향한 관심,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아우카 부족에 의해 살해당한 청년, 짐 엘리엇! 무모한 헌신?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것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것을 시도하라!”

 

 가난한 구두수선공 윌리암 캐리, 그의 위대한 도전 개신교 역사상 최초 해외 선교회 설립. 1793년 인도 선교사로 파송 하지만 한명의 개종자도 없는 7년, 아들의 죽음과 아내의 정신병, 위대한 도전? 좌절된 도전!

 

 

 

  좌절된 도전! 헛된 꿈! 무모한 헌신! 좌절된 도전,

 그러나 토마스를 죽인 박준권은 훗날 평양교회 장로가 되고, 이 장면을 목격한 최치량은 교회를 개척한다. 그때 떠내려온 성경으로 도배된 박영식의 집은 평양 대부흥 운동이 시작된 장대현 교회가 된다.

 하나님의 꿈 청년 토마스 27세

 

 

짐 엘리엇이 죽은 후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의 동일한 헌신으로 아우카 부족은 복음화되고 그에게 창을 꽂았던 키모는 아우카 부족의 최초의 목사가 된다.

목숨을 건 헌신 청년, 짐 엘리엇, 29세

 

 

결코 멈추지 않았던 윌리암 캐리의 위대한 시도, 44개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1,00명이 넘는 교회 개척, 훗날 그는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운다.

위대한 도전, 청년 윌리암 캐리 32세,

 

 

헛된 꿈!

하나님의 꿈!

무모한 헌신!

목숨을 건 헌신!

좌절된 도전!

위대한 도전!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

그들의 또 다른 이름!

청년!

 

위대한 선교 공동체 모리바인 지도자 -청년 진젠도르프 27세

학생 자원자 운동(SVM)의 시작-청년 사무엘 밀즈 23세

아프리카 복음의 길을 연 -청년 리빙스턴 28세

중국 내지 선교의 선봉자-청년 허드슨 테일러 22세

조선의 첫 개신교 선교사-청년 언더우드 24세

성경번역 선교의 선구자-청년 타운젠트 21세

 

지금 이 순간에도 비전 헌신 도전의 청년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History_Maker는 바로 청년 여러분이다!

거룩한 Vision Maker는 바로 여러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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