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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새로운 삶의 길

새로운 삶의 길②요한일서 5장 13절, 구원의 확신(객관적 증거)

by Message.K 2021.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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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요일 5:13, 구원의 확신(객관적 증거)


'실족해 생명 잃을 뻔한 갓난 송아지 극적 구출 ~ '된 사건이 과거에 있었다.
코 끝만 땅밖으로 나온 채 ‘생매장(?)’되었던 송아지가 사냥꾼들에 의해 발견, 극적으로 구출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몇년 전 미국 언론에 따르면, ‘송아지 생매장 사건’은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 휠링 인근의 숲속에서 일어났다.
토끼 사냥을 위해 숲에 들어간 빌 바셋 일행은 숲에서 큰 소리로 울고 있는 암소 한 마리를 발견했다. 암소는 어쩔 줄 몰라하며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는 것이 사냥꾼들의 증언. 암소의 이상한 행동을 보고 달려간 사냥꾼들의 눈 앞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는데, 암소가 돌고 있던 지점에 갓 태어난 송아지가 코 끝만 나온 채 파묻혀 있었던 것이다.


사냥꾼들은 즉시 죽을 위기에 처한 송아지를 구출했는데, 구출 작전 내내 어미소는 사냥꾼들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언론은 전했다. 또 송아지를 인근 농장으로 후송(?)할 때도 어미소는 평화롭고 행복한 표정으로 사냥꾼들의 뒤를 따라왔다고 한다. 아기 송아지는 태어나자마자 마못 등의 야생동물이 파 놓은 구멍속에 빠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데, 건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본론

 이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현재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 자신에게 생명력이 약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 만큼 희열과 기쁨을 느끼는 일도 그리 많지 않다. 몸은 건강하게 생리적 역할을 다 하되 삶의 실제, 살아있는 생생한 느낌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비극일 수밖에 없다.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 영적으로 거듭났다고 하는 사실, 죄와 멸망의 현실로부터 구조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필수적으로 가져야 할 통찰력이며, 기쁨의 원천인 것이다.

 

  사도 요한은 오늘 요일 5:13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13)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기 "알게 하려 함이라"에 쓰인 동사는  'prove: 증명하다' 이다.

 이것은 우리를 다른 말로 구원의 확신이라고 한다.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진짜 예수를 믿고 있는 증거, 확실한 증거, 확신을 가지는 것...그것을 구원의 확신이라고 한다.



  여러분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자주 이야기하는 ‘지금 죽어도 천국 갈 자신이 있는가?’ 질문에 확신을 가지면서 이야기 할 수 있는가?

 

 

 

그릇된 접근

  그러나 구원의 확신(즉 구원을 받은 것을 아는 것)은 우리의 어떤 노력(국가대표 선수들이 올림픽이나 큰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는 것처럼)이나 만족감-우리가 배가 너무 고팠는데 맛있는 피자와 통닭을 먹고 나니 느껴지는 깊은 포만감 같은 만족감-을 근거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변화된 삶을 통해 우리의 심령, 영혼에 보내시는 일종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종종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증거로 해서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다.


(요 1: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
가족 중에 교역자가 있거나 교회의 중요한 요직을 맡은 분이 있는 것, 장로님, 권사님의 아들, 목사님, 강도사님, 전도사님의 아들이라는 혈통이 구원받은 증거가 될 수가 없다.

 

(요 3:10)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성경에 대한 지식을 많이 쌓음, 성경을 몇 독 하고 성경고사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그 모든 지식들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은 그 당시 니고데모가 이스라엘의 선생이었고 율법에 대한 탁월한 지식을 가졌지만 그가 중생해야한다고 고백하였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요 4:20)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그리스도인의 모임에 정기적으로 출석함, 예배함으로써 구원받은 것을 착각한다. 예배는 하나님께 구원받은 사람들이 드리는 일종의 표현이다. 또한 예배는 구원받은 사람들만의 표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사람이 예배당에 앉아 예배드린다고 해서 다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예배드리기를 소홀히 해도 된다고 오해하지는 말기를 바란다.

 

(마 7: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이적과 기사와 권능을 행하거나 그리스도인의 활동에 몰입하거나 교회 임원으로 많은 행사와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찬양을 인도하고 반주를 하고 교회 여러 가지 직분을 많이 맡아 활동하는 것으로 구원받았다는 증거를 가지는 것을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은 무엇인가? 이것들은 예배처럼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는 활동이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지 구원의 증거는 아니다.

 

이상과 같이-혈통, 선생, 예배, 활동-자신이 표준과 기준에 따라 나도 구원받은 것이려니 하는 생각을 갖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이것은 구원받은 사실과 별 관계가 없으며, 일시적인 자기 위안, 자기 착각일 뿐이다.



 

확신에의 길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받았다는 확실한 증거, 구원의 증거를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아는 일은 객관적인 증거와 주관적인 증거로 말미암아 알 수 있다. 객관적인 증거는 나타나는 것이고, 주관적인 증거는 우리의 생활에 변화에 나타는 것이다. 오늘은 객관적인 증거를 살펴보기로 하자.


 1> 말씀의 증거-객관적

 하나님의 약속

(행 16:31)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이 약속의 누구의 약속인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다. 왜 이 말은 신뢰할 만한가? 그것은 바로 성경에 씌여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그것은 내 것으로 영접-지난주에 말씀한 것처럼-하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히 9:28)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담당하셨는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오대양 육대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람들, 200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1900년대에도, 1800년대에 태어난 모든 세기와 모든 세대, 모든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셨다. 그렇다면 이 많은 사람들의 죄를 어떻게 예수님이 담당하실 수 있단 말인가? 지나간 시간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예수님이라는 한 사람이 과연 우리의 허물과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단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은 또 반복될 필요가 있는가? 반복될 필요가 없다. 구약시대에는 참 번거로웠을 것이다. 죄를 지었을 때마다 백성들은 자신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양, 염소, 비둘기, 밀가루 등과 같은 것을 가지고 성전에 찾아가면 제사장이 대신 그 번제, 화목제, 속건제 등과 같은 제사의식을 통해 자신의 죄를 청산할 수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죄의 빚’을 지고 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살아가면서 늘 ‘죄의 빚’을 지며 살아간다. ‘죄의 빚’을 지면 휴대폰이나 전화로 ‘빚을 빨리 갚으라’고 연락이 온다.

‘OOO씨, 지금 지고 계신 빚이 2천만원입니다. 빨리 갚지 않으시면 불이익을 당합니다’

계속 전화가 오고 독촉장이 우편함으로 날라 오고 그 연락을 받은 나는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가는 것이다. 빚을 갚으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돈이 없다.



내가 돈으로 빗대어 설명했는데 우리의 양심에서 죄를 지으면 계속 경고사인을 보내고 ‘빚을 갚으라’고 재촉하는 것이다. 제가 찬양팀들과 영화를 거의 1년 만에 영화를 보았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뮌헨’이란 영화였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원래 유대인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출신 성분이나 정체성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고민한 흔적이 영화에 나타난다. 거기에 보면 테러와 암살이 자주 자행되는데 사람을 죽이고 나서 사람을 죽인 킬러가 아주 편안하게 떵떵거리며 사느냐?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신적인 착란과 망각과 혼란을 경험하며 정신적인 병적인 증후까지 보여준다. 왜 그러한가? 사람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는데 죄를 지으니깐 그런 것이다. 그것도 심각한 죄를, 살인을 저지르니깐 자기 영혼이 자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은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선한 모든 부분들을 닮았다. 그런데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도적질, 살인, 거짓말, 사기, 분노, 다툼, 갈등, 질투, 시기, 적대감, 간음, 탐욕, 욕심 등과 같은 것이 사람의 영혼을 파괴시키기까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죄를 지으며 빚을 지며 살아간다. 그것은 죄의 빚이다. 그 죄의 빚을 청산해야 사람의 영혼이 자유로울 수 있다. 여러분이 때때로 여러분이 하고 싶은 대로 한 번 해 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원래 그러면 안 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렇지 하지 않을 때 느끼는 죄책감과 마음 상함’은 참 감당하기가 힘들다. 사람을 속이거나 친구를 미워하거나, 사람들을 무시하고 비교하고 내가 생각지 말아야 할선을 넘고, 내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의 범위를 벗어나 술 마시고, 담배 피고, 자주 작업의 전선에 들어가고, 인터넷 유해 사이트만 찾아다니며, 야동 음란물을 숨어서 즐기는 기타 등등의 모든 죄를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라. 그렇게 하고 나면 후유증이 너무 심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가 그런 죄를 지으니 마음이 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러한 모든 죄를 예수님께선 어떻게 해결하셨다고 하는가?

  ‘단번에’, ‘한번에’, ‘한방에’ 해결하셨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은 또 반복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성령의 인치심

(엡 1:13)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우리가 믿었을 때 성령께서는 인치셨다. 한 번 인치신 것을 돌이키는 경우는 없다. 인친다는 것은 소유권을 확정한다는 표시이다.

 

 이처럼 성경에서는 성부 하나님의 약속,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성령님의 인치심의 삼중적인 확신을 주고 계신다. 우리는 이 삼중적인 확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객관적이고 명백한 확신,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성경에 쓰인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객관적인 확신이다.





결론

  우리는 어떻게 구원의 확신, 구원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는가?

첫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나와 내 집이 구원받는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둘째,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죄를 한 방에 해결하셨기 때문이다.

셋째, 성령님께서 우리를 ‘너는 내것이다’, ‘너는 내꺼야’라고 인치셨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구원의 확신을 경험함으로 날마다 날마다 기쁨으로 생활하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되었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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