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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새로운 삶의 길

새로운 삶의 길①요 1장 12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구원)

by Message.K 2021.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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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교(강의)는 중고등학생을 위한 구원의 길(IVP교재 '새로운 삶의 길'을 토대)을 안내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음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①요 1:12,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구원)

 

우리 사랑하는 중고딩 지체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게 이 땅에 태어났나요? 특별히 태어나면서 부모님으로부터 전해들은 일화나 에피소드가 없나요? 저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이다. 제가 태어날 때 어머니가 참 많은 고생을 하셨다고 한다. 이유인즉, 제 머리가 너무 커서 저를 낳는데 참 힘드셨다고 한다. 하지만 어머니의 산고의 고통이 있었기에 제가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고 지금까지의 인생을 살아 올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부모님의 뱃속으로부터 발길질을 한다든가 여러 가지 소리를 울리며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출생이라고 한다. 이것은 육적 출생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영적 출생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오늘 말씀처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는 ‘중생’(beig born again, rebirth, regeneration) 이라고 부른다. 중생, 즉 다시 사는 것, 다시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 거듭 태어나는 것은 요 3:5에서처럼 오직 물과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갓난 아기로 태어난 아기가 젖을 먹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영양 실조에 걸려 죽을 수 밖에 없다. 에티오피아의 난민의 광경을 보면 애들이 먹지 못해서 삐쩍 말라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우리가 영적으로 출

 

 

생하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우리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우리는 영적인 갓난아기로 태어나는 것이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학위가 여러 개 있는 현명한 지식인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예수를 늦게 믿어 초신자라면 그 사람은 ‘영적 박사’가 아니라 ‘영적 갓난아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벧전 2:2에는 ‘갓난 아기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함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 말은 곧 말씀을 매일 매일 섭취하지 않으면 영적 갓난아기는 늘 영양 실조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죽음에서 새롭게 태어난 갓난 아기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섭취함으로써 머지 않아 장성한 사람, 성인, 영적 어른으로 커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히브리서 5:14에서는 ‘장성한 자-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는 자,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로 묘사하고 있다. 여러분들은 어디에 속한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성경지식을 많이 한다고 어른이 되고 장성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갓난아기인가? 장성한 어른, 성인인가?

 

 

 

우리는 육신이 태어나 자라고 노쇠하고 죽는 것을 일생, 인생이라고 한다. 이와 똑같이 영적인 삶에서도 일생이 있다. 그러나 이 영적 일생은 출생은 있으나 끝이 없고 영원으로 이어지는 놀라운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엡 2:1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에베소 교인들의 중생전의 상태를 바울은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말한다.

 

 

이 세상에 아무리 특별하게 출생하고 아름다운 가문과 휘황찬란한 돈 많은 집안에 태어난 재벌이라 하더라도 성경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갓난아기도 죄가 있는가? 저는 1남 2녀 중에 장남이다. 제 첫째 동생과 둘째 동생 사이에 또 다른 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세상에 태어나려다가 죽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 동생의 얼굴도 모른다. 시골에 있는데 애기가 죽었다는 소식 밖에 듣지 못했다. 세상에는 이런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있을 것이다. 세상의 빛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이 땅을 떠나버린 아이들...이런 아이들은 죄가 있는가? 아니면 이런 아이들은 세상에 태어나 멋도 모르고 있다가 죽었기 때문에 죄가 없는가?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다. 이것을 바로 ‘원죄’(Original Sin)라고 한다. 우리는 아담의 후손이다. 아담이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아담의 죄까지도 우리는 물려받았다.

 

 

 

그렇다면 이런 애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지옥 갑니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청소년 시절에 이런 고민을 많이 했다. 대답은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카톨릭에서는 이런 애들, 구원여부에 판단을 내리기 힘든 사람들을 일단 보내는 곳이 ‘천국’도, ‘지옥’도 아닌 ‘연옥’이란 곳이라고 한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천국과 지옥외에는 다른 어떤 공간도 장소도 만들지 않지만 천주교에서는 ‘연옥’이란 장소가 있다고 한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 갓 태어나서 멋도 모르고 죽은 아이, 평생을 죄 하나 짓지 않고 순전하게 살았지만 예수님을 모르고 죽은 사람, 예수를 믿기는 하였지만 이 세상에서 죄를 너무 많이 지은 사람 그래서 도저히 천국으로 바로 보내기엔 주저하게 되는 사람... 한방에 천국 보내기엔 너무 주저되는 사람들…이런 사람들이 일단 ‘대기상태’로 있는 곳이 연옥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땅에서 그의 후손들이나 주변의 사람들이 그 사람을 위해 선행을 많이 하거나 구제나 헌금을 많이 하면 그 사람이 천국으로 갈 수도 있지만 이 땅의 사람들이 그 사람을 위해 변변찮게 행하면 그 사람은 지옥으로 간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 생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중요한 것은 이 땅의 모든 구원은 그 사람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 땅에 우리는 어머니의 태를 빌어 올 뿐이지 홀로 태어나서 홀로 죽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거기에는 그 누구도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요 1:13에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권세’는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 성경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예수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 중에 잘못된 것을 13절 앞부분에 이야기하고 있다.

 

 

첫 번째 무엇인가? 혈통이다.

이것은 예를 들면 우리 가문이 예수님을 3,4대째 믿는 믿음의 가문이기 때문에 나는 틀림없이 천국에 갈 수 있고 구원 받았다고 단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인간적인 기원이다. 내가 목사님의 아들, 딸이기 때문에, 내가 집사님, 장로님, 교회의 충성스러운, 모든 교인들이 다 인정해주는 그런 직분자의 자녀이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아니라고 말한다. 여러분 중에 이런 친구들이 있는가? 구원은 그렇게 피에 의해 되물림되는 것이 아니다.

 

두 번째는 무엇인가? 육정이다.

이것은 인간의 육신적인 성적인 충동으로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인간적인 욕심과 욕망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세 번째는 무언인가? 사람의 뜻이다.

사람이 자식을 번식시킬려는 의욕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나의 수제자나 아니면 나의 영적 자식이라 칭하기 위해 한 사람을 택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뜻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요즘 인터넷에 가면 어떤 카페를 가입하려고 하면 쉽게 가입하는 것도 있지만 조건을 다는 곳도 몇 군데 있다.

하지만 카페 같은 곳, 동아리나 클럽은 쉽게 가입할 수가 있다. 자기가 관심만 있고 가입하고자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구원은 카페 가입하는 것처럼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라는 이 단체에 소속되었다고 해서 구원 받는 것은 절대 아닌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른 구원의 기원은 무언가?

 

13절 끝에는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고 했다.

 

조금 추상적인가?

그럼 다시 12절로 돌아가보자.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어서 지옥 갈 수 밖에 없는 영적 인생’가운데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요 1:12을 다같이 읽어보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접이 무언가? 아는 사람? 전도모임에 다녀오거나 전도훈련이 많이 받은 친구들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영접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외국의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비행기에 내리자마자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두 나라의 국기를 흔들면서 환영하는 장면을 여러분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한 환영, 미소가 가득하게 맞아들이는 것을 ‘영접’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환영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마음에 믿는 자, 모셔 들이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굳이 마음에 모실 필요까지가 있는가? 라고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냥 교회에 와서 예배만 드리면 되는 것이지 굳이 예수님을 거추장스럽게 모시고 영접 해야하고 환영해야 하는가?

 

  

사도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고후 5:17에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마귀의 자식’(요 8:44)(호적)-거부하고 싶지 않은가? 하지만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이요, 죄의 종(신분: 롬 6:17), 그리고 늘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에 의해 ‘인도’를 받고(엡 2:2), 우리의 ‘상태’는 엡 2:1에서와 같이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라는 것이다.

 

 

우리는 마귀의 자식이고, 죄의 종이고, 늘 사탄의 시주를 받아 살며,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누군가 우리를 다시 새롭게 재창조해야만 한다. 그 누군가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우리를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사랑하는 부모님도 아니고 오빠, 형, 누나, 언니도 아니다. 학교 선생님도, 교회 선생님도, 사랑하는 여친, 남친도, 친구도 우리를 새롭게 만들 수가 없다. 물론 조금의 도움은 되겠지만 우릴 전적으로 새롭게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기 때문이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는데 우리는 모두 도저히 탈출할 수 없는 감옥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은 죄수라고 가정해 보자. 죄수가 죄수를 석방시키고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우리를 석방시키고 자유케하려면 철창 밖에서 무슨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야만이 가능한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의 감옥’에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영적인 죄수와 같다. 우리의 죄덩어리는 암세포와도 같은 것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를 힘들게 하고 우리를 죄짓게 하고 우리를 절망하게 만든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 자신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고백했던 것이다. 여러분의 죄의 암세포를 한꺼번에 걷어찬 분이 계신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가 친구에게 ‘네 생일이 언제냐?’고 하면 ‘몇월 몇일이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영적인 생일이 언제냐고 하면 아마도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한 그 날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까지 한 번도 이런 영접함이 없는 친구들은 오늘이 영적인 생일이 되었음 좋겠다.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절대!!!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권세로 늘 감사하며 사는 하나님의 청소년이 되었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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