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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로마서

로마서 강해㊷ 14장 13-23절, 강한 자에 대한 권면

by Message.K 2021.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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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본문: 서로 비판하지 말라(1-12절)

 

-문제: 먹는 것, 마시는 것, 날의 문제

-결론: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

 

 

 

 여러분은 어떤 편에 서기를 원하는가? 강자의 편인가? 아니면 약자의 편인가? 프로야구경기를 보다보면, 저는 삼성팬이라 언제나 연승하기를 원한다. 근데 좀 재미가 없긴 없다. 계속 이기고, 점수 좀 내면, 뒷문단속은 확실하니. 경기의 끝이 뻔하니 재미가 좀 없긴 하다. 그래도 자기가 응원하는 팀은 항상 이겨주길 바란다. 에누리가 없다.

 

 

  우리의 인생의 경기에 있어서도 우리는 지는 것을 싫어한다. 이기고 싶어한다. 항상 승리하고 부요하고 용기백배하고 기백이 넘치길 원한다. 그게 우리의 심리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승자의 편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키작고 어린, 하지만 믿음있는 다윗의 편이시지, 키가 3미터가 넘고 용사인, 그러나 믿음없는 골리앗의 편이 아니셨다. 

 

 

 오늘 본문이다.

성경에서는 언제나 약한 자들을 변호, 약자들의 편을 자주 드시는 하나님이시다.

 

세상은 아니다. 세상은 강한 자, 백이 있는 자, 돈이 있는 자, 권력과 권세가 있는 사람, 인기 있는 사람의 편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진짜 웃긴 것은 그런 세상의 모든 것들은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JFK는 세계를 주름잡는 미국대통령이었다. 하지만, 그는 저격당하고 암살당했다. 링컨도 마찬가지였다. 링컨도, 케네디 대통령도 대단한 인물이었지만...세상의 모든 권세와 권력과 모든 것들은 마치 우리의 소유물이나 전유물처럼 내게 다가오지만, 언젠가는 등을 돌릴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외모, 인기, 물질, 권세, 능력, 젊음...다 떠나가는 것들이다. 언제나 변함없이 내 곁에 있는 것들이 아니다.

 

 

 

  마스미 토요토미의 소책자 <참 사랑 그 어디에>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정말 이쁘고 몸매도 좋은 멋진 여성이 이제 남자와 연애중이다. 결혼도 약속한 사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여성의 집에서 보일러화재가 나서 여성이 완전 화상을 심각하게 입은 것이다. 여자는 남자의 도움과 위로가 필요한 시점이다. 여자는 병상에 누워있다. 하지만 남자는? 여러분이 만약 남성이라면, 그 약혼남이라면 말한다. 어떤 자세를 취하겠는가?  참 사랑은 그 어디에? 남자는 여자친구를 떠나버린다. 화상입고 얼굴, 몰골이 형편없이 변해버린 그녀를 두고 떠나버린다. 어쩜 요즘은 당연하게 반응할지 모르겠다. 마스미 토요토미는 그 남자의 사랑이 그 여자의 외모 때문에 사랑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 외모가 사라져버리니 그녀를 떠나버린 것이다. 너무 고지식한 이야기인가? 그런 시대가 되어버렸다.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약자의 편이시고, 죄인들의 편이시고, 연약한 자들의 손을 들어주신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아보시길 좋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오늘 본문에서도 13절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바울은 교회 안에 분쟁이 생겼을 때 누구에게 책임을 더 부과하는가? 바로 강한 자에게 더 무거운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이 형제에게 생기는 이유는 그 형제들이 강한 형제란 말인가? 약한 형제란 말인가?

 약한 형제, 믿음의 아직 초짜인 지체들을 의미한다.

 

그런 이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 무엇보다도 믿음이 강하고 성숙한 이들이 먼저 조심하고 주의해야 한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는 믿음이 강한 사람들에겐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이제 갓 이교도에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에게는 심각한 사안이었다. 이전에 우상숭배인지 모르고 먹었던 음식이었지만,

 

 

이제는 14:14 ‘내가 주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라고 했고, 예수님은 막 7:15에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은 더럽게 하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사도행전 10:9-16에서 베드로에게 주어진 계시인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말씀을 기억할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는 부정한 것과 깨끗한 것의 구분이 없다. 확대하여 말하면, 유대교 의식에 존재했던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의 구별이 없어진 것이다. 이점에서 바울은 강한 자와 의견을 같이 한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의 원리를 수용하는데 현실적으로 어려움을 느끼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즉시 인정하고 있다. 그들은 유대인의 관습을 오랫동안 느꼈던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의 삶에 깊이 뿌리내린 관습을 하루 아침에 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양심이 아직도 어떤 음식에 대해선 여전히 더럽고 거룩하지 못한 것이다. 14:14후반절에서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손상받은 양심을 가지고 사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바울이 연약한 형제를 설득하기 위해 어떤 논쟁이나 강제적인 명령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14: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고 했다. 강한 자는 자기 견해를 연약한 형제에게 강요해서는 안 되고, 대신에 그는 행동을 할 때, 연약한 형제의 양심을 사려깊게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첫째, 강한 자의 자유로운 식사 행동을 보고 연약한 형제가 괴로워하거나 또는 자기 양심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그 본을 따르게 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랑의 원리를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4:15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그리스도는 연약한 형제를 위해서도 죽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사랑해야하고, 그의 연약한 양심에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사랑이란 형제를 위하여 필요하다면 자신의 자유도 제한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랑은 근본적으로 자유하다. 오용된 자유는 형제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다. 또한 형제의 구원자요, 보호자이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다.

 

 

  둘째, 만일 강한 자가 자기 음식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불화와 분쟁을 일으키면, 불신자들은 복음(선한 것)을 좋지 않은 것으로 보고 교회를 비방할 것이기 때문이다.

 

14: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이제 중요한 것은 ‘성령 안에서의 삶’이다.

수평적인 측면: 성령의 삶은 공동체 안에서의 서로를 세우는 삶이다. 그런 삶의 특징은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의:공동체에 대한 신실함으로서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용납하고 서로에 대해 사랑의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한다.

화평:상호 조화와 복지에 공헌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쁨:의와 화평을 추구함으로써 공동체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뜻한다. 사실 이러한 의와 화평과 기쁨은 성령의 열매이다.

 

갈 5:22-23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 열매는 하나님이 우리 공동체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공동체 가운데 현존한다는 증거이다.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무엇을 먹고 마시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행사를 할 때, 치킨을 먹고 피자를 먹고 콜라를 마시느냐 떡뽁이를 먹느냐 굉장히 중요하다. 왜? 사람들은 먹는 것을 통해 친해지기 때문이다. 제가 여러분과 같이 많이 밥을 먹지 못하는 개인적인 사정을 양해하길 바란다. 그 많던 살들이 이렇게 빠져버린 냉혹한 현실이 때론 좋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음식을 같이 나누는 교제는 정말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만날 때, 삭개오를 만날때도 심각한 대화를 나누지 않으셨다. 만나서 대뜸하는 말씀이 너네 집에 가서 밥 먹어야겠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비난했지만, 예수님은 삭개오를 초청하신 것이다. 음식은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중요한 본질은 ‘의와 화평과 기쁨’인 영적인 은혜임을 기억하자.

 

 

 우리가 음식뿐만 아니라 기타 다른 모든 비본질적인 문제들로 인해 공동체 안에서 서로 양심이 충돌되면, 당연히 강한 자가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중1때 저는 오락실에서 큰 사건을 경험했다. 내 가방을 누가 훔쳐간 것이다. 친구따라 잠시 들른 오락실에서 그런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때 우리 어머니는 완전 멘붕이 오셨다. 어머니는 기도원 영성파 이셔서 안수기도하고 사탄아 떠나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때만 해도 오락실 가는 것은 어머니에겐 금기사항이었다. 어머니 양심에는 오락실 가는 것이 죄의식을 불러오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살짝 죄의식 느끼다가 후에도 자주 갔다. 이런 부분들이 예가 될 수 있겠다.

 

 

  무엇을 하느냐? 무엇을 하지 않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믿는 자는 개인의 자유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더 생각해야 하는 기준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의 유익을 구했다면, 십자가를 뭐하려고 지셨겠는가? 자신의 유익과 특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의 유익을 구하며 사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이렇게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역사가 일어난다.

14: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그러기에 우리도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한다(19절)

 

-화평의 일: 동료 그리스도인 사이에 화평을 추구하는 일,

-덕을 세우는 일: 모든 은사 행위의 목표로서 교회의 유익과 단결과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책임이다. 그런데, 우리가 비본질적인 문제인 음식 문제로 인해 교회에 분쟁과 파괴가 야기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사업(교회 공동체)를 붕괴시키는 것이다. 에르곤!

 

14:20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물론, 만물이 다 깨끗하다(14:20)는 말씀처럼,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은 다 깨끗한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것들을 먹는 일로 인해 형제가 넘어진다면, 그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다.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14:20)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연약한 형제를 세우는 것이다. 그 세움을 위해선 자기 자유를 기꺼이 제한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바울은 뭐라고 결단하며 선포하고 있는가?

14: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평생 금욕주의자로 살아란 말이 아니다. 단지 먹고 마시는 것이 다른 형제를 넘어지게 하는 경우만 삼가면 된다는 것이다. 먹는다, 마시다(21절)의 시제는 행동의 계속이나 반복을 표현하는 현재가 아니라, 단순한 부정적 동작을 표현하는 부정과거aorist라는 사실을 주목하라.

 

  강한 자는 음식에 대한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14: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말은 자신의 개인적인 확신을 연약한 형제 앞에서 자랑하거나 강요해서는 아니 된다는 말씀이다. 자기 집에서는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먹을지라도 교회의 식사모임에서는 연약한 자를 고려해야 한다.

 

  바울의 복은 자신의 믿음과 양심에 따라 주어진다. 그 믿음이 거리낌없는 믿음이어야 하며 양심에 불편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아는 믿음이 진정으로 강한 믿음이다.

 

14: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결코 정죄함이 없는 자유이다. 더 이상 우리는 구약의, 율법의, 유대전통의 법에 노예가 될 필요가 없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의 법 아래에서 나보다 믿음이 약한 자들을 배려하는, 그리스도를 위한 자유의 백성이 된 것이다. 존 스토트는 자유를 ‘-하지 않는 자유’로 사람들은 많이 생각하는데, 진정한 자유는 ‘-를 위한 자유’라고 했다. 주를 위한, 하나님을 위한 여러분의 자유로 여러분의 시간과 물질과 재능과 은사와 능력을 활용하시길 바란다.

 

 


 

 나눔시트지-롬 14;13-23

 

1.나는 믿음이 강한 자인가? 어떤 면에서 믿음이 강한가? 한번 나눠보자. 또한 어떤 면에서 믿음이 약한 자인가? 한번 나눠보자. 이 부분을 전통VS보수, 관습적VS개혁적 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2.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자유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다. 당신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자유를 어떤 부분에서 맘껏 사용하길 원하는가? 죄짓는데 사용하지 말고,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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