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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로마서

로마서 강해㉘ 9장14-33절,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

by Message.K 2021.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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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도자기 기술은 한국을 따라오지 못한다!

  옛날 도자기 굽는 기술이 탁월했던 우리 나라 사람들이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 도공들을 포로로 잡아간 일본, 일본의 국보급 다기(찻그릇)도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서 빼앗아간 그릇들이었다고 한다. 일본은 절대 따라할 수 없는 다기기술! 그래서 일본 사람들에게 다기를 선물로 주면 그렇게 귀한 선물이라 생각해서 감사한다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아무리 그릇을 잘 만들려고 해도 임진왜란 때 그런 다기를 도저히 만들어 낼 수 없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예술적인 그런 탁월한 능력이 있는 듯!

 

 

  집에서 부인들이 사용하는 종류의 그릇 가운데는 여러 가지가 있다. 매일 식사 시간에 국그릇과 반찬그릇, 밥그릇으로 나오는 게 있는가 하면, 일 년에 특별한 손님만이 오시면 꺼내는 특별한 그릇이 있기 마련이다. 저희 부부가 받은 스타벅스 사기 머그컵(8천원짜리인가)을 저는 늘 쓰고 싶은데, 아내는 그걸 항상 찬장에 왜 보관해놓는지 모르겠다. 그 컵이 굉장히 묵직한 그립감과 함께 폼이 난다. 집에서 누가 봐줄 사람도 없긴 하지만. 그런 멋진 그릇을 꺼내서 사용해야 하는데 설거지하기가 아무래도 귀챦아서인지 잘 사용하지 않는 듯 싶다.

 

 

  사람도 아주 중요하고 요직의 사람을 VIP라고 하는데, 그 VIP는 보안요원이나 경찰을 붙여서 보호한다. 비행기도 일등석에 앉고 차도 방탄, 방수가 되는 차량으로 모신다. 예전에 캐네디 대통령이 차를 타고 행진을 할 때 얼마나 많은 차량과 오토바이, 경찰들이 호위했는지 모른다. 결국 오픈카를 타고 가는 바람에 저격의 대상이 되었지만 말이다. 영화 <파크랜드>를 보라!

 

 

 

  오늘 성경에도 보면 사람도 이런 차이가 있다고 한다. 즉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만드셔서 보배를 다루듯이 하시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천하게 만드셔서 함부로 막 사용하시다가 버리시는 경우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경우에 하나님은 왜 차별을 하시느냐?

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구원하고, 어떤 사람은 심판하느냐고 반론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회사생활이나 직장생활, 학교생활 가운데 차별대우를 받거나 모욕을 당하면 기분이 굉장히 나쁘다. 편애를 하거나, 차별대우,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되면, 과거의 개그콘서트의 ‘Let It Be’처럼 상사에 대한 욕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다소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구원의 문제에도 왜 하나님은 편애하시며, 왜 차별대우하시냐고 질문할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특별한 접근이 필요하다. 게중에는 소수가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선택도 자유롭게 못하냐고 반박한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의 방편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하나님의 공의(심판)의 도구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원의 도구로 사용되는,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도구로 사용되는 모세(15절)를 들 수 있다. 반대로 심판의 방편으로 17절의 바로를 들 수 있다. 출애굽 당시에 애굽땅에서 모세가 6번째 재앙을 내릴 때 모세를 통하여 바로에게 전달한 말씀이 바로 17절이다. 모세가 애굽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재앙은 총 몇 개였는가? 그 10개의 재앙중에서 이제 6번째 재앙이다. 앞으로 재앙이 4개나 더 남았다. 바로가 더 완악하게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능력의 보여주는 강도는 더 거세어지는 것이다. 바로는 자신의 고집과 완악함을 보여준 것이지만, 오히려 그 바로의 그런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더 크게 두드러지게 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왜 모세는 자비와 구원의 도구로, 왜 바로는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느냐고 불평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나이든 어르신들이 모이기만 하면, 술을 마시기만 하면, 하는 이야기가 정치이야기이다. 박근혜 대통령, 문재인대통령 등 정책과 정치에 대해서 입을 댄다. 그런데, 정치에 대해서 이렇게 왈가왈부할 수는 있다. 왜 대통령을 뽑은 것이 국민이기 때문이다. 나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세운 대통령도, 왕도, 황제도 아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다. 자존자, 지존자이시다. 그런 하나님의 정책과 정치와 kingship에 대해서 우리 인간이 무어라고 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인 관계로 하나님께 의견을 내거나 이의를 신청할 수 없는 것이다.

 

 

 장난감 공장에서 제조되는 장난감들이 제품으로 출시되면서, 나는 왜 카2로 제작되었느냐? 나는 왜 폴리로 제작되었느냐? 나는 왜 못생긴 라바로 제작되었느냐고 반문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공장주, 제조자 즉 조물주가 만든 그 제품인, 피조물이 그 조물주의 뜻에 대해서 왈가왈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이다.

 

 

 그이야기를 19-22절에 하고 있다. 20절에서는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도자기를 만든 토기장이가 자기 맘대로 질그릇을 만들 수도 있고, 놋그릇을 만들 수도 있고, 쇠그릇으로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친구는 장독대의 두껑으로 만들어지고, 어떤 친구는 스타벅스의 머그컵으로 만들어지고, 어떤 친구는 주전자로, 어떤 친구는 초밥그릇으로, 어떤 친구는 감자탕의 그릇으로 만들어진다. 그것은 토기장이의 소관이다.

 

 

 이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특별하게 적용될 필요가 있다.

때때로 우리가 가진 외모, 환경, 물질, 가정배경, 장애, 심리적인 모든 것들, 우리의 총체적인 모든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불평하고 원망할 때가 있다. 물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주어진 것도 있다.

 

또한 가장 큰 부분은 인간의 죄로 인해 주어진 것이다.

우리 가정의 불우하게 느껴지는 형편과 처지와 관계는 내가 원한 것이 아니지만, 그렇게 내게 왔다. 그것은 우리 부모, 선조들이 지은 죄의 DNA의 결과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교묘하게 인간의 이런 죄로 인한 결과들을 마아브링처럼 우리들에게 뒤섟여 놓은 것이다. 그러한 모든 상황 가운데 우리가 불평하고 원망하고 절망할 것이다. 하지만, 구원의 문제와는 달리 이런 부분들은 우리가 극복하고 회복하고 치유해야 할 대목이다. 이런 것들은 구원의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문제는 딴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반대로 심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소관이다. 우리가 개입할 문제, 사안이 아닌 것이다.

 

  왜 하나님은 에서를 버리시고, 야곱을 선택하셨는지? 왜 젊은 여종 하갈에서 낳은, 이스마엘 형을 놔두고, 나이 든 사라에게서 낳은 늦둥이 이삭을 고집하셨는지...그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의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모든 구원의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교리이다. 그것은 24-29절에서 성경의 예언을 성취한 것이라고 말한다.

 

 

 호세아(25-26절)와 이사야(27-28절)를 인용하면서 말씀한다.

 

호세아: 내가 내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사야: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서 ‘남은 자’는 이스라엘 중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일부를 이야기한다.

이 남은 자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 우리와 같은 그리스도인들도 포함되는 것이다. 만약 주님께서 그러한 남은 자를 통해 29절의 말씀처럼 씨를 남겨두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멸망당하고 남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질문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대다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문제에 대해 어떤 인간의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왜 언약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전적인 약속을 물려받지 못하고 심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가?

 

32절의 말씀이다.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3절에서도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고 했다.

 

 

  여기서 부딪칠 돌, 걸림돌과 거치는 돌은 반석되신 그리스도를 이야기한다.

  유대인들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 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보다는 자신들이 이제껏 철두철미하게 지켜온 율법적인 삶을 더 의지했던 것이다. 그것은 옛 언약이고, 이제 새롭게 업데이트된 새 언약이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그들은 아직도 옛날 것을 고수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절대 율법에 이를 수 없는데, 자기들은 그 율법에 이를 수 있다고 자부하면서 예수님을 거절하는 그들이 결국은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의지하고 있는 것은 없는가? 구원의 기초, 구원의 바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기를 바란다. 구원하심은 보좌에 앉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부터 연유되어지는 것이다.

   

 

이 선택에 관하여 3가지로 정리

1 하나님와 주권과 예정과 선택을 다룰 때, 성경에서는 항상 신자에게만 이런 개념들을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난날을 되돌아보면서, ‘그 때 내가 믿은 것 같았지만, 실은 주님께서 나를 부르셨구나!’라고 고백할 때 이 선택이란 말을 사용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이 경우에 한해서 ‘선택’이란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이런 예정 문제를 논쟁거리로 삼아서는 안 된다. 우리 편에서 선택이니 불선택이니 왈가왈부는 금물이다.

 

 

2 하나님의 의해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었다는 숙명론자가 되어서 적당히 살아서는 아니 된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으니 이제 모든 걱정은 끝이다고 하면서 막 살아도 되는 삶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운명론자, 숙명론자의 고백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고, 그렇게 된 나는 더욱 거룩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더욱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3 우리는 경건한 불가지론자가 되어야 한다.

내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성경이 틀린 것이 아니라,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이기에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겠다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살던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하는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이순신 장군, 유관순 누나의 구원문제, 강감찬, 을지문덕, 이 이, 세종대왕의 구원 문제는? 성경에서 이야기하지 않기에 어떻게 이야기할 수가 없다. 단지 죽은 다음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주님의 심판과 평가와 판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나를 지으신 이가).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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