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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사도행전

사도행전 14장1-7절, 복음에 대한 대조적인 반응

by Message.K 2021.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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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바나바가 오늘날 터키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인 코냐인,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증거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그 도시를 방문했을 때, 그 도시는 여전히 헬라 도시였으며,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성경은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에게 ‘사도’라는 직함을 쓰고 있습니다. 두 사도가 함께 회당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도’였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도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의 체험이 있어야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나바는?

  바나바가 이 집단에 속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바나바에게 사도란 칭호를 썼는가? 이것은 디도가 빌립보 교회의 사도(헬라어) 혹은 사자들(사신)이었다고 고후 8:23에 말합니다. 이 말은 교회 혹은 교회들에 의해 특별한 사명을 위해 보냄받은 ‘교회의 사도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바나바는 둘 다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 의해 보냄받은 그 교회의 사도들이었으며, 한편 바울만이 또한 그리스도의 사도였습니다.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반대하는 역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2절에 보면

 

‘그러나’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의 역사는 언제나 순종하는 무리가 있으면, 불순종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구원과 심판의 양 측면이 있는 것처럼, 천국과 지옥이 있는 것처럼, 반응 또한 양분되게 나타납니다.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과 바나바, 정말 하나님께 절실하게 헌신된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 했는데도, 그들이 전한 복음은 더 능력 있고, 3절에 보니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아마도 병도 치유되고, 귀신도 떠나가고, 문제들이 해결되고, 다양한 이적과 표적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의 역사는 언제나 양분됩니다. 4절을 보시면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들을 따르는 자도 있고-두 사도에 대해 중상모략하는 유대인들을 추종했단 말입니다-,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고 합니다.

 

  더 나아가서 5절에 보니,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다고 합니다. 이 두 선교사에 대한 계획된 폭력은 배후에 역사하는 복음의 방해하는 사탄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 때 순탄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양분된 반응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어떤 자리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든지 간에 이러한 양분된 반응, 순종과 불순종이 나타난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낙심하거나 위축되지 마시길 바랍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불순종하는 유대인 무리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고 악감을 품게 했습니다.

그런데 3절에 보십시오.

 

 

두 사도가 오래 있어...그들이 불순종하고 반대하고 거절하는 그 무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래 있었습니다. 여기서 더 주목할 것은 바로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반대가 있어도, 우리는 참고 인내하면서 오래 있을 때,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십자가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반대세력이 거세다고 할지라도 두 사도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고 ‘오래 있’자, ‘주를 힘입어 담대히’ 복음을 더 강력하게 증거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라고 했습니다(3절).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셨다! 벵겔이란 신학자는 ‘복음에 대한 고상한 정의’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증거 하는데 표적이 나타나고, 표적이 나타나니, 말씀의 능력이 더 확증되는 역사, ‘자기 은혜의 말씀’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두 사람의 복음전도와 사역가운데 ‘주님의 은혜의 말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가 말씀과 함께 임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은혜의 말씀이 증거 된다고 해도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에게 은혜의 말씀이 들려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말씀이 들려지는 것에 감사합시다.

 

 

  또한 우리가 바울의 전도여행을 주목하면서 다시한번 뼈저리게 느끼는 것은 복음을 반대하는 무리가 멀리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가장 하나님과 말씀과 가까이 있었던, 성전과 가까이 있었던 무리들, 바로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이 들려지지 않는 비극적인 처사에 대해 우리 또한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

 

는 말처럼,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성전과 예배와 교회와 직분과 섬김과 헌신과 전도와 선교와 같은, 모든 영적인 활동과 위치와 직분에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버려지고 심판당하는 불상사가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기억하고 경계하는 마음이 필요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 복음의 현장, 전도하는 현장 가운데에 주님께서 주시는‘자기 은혜의 말씀’의 역사가, 그분의 은혜와 사랑이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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