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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요나

요나서 4장강해, 요나의 탈진Jonah's complex

by Message.K 2021.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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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머리...Jonah's complex

  여러분은 콤플렉스가 있는가? 말 못할 상처, 결점, 아픔, 단점, 핸디캡...

말을 잘 못하는 내성적인 성격이 콤플렉스일 수 있다.

Jonah's complex를 살펴보자.

 

 

 

 

 

펼침...

 1장: 요나는 하나님의 소명으로부터 도피하였다.

 2장: 요나는 하나님께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였다.

 3장: 요나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자로 뜨겁게 사용되었다.

극적인 회개, 각성의 역사가 니느웨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욘 4장을 보라!

  엄청난 사역 이후에 요나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

 

4장의 Key Verse는 5절의 ‘앉되: 털썩 주저앉은’...온갖 콤플렉스와 혼란함으로 뒤뭉쳐진 요나. 그의 내적인 동기들이 통합되지 못했다. 사역에 대한 의도, 동기, 뜻들이 맞물리지 못했다. 요나의 콤플렉스 3가지~

 

 

 

그것은

첫째, 환경을 수용치 못했다(자기를 둘러싼 환경, 상황, 정황을 수용치 못했다).

 

요나는 자기에게 임한 하나님의 그 풍성한 은P를 다른 이에게는 적용치 못하고 있다.

 

자신의 불순종의 죄(작음) <----> 니느웨 성읍의 불신의 죄(큼)

 

  하나님, 그의 판단과 조치에 불만을 토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일종의 배신행위, 배신감.

 

“이방인에 대해 왜 그리 관대하냐?”

 

이것은 자신의 조상들의 정서를 반영한 ‘선민의식’이다.

 

(마 20:15)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작살나야만 했던 니느웨, 까부숴야만 했던 니느웨...그래야 속시원했던 요나였다. 마치 우리가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일본에 대한 우리의 감정과 비슷하다. 

 

그러나, 요나의 마비...paralysis. 요나의 탈진, 요나의 콤플렉스를 보라!

에이브라함 메슬로우...‘변화를 수용할 줄 알아야 성숙이 온다’

상황의 변화 이후, 그 다음 그 다음의 step의 인도를, 그 다음 발걸음을 인도받아야 한다.

  요셉을 보라!

  요셉의 상황, 삶은 점점 더 악화되어져가기만 했다. 모든 상황의 변화들이 그를 더 옥죄어왔다. 부모님들로부터 떨어지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형제들-배다른 형제들이었지만 그래도 형들이었다-로부터 죽임을 당할 뻔했다. 꿈 때문에, 자기가 가진 비전 때문에 그는 외면당하였다. 소위 ‘왕따’ 취급을 당하였다. 죽임의 덫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그는 애굽인의 노예로 팔리게 되었다. 이방인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가 겨우 팔자가 좀 나아질려고 할 때, 가정총무가 되었을 때 그는 가정총무직을 박탈당하게 된다. 이유는 단 하나 ‘부녀자희롱죄’였다. ‘간통혐의죄’였다.

  그것은 분명 오명이었다. 오해였다. 그러나 상황이 그렇게 악하게 돌변해가고 있었다. 속된 말로 ‘골 때리는 상황’이었다. 그 때 요셉이 한 말은 가관이었다.

 

무엇이었나?

“주께서 나를 여기에 보내셨다”

“주께서 모든 상황 가운데로 날 보내셨다는 것이다.”

 

물이 없는 웅덩이(죽음의 웅덩이) ->애굽의 노예신세-> 가정총무의 나은 자리-> 비굴한 죄목, 부끄러운 죄목인 아녀자희롱죄의 오명의 자리-> 그로 인한 감옥의 어두운 구석.

 

"주께서 나를 여기에 보내셨다.“

그의 어떤 신앙적 결단, 도덕적 결단, 꿈에 대한 확신은 그의 삶의 위치를

 

가정총....................>감옥 총무......................>나라총무

          (애굽Egypt->당대 가장 위대한, 번성한, 잘 나가는 제국같은 나라였다)

 

그는 변화를 운명적, 숙명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그는 변화를 비극적, 비관적, 비판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둘째는, 갈등의 대상을 수용치 못했다는 것이다(2절).

 

(2)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좋은 뜻으로 칭찬한 것이 아니라 굉장히 시니컬하게 냉소적인 어투, 분위기로 이야기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신학적으로, 이론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고백에 대한 마음과 가슴이 따라와주지 아니했다.

● 안다->Know 는 것은 히브리어의 개념에서 단순히 안다가 아니라 '경험하다Experience'라는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야다'란 동사의 의미이다. 다윗------>솔로몬에게 했던 말 ‘네 아비를 알라’...그 알라는 Experience의 의미이다. 

 

미성숙한 요나의 콤플렉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방해가 되었다.

그 콤플렉스, 악감정이 니느웨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하나님 알기를 멈춰버렸다.

요나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계속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호세아의 그 위대한 엄청난 구호, 모토...“힘써 여호와를 알자”

딸이름...긍휼히 여기지 아니함....>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을 생각했다.

2절은 하나님에 대한 요나의 평가이다.

인애로우시기 때문에 자기가 그 큰 물고기의 이빨에 갈기갈기 찢겨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단지 삼킴을 당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동일하게 니느웨인들의 신앙적인 회생의 풍경을 보면서 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요나의 ‘이기심’이다.

요나를 잡고 있었던 것은 ‘요나의 지엽한 이기심’이었다.

이런 요나의 이기심은 한국인들에게 비슷하게 나타난다.

지구촌을 위해 기도치 않는다. 단지 셀프Self만을 위해, 자신만을 위해 기도한다. 내 잘되라고 빌면 비는 대로 된다. 이단 남녀 혼합교-‘5시간 기도’....우리 집 잘되라고 기도한다(기복신앙의 해로움의 한 단면). 죽도록 기도해도 ‘나 자신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한국교인들이라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기도를 안 하는게 아니다. 기도를 너무 많이 하는데, 방향이 빗나갔다고 볼 수 있다. 자기 자신과 자기 자녀와 자기 교회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 축복을  위한 기도, 기복신앙이 우리 나라의 교회를 좀 먹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는 기도의 방향이 달라져야 한다. 나만의 니느웨를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요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은, 니느웨를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보지 못하고 아직도 심판의 대상으로-그들은 전심으로 회개했지만-보는 것은 ‘요나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또 하나

요나를 붙잡고 있었던 것은 ‘영적 교만’이었다.

 

  선지자 요나, 내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면 그들, 니느웨인들은 나보다 더하면 더했을텐데 왜 하나님은 그냥 용서해주느냐? ....> 요나의 항변의 줄거리였다.

  영적 교만은 “내가 하나님의 모습을 두고 내가 그 자리에 정직하게 서지 않고 다른 이와 비교하여 내가 뭔가 잡을만한, 더 나은 것들이 많다, 있다”는 것이다.

2절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의 발언이다.

나는 애시당초 저사람들 보다, 니느웨사람들 보다 낫다, DNA구조 자체가 낫다...이러한 도덕적인 우월감, 교만이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며 큰 은혜를 받기에 감당치 못할 하나님의 사랑, 은혜를 절감시키는, 삭감시키는 현상이다. 이것이 위기이다. 이것이 요나의 위기이다. 이것이 요나서를, 요나를 “참 큰 일을 하고도 참 작은 선지자로 남게 만든 위험스런 생각, 사상이었다”.

  요나서를 읽고 난 후 독자들의 뒷맛이 씁쓸한 것은 이것 때문이었다.

  은혜에 감격해서 일, 사역을 시작하였다면 우리들은 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 착각한다. 그리하여 3절에 요나는 무어라고 말하는가?

 

(3)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요나의 3번째 콤플렉스는 무엇인가?....자신을 수용치 못했다, 3절.

 

자기 생각대로 되어지지 아니함에서 왔다.

좀전에는 요나에게 영적교만과 이기심이 있었다고 했다. 거기다가 탈진한 요나는 ‘병적인 열등의식’이 있었다. 보통 3사람 중에 한 사람은 ‘병적인’ 열등의식이 있다고들 한다. 상대와 비교하여 의식하는 비교의식, 우월의식, 열등의식이 그것이다.

요나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니느웨인들의 받은 은혜보다 작은가?

요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하여 선하신 하나님을 수용치 못한 나머지 자신을 수용치 못하고 있다. 그래서 ‘죽고 싶다’, ‘차라리 죽고 싶다’라는 말을 하나님께 아주 버릇없는 아이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여러분, 정말 요나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니느웨 성읍이 받은 은혜보다 작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마치 ‘도토리키재기’와 같다. 요나가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니느웨’와 ‘자신’을 비교, 상대하여 은혜의 크기를 따지는 쫀쫀한 병적인 비교의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선 다양한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 사람들에 다라 각각 다양한 은사와 은혜를 베푸신다는 ‘창조의식’을 생각해야 했다.

 

 하나님께선 내게 주시는 ‘독특함’이 있다는 것을 요나는 자각해야 했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기억 못한다더니 요나가 불순종하여 물고기 뱃속에서 사경을 헤매던 시절을 기억치 못하고 있다. 요나의 욕심, 욕심이 없어야 할 영적이고도 거룩한 신앙의 자리에서 요나의 욕심을 내고 있다.

그의 욕심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하나님의 은혜를!

그의 이기심에 자취를 감춘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그의 병적인 비교의식에 온데간데 없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앙!

 

 

그에게 필요한 것은 욕심이나 이기심이나 비교의식이 아니었다.

영적 우월감이나 열등감이 아니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창조의식이었다.

그 옛날 신앙의 선배 요셉을 기억해야 했다.

 

“주께서 나를 여기에 보내셨다,

주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셨다,

주께서 니느웨를 고치셨다,

주께서 니느웨(이방민족)를 변화시키셨다!”

 

이러한 <창조의식> 말이다.

  요나의 이러한 모습은 옛날 불의 선지자 ‘엘리야’에게도 나타난다.

 

왕상 19:13을 보면

(13)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여러분도 알다싶이 엘리야는 하나님이 말씀하실 이 때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갈구하고 있을 때였다. 스스로 광야로 들어갔다고 성경기자는 말한다, 4절. 그러면서 그는 스스로 죽기를 구하였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왜 이런 시덥쟎은 말이 ‘불의 선지자’에게 나온단 말인가?

  완전히 다 죽어가는 소릴 내면서, 영적 침체의 늪에서 허우적대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때의 상황은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 850명과 850:1로 신과 신의 전쟁이 있은 후였다.

  그렇다면 엘리야가 영적 전쟁에 ‘뼈도 못 추스릴 정도’로 패배해서 이렇게 죽는 소릴 내는가?

엘리야가 850명의 바알 선지자들에게 ‘죽도록 맞고, 속되게 돼지도록 맞고 얻어터져서 이렇게 신음같은 소릴 내고 있는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결코 지지 않았다.

그는 그의 간절한 기도와 불타는 신앙으로 신들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물로 축축히 젖은 제단 위에 번제물이 하늘에서 내려 온 ‘하나님의 불’로 인해 다 타버렸다. 성경은 ‘여호와의 불’이라고 명한다.

 

(왕상 18:38)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그의 기도를 들어보자(36-37)

[왕상 18:36-왕상 18:37]

(36)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❶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❷내가 주의 종이 됨과 ❸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37)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❹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❺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 엄청난 불과 같은 기도에 하나님은 불로, 여호와의 불로 응답하셨다. 그리고서 하나님을 대적한 850명의 바알선지자들을 백성들로 하여금 다 잡아 죽이게 하셨다. 그리고 ‘사람의 손만한,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을 보고서 ‘큰 비’를 내리게 기도했고 그 기도 또한 응답되었다.

 

  그런 그가 19장에 보면 한 사악한 여자, 이세벨의 한 마디에 흔들려 불안해하고 있다.

“내가 엘리야 너를 내일 이맘때에 죽이겠다.”

  그 아녀자의 한 마디에 불의 선지자, 엘리야는 흔들리는 상한 갈대가 되어 버렸다.

  그 이세벨의 감정적인 노함에 이 위엄있고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는 ‘꺼져가는 호롱불’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엘리야에게도 요나와 비슷한 징후와 증상을 살펴볼 수 있다.

엘리야에게도 요나의 콤플렉스가 나타난다.

 

(왕상 19:10)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14)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바알에게 절하지 아니한 신앙의 순수, 절개를 지킨 인간은 ‘자기 뿐’이라고 하는 영적 교만이 영적 침체와 더불어 찾아왔다.

  구약 성경은 엘리야의 이 고백을 2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난 신앙의 절개를 지켰다. 오직 나 홀로, 나 혼자만이!!!’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엘리야의 교만에 대한 18절에서 ‘7000명’의 믿음의 절개를 지킨 동역자들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엘리야의 영적 교만은 하나님의 이런 대답을 통해 까부셔진다.

-변화된 환경을 수용치 못하는 엘리야.

-갈등의 대상을 수용치 못하는 엘리야.

-자신을 수용치 못하는 엘리야.

 

이것이 엘리야의 콤플렉스였다.

 

  우린 요나의 콤플렉스와 엘리야의 콤플렉스를 말씀을 통해 살펴보았다.

위대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그들에게도 이렇게 ‘지엽적인 콤플렉스’가 있었다. 엄청난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받았던 그들에게도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단점, 핸디캡’이 있었다.

 

 

 

 

 

마무리...

  21세기를 살아가는 여러분들에게도 이러한 구석이 있을 것이다.

 

 

 ❶여러분에게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거세고 고통스런 환경이 있는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하면서도 어떻게 내게 이러한 상황이 있을 수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는가?

  요나가 그랬고 엘리야가 그랬다. 그 변화되는 상황을 수용하라! 받아들이라!

‘주님이 그 상황속으로 여러분을 보내셨다. 주님이 그 변화의 현장으로 보내셨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이 그 상황과 현장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❷여러분이 받아들일 수 없는 갈등의 대상을 포용하라!

  그 대상이 부모님일 수도 있다. 자식, 친구, 직장상사, 동료, 아내, 남편, 교회, 성도, 사람, 심지어 하나님일 수도 있다.

 프란시스 A. 쉐퍼...‘인간은 타락한 놀라운 피조물이다’

정말 참기 힘든, 견디기 어려운 그 사람, 그 사람...

 

“그 사람만 좀 없었으면 내 인생이 얼마나 편할까? 그 사람만 좀 없었다면 내 교회, 가정, 직장, 학교, 대인관계가 얼마나 편할까?”

  여러분이 지독히도 싫어하고 미워하기에 용납하기 힘든 그 사람도 하나님께서 지으셨다는 것을 기억하라! ‘저 인간도 하나님이 지으셨다’, ‘저 인간도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하셨다’, ‘저 인간도 주님이 사랑하셨다’.

그 사람, 저 인간, 저 인간내기도 주님의 포용과 용납의 십자가의 자리에 참여할 수 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기억하라!

 

  

❸인생이 여러분 자신을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자신을 포기치 말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있는 모습 그대로 포용하라! 수용하라!

여러분에게 콤플렉스가 있는가? 단점, 결점, 흠, 모난 부분, 용납키 힘든 죄악, 열등감, 우월감...

콤플렉스가 있는가? 죽기를 갈구할 만큼의 죄, 상처, 아픔, 고난...있는가?

받아들이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라!’

 

‘흔들리는 상한 갈대와 같은,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자신을 받아들이라!’

그럴 때에 거기에 주님의 십자가가 여러분을 치유하실 것이다.

그럴 때에 거이게 그리스도의 보혈이 여러분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그럴 때에 거기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러분을 자유케할 것이다.

 

 

[롬 8:1-롬 8:2]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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