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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요나

요나서 3장 강해, 요나의 사역

by Message.K 2021.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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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머리....

생각을 바꾸면...

  어느 회사 신입사원 채용 면접에서 면접관이 이런 질문을 했다.

 

“당신이 폭풍우가 거칠게 몰아치는 어두운 한밤 중에 차를 몰고 가다 버스정류장을 지나가게 되었다. 버스정류장에는 세 사람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곧 죽을 것처럼 보이는 할머니,

언젠가 당신의 생명을 구해 준 오랜 친구,

항상 꿈꾸어온 완벽한 미모의 여성.

 

당신은 한 사람만 차에 태울 수 있다.

누구를 태워주겠는가?”

 

 

  중병이 든 할머니를 태워줌으로써 할머니의 생명을 약간 더 연장시켜줄 수 있다. 아니면 생명을 구해주었던 옛 친구를 태움으로써 그에게 보답을 하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또 꿈에 그리던 미모의 여인을 태울 수도 있다. 생각해 보라!

 

  200명의 응시자 가운데 유일하게 합격한 사람의 정답은 바로 이것이었다.

 

“자동차의 키를 친구에게 주어 할머니를 병원으로 모시고 가게 부탁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자리에 남아 꿈에도 그리던 여인과 함께 언제 올지 모를 버스를 기다리겠습니다.”

 

  사람과 동물의 차이는 생각이다. 제비집은 100년 전이나 1,000년 전이나 항상 변함없이 똑같다. 21세기가 되었가도 까치집이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지진 않는다. 개미들이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시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다르지 않은가?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다. 변화의 능력은 무엇이겠는가? 생각하는 힘이다.

 

 

생각은 현실적인 힘을 갖고 있으며,

지옥을 천국으로,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 수 있다-존 밀턴(John Milton)

 

 

미국 프로 야구 최고의 홈런 왕이었던 행크 아론-배리 본즈(40)가 지금 추세로 간다면 아마도 행크 아론의 기록과 베이브 루스의 홈런 최다기록을 깰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금 733개의 홈런을 쳤다. 이제 타이기록 2개 남았다. 배리 본즈(40·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도전은 이제 시작이다. -은 자신이 제일 존경하는 영웅으로 서슴지 않고 재키 로빈슨을 꼽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모든 흑인 선수들에게 영원히 꺼지지 않는 횃불을 넘겨주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야구나 다른 프로 스포츠계에서 인종 차별의 벽이 무너지는데 몇 년이 더 걸렸을지 모른다. 내가 최고의 홈런기록을 세우게 된 것도 바로 그의 거룩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흑인들의 긍지를 위한 어떤 사명감을 위해서 뛰었던 것이다."

 

미국의 프로 운동 선수들 중에는 많은 흑인 선수들이있다. 프로 농구 선수의 80%, 미식 축구 선수의 70%, 프로 야구 선수의17%가 흑인들이다. 그러나 50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 프로 운동 선수 중에 흑인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두꺼운 인종 차별의 벽이 무너지게 된 데는 한 사람의 거룩한 희생과 꺼질 줄 모르는 조용한 용기가 있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재키 로빈슨(Jackie Robinson)'이다.

 

 

1947년, 브루클린 다저스의 책임자였던 브랜치 리키(Branch Rickey)는 자신이 눈여겨본 탁월한 재능의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에게 거룩한 실험(noble experiment)을 제안했다. 그것은 프로 야구계에서 인종 차별의 벽을 깨는 것이었다. 로빈슨은 성깔도 있고 힘도 센 사람이었다. 군대에 있을 때, 버스 뒷칸에 앉으라는 것을 거부하다가 영창에 간 일도 있었다. 그런 그를 앉혀 놓고 리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The Life of Christ)란 책을 읽어 주며(로빈슨은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다)이렇게 다짐시켰다.

 

"이제 자네가 그라운드로 나가면 군중이 매 게임마다 갖은 욕설과 야유를 퍼부을 것이고, 물건들을 집어던질지도 모르며, 증오에 찬 고함과 눈길을 던질지도 모르네. 그러나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네는 절대 감정적인 보복적 반응을 해서는 안 된다네. 알겠나? 자네는 자네 자신을 위해 야구를 하는 게 아니라, 차별받는 흑인들 전체의 명예를 걸고 뛰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게."

 

 젊은 혈기의 로빈슨은 기도하면서 이 도전에 응했다. 그리고 그는 평생 이 약속을 지켰다.

 

 

  운명의 날, 1947년 4월 15일부터 그는 브루클린 다저스의 1루수로 뛰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일은 쉽지 않았다. 로빈슨은 팬들로부터 수없이 많은 욕설과 야유와 죽이겠다는 협박이 담긴 편지들을 받았고, 심지어는 몇몇 동료들조차도 그를 곱지 않은 눈길로 흘겨 보았다. 그가 에러라도 한 번 범하면 군중들은 당장 죽일 듯이 야유를 보냈다. 어떤 사람은 후에 기록하기를

 

"로빈슨은 구장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런 모욕과 고통과 따돌림을 당하고도 저렇게 의연히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로빈슨 밖에 없을 것"

 

이라고 했다.

  

자기에게 모욕적인 편지를 보낸 팬에게 보낸 답장에서 로빈슨은 한 번은 이렇게 썼다.

 

"당신이 나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나를 같은 인간으로 대해 줄 순 없습니까?"

 

그러나 로빈슨은 약속대로 한 번도 감정을 드러내며 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처지에 있으면서도 다른 선수들을 격려하고 칭찬하기까지 했다.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인 강타자인 미키 맨틀이 아직 신인이었을 때, 로빈슨은 그를 직접 찾아가 악수를 청하며

"너는 정말 대단한 선수다. 반드시 대성할 것"

 

이라고 훗날 미키 맨틀은 그날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때 정신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그토록 심한 모욕과 야유와 욕설과 따돌림을 당한 사람이, 오클라호마에서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시골 풋내기 백인 선수에게 그런 따뜻한 격려를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로빈슨은 10년 동안 다저스 팀에서 뛰었는데, 그가 뛰는 10년 동안 다저스 팀은 6번이나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1947년에 그는 내셔널리그 최고 신인상을 받았고, 1949년도에는 MVP로 선정되었다. 생애 통산 타율 0.311, 도루 197개, 6번의 월드 시리즈와 6번의 올스타 게임을 뛰는 찬란한 기록을 남겼던 그는, 1962년에는 야구 명예의 전당에 기록되었고, 1972년 53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숨졌다.

 

 

 그의 거룩한 희생으로 인해 수백, 수천의 흑인 선수들이 미국 프로 스포츠계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이 놓이게 되었다. 행크 아론도, 배리 본즈도 수많은 흑인선수들이 프로스포츠 무대에서 활보할 수 있는 것도 다 재키 로빈슨의 덕택이다.

 

 재키 로빈슨이 보여 준 용기는 헐리우드의 액션 영화에서 나오는 것 같은 일시적이고 시각적인 화끈한 것은 아니었다. 매 순간, 그 모욕과 질시의 그라운드로 뛰어 나가 게임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 있어선 워털루요 칸나베 대전과 같은 싸움이었다. 그도 사람인 이상 얼마나 두렵고 떨리고 힘들었겠는가? 비전을 가진 사람은 매순간 죽음과 같은 고통을 이겨내는 용기와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우린 다 겁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5분을 더 참으면 그것이 바로 용기이다. 이러한 재키 로빈슨의 도전 정신!!!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위기와 위험과 문제와 딜레마-진퇴양난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한 어려움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스스로 ‘나같이 못난 놈이 무슨 하나님의 일을 하며,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라, 딸이라 칭함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좌초하게 되고 좌절하게 되어 결국 우리의 삶과 사역을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마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말이다. 때로는 그러한 문제를 발발하는 것이 도덕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정서적인, 정신적인, 영적인, 가정적인, 인간 관계적인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가슴을 멍들게 하고 하나님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고서 어떻게 다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그 사랑을 져버리고 불순종의 삶을 살다가 어떻게 다시 그 분 앞에 서서 사역을 하고 삶을 영위한단 말인가? 너무 뻔뻔스러운 작태가 아닌가?

 

 우리는 요나의 모습을 보면서 그 해답을 구하고자 한다. 이 불순종의 선지자가 다시 회복될 수 있는가? 이 능지처참에 처해져야 할 이 사람, 이 선지자! 선지자라는 그 호칭이 부끄러울 정도의 이 인간에게 과연 하나님은 어떻게 판단을 내리시는지 주목해보자.

 

 성경의 대답을 미리 말하자면 ‘회복될 수 있다’이다. ‘그 분의 은혜로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3장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 달려가는 요나’를 통해 도전의 화살을 쏘기를 원한다.

 

 

 

펼침... 

 

하나님과 함께 달려가는 하나님의 주자, 요나를 보라...

요나가 다시 한 번 1절의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까지는, 다시금 회복되기까지는 험난한 과정이 있었다. 1장과 2장을 통해서 살펴보면 알겠지만

 

ㄱ.불순종의 반역

ㄴ.영적인 깊은 잠

ㄷ.재앙의 도래

ㄹ.무리의 간구

ㅁ.요나의 던져짐

ㅂ.큰 물고기에 삼킴

ㅅ.회개의 부르짖음과 각성

ㅇ. 물고기로부터 구원에 이르기까지 긴 과정이 있었다.

 

이처럼 끊어진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이 새롭게 이어지는 일은 쉽지 않음을 성경은 말해준다.

요나가 다시금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만 했다.

 

 

 V.1...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한 번 불순종했던 요나에게도 하나님은 두 번째 기회를 주시고 계신다. 사람들은 그러한 요나를 보고서 ‘상처는 남을지 모르나 그가 아름답게 다시 재개했구나!’라고 환호했을지 모르겠다. 4장의 이야기를 빼놓고서 본다면 요나는 분명히 재개했고 회복했다. (여러분이 4장을 읽어보시면 다 알 수 있을 것이니 굳이 4장에 대해선 말하지 않겠다.) 재개한 그의 소명의 내용은 2절이다. 그의 사역지는 ‘니느웨’라는 아주 큰 성읍이고 그가 전해야 할 메시지의 내용은 ‘4절에 나오는 사십 일이 지나면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것이었다. 요나는 단지 선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귀에 불어넣어주신, 그의 가슴에 던져주신 말씀을 선포하기만 하면, 외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성경학자들은 요나가 어디서 말씀을 들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1)고향으로 갔을 것이다 2)성전으로 갔을 것이다(2:4)라고 답하고 있다.

 

 지지리도 말을 안 듣던 요나가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V.3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요나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이제라도...이제라도 그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순순히 알아서 순종하느냐?

  아니면

  실패를 통해서 순종하느냐?

 

 

 요나는 두 번째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패는 요나에게 있어 이젠 더 이상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다. 값진 교훈과 체험을 얻었다면 이젠 하나님께서 그에게 더 큰 소명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Bill Gates는 그의 저서‘ 미래로 가는 길’에서 ‘한 번 실패한 경험이 있는 자를 사용하겠다’라고 그의 경영론을 펼치고 있다.

 

 

그래도 한다. 또 실패한다. 상관없이 또 한다. 다시 실패한다. 좀 더 나은 실패를 한다.

-사무엘 베케트

 

 

  미국의 39대 대통령 제임스 얼 카터만큼 인생 전체가 놀라운 역전극인 사람도 드물 것이다. 1924년 독실한 침례교 집안에서 태어난 지미 카터는 1946년 미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령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리고 군복무를 마치고 조지아 주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 집안의 땅콩 농장 사업을 물려받았다.

 

  그는 1917년에 주지사로 선출되었고 1976년에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제럴드 포드와의 선거전에서 근소한 차이로 승리를 거두어 세계 역사의 무대에 극적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거기서부터 내리막길이었다. 백악관의 주인이 된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무능력하고 인기 없는 대통령으로 비난받았다. 결국 그는 1980년 대통령 선거전에서 미 역사상 가장 큰 득표차로 재선에 참패했다. 더군다나 선거 빚을 갚기 위해 물려받은 농장마저 팔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좌절을 딛고 인생 2막을 열었다.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훌훌 떨쳐내었다. 그는 세계 65개국 이상의 나라에서 분쟁을 조정하여 지구촌에 평화와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는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여느 전직 대통령들처럼 골프장이나 고액 강연 여행 대신 분쟁 현장을 찾아다니며 평화를 중재하고 빈곤과 질병 퇴치에 앞장섰다. 그는 지금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집을 지어주기 위한 망치와 성경이 들어 있는 여행 가방을 들고 세계의 그늘진 곳을 소리 없이 누비고 있다.

 

중요한 것은 쓰러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이다.

-빈스 롬바다Vince Lombadi

 

이전의 드라마 ‘에어시티’에서 최지우가 이정재에게 이러한 말을 했다.

 

“넘어진 사람이 제일 쉽게, 빠르게 일어설 수 있는 방법은 자기가 넘어진 바로 그 자리를 짚고 일어서는 것이다.”

 

 

이제라도 그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섰다면 과거는 묻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난 달의 부흥강사님의 말씀처럼 ‘기독교는 과거를 묻지 않기 때문이다’...우리에게도 요나와 같은 어려움과 뼈저린 불순종의 기억과 체험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실수나 오점을 남길 만한 죄악들, 사람들 앞에서 내놓기엔 너무나 부끄러운 죄악과 과오가 우리 맘을 그늘지게 만들고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데 방해거리로 그것들이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상처는 비록 남을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면, 용납하셨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아름답게 재개했다. 아름답게 다시 일어섰다’라고 말이다.

 

 

여러분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서도 그러한 경험은 없는가? 주님이 용서하셨다면, 그 용서하심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이제라도...이제라도....이제라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길 바란다.

 

요나는 3절에서 변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1:3과는 대조적이다.(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그의 주신 소명에 대해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이 비친다. 이렇게 변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실패에 있다. 그것은 요나의 체험적인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지역신, 지방신(Local god)으로 생각했던 신(神)개념이 더 커진 것이다. 다시스로 가면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겠다 라고 생각했던 그의 좁은 신개념이 이젠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이라는 거대한 신개념으로 확장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은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신이신 것을 몸소 깊숙이 느꼈던 것이다. 그는 1장과 2절을 통해서 더 넓고, 더 높고, 더 깊고, 더 긴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였던 것이다.

 

 요나는 이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고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직면하고 있다. 회복의 은총에 사로잡힌 요나이다.

 

 

여러분, 상상해 보라.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갇힌 그 3일이라는 시간동안 느낀 뼈저린 체험, 하나님에 대한 생각, 그 모든 것들을 상기시켜주는 것처럼 니느웨를 걸어서 도는데 걸리는 시간이 3일이었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요나의 그 우렁찬 목소리를 상상해 보면 좋을 것이다. 그가 하룻길을 행하며 외친 말씀은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는 것이었다.(히브리 원문으로는 “아직 40일이 남아 있다. 그리고 멸망된 니느웨)요나가 두 번째 소명때 그가 바라본 것은 예전의 편견과 선입견의 나라, 니느웨라는 이방민족이 아니라 자신을 깊은 수렁에서 건져내셔서 만나주신 하나님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 그대로 토해냈다. 그 메시지는 격려나 위로나 사랑의 메시지가 아니라 ‘심판의 메시지’였다. 요나가 어떤 톤으로 메시지를 외쳤는지 상상해보면 그것도 좋을 것이다. 그의 삶 속에서 깊이 우러나오는 체험의 윤기가 그의 메시지, 그의 설교, 그의 말의 구석구석에 배여 있을 것이다. 어느 누구가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간 있다가 다시 살아난 경험이 있겠는가? 자신의 잘못으로 그는 소명을 거부하고 도피하려 했지만 하나님께서 도피하는 그에게 독특하고 독특한 희귀한 체험을 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는 다시 소명자로 서있는 것이다. 한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였을 때 당하는 심판의 무게는 장난이 아니라고 요나는 불을 토해 냈을 것이다.

 

 

  다른 선지자들과는 영적 수준에 있어서 미달이고 수준 이하인 자신의 모습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는 첫 번째 소명을 거부한 것은 그 메시지를 전파해야할 대상이 자신에게 버거웠을 뿐만 아니라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그 이유는 실제로 큰 성읍이었지만 그것보다는 요나는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자신의 능력을 헤어보고 니느웨를 쳐다보니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2번째 소명에는 달랐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등에 업고 불을 토해내는 설교자가 되었다. 상황(Context)의 특수성과 장엄성에 기대기보다는 하나님의 능력의 보편성에 기대었던 요나였다. 아무리 상황이 열악하고 험하더라도 하나님의 능력은 그 모든 것들을 초월한다는 것을 믿었던 요나였다.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잠수하고 있다가 튀어나왔는데 그가 아주 세심하고 소심한 목소리로 니느웨에 복음을 속삭였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정말 자신의 삶을 뚫고 나온 체험이 바탕이 되어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쳤던 것이다. 자신의 삶에 하나님의 온기가 흘러 넘쳣기 때문에 그는 과감하게 말씀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열정도 없던 선교사, 열망도 없는 선교사인 요나가 이제는 불의 사신이 되어, 거룩한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어 외치고 있다. 얼마나 드라마틱한 하나님의 이야기인가? 하나님께 붙들린 자는 누구나 다 이렇게 삶과 사역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요나를 통해, 요나 선지자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그의 메시지는 마치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고하는 계기가 되었던 히로시마와 나카사끼에 떨어진 원자폭탄 소식과도 같은 것이었다!!!(호외의 전단지)

-믿느냐 마느냐 그것은 당신의 선택!!!

 

 

히로시마 

1945년 8월 6일 8시 15분

Little Boy 3.6t

사망 78000명

실종 10000명

부상 37000명

 

나가사키 평화공원

평화 기념상 - 키타무라 세이보 作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Fat Man 4.5t

사망 73884명

부상 74909명

 

목이 말라서 참을 수 없었습니다

물에는 기름 같은것이 떠 있었습니다

너무너무 물이 마시고 싶어서

그냥 기름이 뜬 채로 마셨습니다

 

- 그날 어느 소녀의 수기에서

 

 

요나의 외침이 니느웨 백성들에게 울릴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V.5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요나가 예상했던 반응과는 달랐다. 딴판이었다.

 

‘니느웨’를 바라보는 것 보다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먼저 했어야 할 일이었다.

 

오늘날도 많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 가져야할 자세이기도 하다.

 

 

문제의 근본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주목하는 일이다. 요나가 상황과 환경에 치중치 않고 자신의 실존적인 상황-생명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에서 구해내신 하나님께 철두철미하게 헌신을 했을 때 그의 말과 언어와 설교가 무미건조하고 메말랐겠는가? 공허한 지꺼림에 불과했겠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감격적인 체험을 가졌던 하나님의 사람이 외쳤던 말씀이 니느웨 백성의 강팍한 마음을 말씀의 비수로 찌를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환상적인 이중주가 아닐 수 없다.

 

 

 회개한 요나를 통해 니느웨인들을 회개케 하시는 하나님을 보라.

회개의 역사. 회개의 대파노라마가 여기에 펼쳐지고 있다. 요나의 회개, 요나의 전인격적인 회개는 곧 의지적인 결단-정적이고도 지적인 참회를 불러온 후의-후 온전한 회개를 불러일으켰다. 40일이라는 유예기간은 심판을 목적으로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그 40일이라는 기간을 놔두심으로써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회개의 은총을 부으시는 하나님을 보라.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96km나 되는 이방 나라, 니느웨1)에 살고 있던 백성들이 요나 한 사람의 하루 동안의 설교로 거국적인 회개를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얼핏 보아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의 앗수르의 역사에 관련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앗수르는 국방의 새로운 세력 우라랏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다메섹에서 철수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왕들의 세력도 예전에 비해서 약하여진 상황이었다. 더 나아가서 앗수르에는 당시 무서운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주전 765-759년). 또 일식 때문에 하늘과 땅이 온통 깜깜해진 때가 있었다고 한다(주전 763년 6월 15일).

 

 

  당시의 형편으로 보아서 이러한 재난과 자연현상은 앗수르 왕과 그 백성들을 큰 공포 속에 몰아넣을 수 있었으리라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특별히 천체를 숭배하는 그들에게 낮에 해가 없어지는 완전한 일식은 그들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공포에 질리게 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선지자가 니느웨의 멸망을 외쳤을 때 자신들이 경험했고 또 경험하고 있는 그 모든 자연 현상과 재앙을 연결하여 그 메시지를 받아들임으로 큰 어려움 없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 앞에서 회개하는 역사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망하리라(4절)”

 

하는 단순하고 직설적인 이 짧은 메시지의 선포는 선지자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말의 지혜로움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선포를 사용하시는 하나님 자신에게 달려있음을 발견케 된다.

 

 

 니느웨의 회개운동은 국부적인 현상이 아니라 거국적인 회개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회개는 자발적으로 시작되었으며 백성들뿐만 아니라 짐승까지도 여기에 참여시켰다(8절). 더욱이 니느웨에서의 회개는 단순했다. 신속했다. 참된 회개의 소문이 회개를 불러일으켰다. 이처럼 참된 회개는 마치 초원에 이는 불길과 같아서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기울어진 사람들의 가슴에 회개의 불을 지피고 각성의 횃불을 밝히게 하는 것이다. 니느웨에서의 회개는 지도자로부터 백성에게로 이르는 하향식 회개가 아니라 백성들이 깊이 회개하고 금식하며 뉘우치는 참된 회개가 니느웨 왕으로 하여금 선지자의 메시지를 믿게 한 회개였다.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내려와 본 일이 없는 보좌를 니느웨 왕은 박차고 일어났으며, 왕의 권위의 상징인 조복을 벗고 회개를 상징하는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았던 것이다. 그 당시의 왕은 ‘신의 화신’이라는 의미가 있었다. 왕이 이렇게 본을 보이자, 신의 화신이 이렇게 본을 보이면서 대신들에게 명령했다. 조서를 내려 전국적인 금식을 명했던 것이다.-그 금식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구절

 

7절...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금식은 자신들이 이제껏 살아온 삶으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일용할 양식’조차 받을만한 가치가 없다는 자신의 모습을 솔직히 고백하는 것이다. 참회하는 것이다. 니느웨 왕의 회개는, 금식은 단순히 재앙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왕은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기에 그를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할 필요를 명백히 하였다. 이전의 악한 길과 강포에서 떠나도록 촉구하였다. 더 나아가서 왕은 진노의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이 그 뜻을 돌이키시사 진노를 그치는 것이었다. 이방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선지자의 선포로 말미암아 영적인 지도자로 변모하였던 것이다. 보라!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메시지가 얼마나 위대한 힘이 있는지를....

 

 

역사가 토인비는

 

‘아무리 위대한 물질문명도 그것을 떠받쳐 줄 무게 있는 정신적 토대 없이는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일이다'

라고 했다. 

 

한 저명 인사가 말했듯이,

 

“영혼의 승부를 통해 일궈낸 풍요가 더 추앙을 받고, 튼튼한 권선징악의 기본 윤리 구조 위에서 포스트모던의 가치가 멋이 될 수 있다.”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망명했던 러시아의 대표적인 사상가였던 알렉산더 솔제니친은 1978년 하버드 대학 강연에서 이렇게 개탄했다.

“우리는 정치와 사회 개혁에 너무 거대한 기대를 했다. 그 까닭에 정말 우리가 가지고 있던 가장 중요한 것을 상실했음을 깨달았는데, 그것은 우리 영혼의 상태이다. 우리의 영혼은 동구권에서는 공산당에 의해 짓밟혔고, 서구에서는 상업주의에 의해 짓밟혀 버렸다. 우리는 비참한 영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우리가 자랑하는 그 어떤 과학과 진보의 업적들(지구 밖으로 우주선을 보낸 일까지 포함해서)도 20세기의 이 비참한 도덕적 빈곤에서 우릴 구해 주지 못한다. 우리는 영적 불길Spiritual Blaze이 필요하다.”

솔제니친의 이 절규는 비단 70년대 말 미국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닐 터이다.

 

 

  우리 세대에도 하나님의 부흥, 영적 불길이 필요하다. 1907년의 평양대부흥, 그 이전에 구약시대에 큰 성읍 니느웨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회개의 불길과 뜨거운 영적 불길이 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니느웨(의 왕)의 모습을 보면서 그 예전의 다윗 왕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밧세바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악의 씨앗을 잉태했던 다윗, 밧세바가 낳은 아이가 죽어 갈 때 그는

 

 삼하12:16-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다

-고 기술되어 있다.

이레 만에 아이가 죽자 다윗왕은 20절에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원래의 왕의 위엄한 모습을 가지런하게 돌아오자 대신들이 그에게 물었다.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어찜이니까”(21)

 

그러자 다윗이 대답했다.

 

V.22-23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느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다윗 왕의 이러한 대답은 그가 하나님을 하나의 체계나 교리나 종교화 시키지 않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그 분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비록 잘못한 것이 있지만 자신의 잘못을 통회하며 진정으로 회개할 때 혹시나 아버지가 나를 불쌍히 여기사 어떻게 도움을 주실지 알겠는가? 다윗이 그랬다. 자신이 예전에 사울로부터의 끊임없는 피난 행각 가운데 만나주셨던 그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긍휼과 자비가 많으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그 하나님과의 은밀한 관계를 생각하면서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사’ 한 번만 기회를 달라는 식으로 떼를 쓰는 것이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우리를, 우리 가정을, 우리 교회를,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기사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죤 글렌은 말했다.

 

“하나님이 지구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세상을, 지구를 이처럼 사랑하셨는데 나를 불쌍히 여기실 줄을 어찌 알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는데 비록 내가 허물과 죄가 많을지 라도 혹시 나를 불쌍히 여기실 줄을 어찌 알겠는가?

 

우리는 니느웨 왕의 이러한 통 큰 마음을, 다윗왕의 큰 믿음을 닮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전적인 회개의 역사는 곧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었다.

 

V.10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죄인이 자신의 죄와 죄성을 깊이 후회하고 더 나아가 그것에 대해 통탄이 여기는 회개의 삶을 살 때 하나님의 인격은 이런 면에선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부분적으로 합당하다. 하나님은 사랑에 약하신 분이시며 죄인에 약하신 분이시며 죄에 민감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죄인의 돌이킴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 분의 인류계획 또한 ‘창조, 타락, 구속’의 역사가 아니었던가?

 

참다운 회개는,

진실된 회심은,

진정한 참회는

그 분의 마음을 움직이신다.

 

 

생각을 바꾸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 기대하라!

다시 한번 하나님에 의해 새롭게 일어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란다.

니체는 “탈피하지 않는 뱀은 죽는다“고 하였다.

뱀이 탈피하지 않으면 죽는다. 요나가 다시 한번 새롭게 일어서기 위해선 그는 그냥 순종하기만 하면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할 때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인가?

  

 

  ‘경영학을 발명한 사람’으로 존경 받는 피터 드러커는 “이 시대의 리더는 5년 마다 새로운 지식을 연마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3년 마다 한 번씩 완전히 새로운 분야를 공부한다고 한다. 드러커는 자신이 쓴 책 중에서 어느 책이 가장 좋으냐고 물으면 ‘다음에 나올 책’이라고 서슴없이 대답한다. 그는 자신이 옛날에 쓴 책을 읽기 보다는 늘 새로운 책을 쓰는 데 골몰한다. 그의 나이는 그에게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의 나이 90세가 넘었지만 불타오르는 배움의 열정으로 매일 자신을 스스로 업그레이드시킨다고 한다.

 

 

  나이가 많다고 순종하기 힘들다. 새로운 일을 도전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꿈을 좇지 못한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싱가포르의 전 총리 리콴류는 72세의 고령에 인터넷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는데 지금은 아주 능숙한 웹 사용자라고 한다. 벤자민 리비라는 사람은 평생 선교사로 중국에서 사역하다가 70세에 은퇴했는데, 80세에 헬라어 공부하기로 결심해 헬라어 사전을 들고 다니며 단어를 외우면서 공부를 해다. 100세가 되었을 때도 전 세계로 돌아다니면서 불같은 설교를 했고, 그 때는 이미 헬라어 도사가 되어 있었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사람들은 자기변화를 싫어한다. 그게 안 그러고 싶지만 그렇게 된다.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하나님을 위해 도전하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

요나처럼 다시금 기회가 주어졌을 때 반응하라! 주저하지 말라!

 

 

  나이가 어리다고 우리가 하나님의 일, 우리의 꿈을 미룰 순 없다.

  오성식은 대학교 4학년 때 ‘생활영어’를 썼다. 제 후배 중에 이 친구는 독문과를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음악에 대한 굉장한 관심으로 오성식이 대학교 4학년 때 생활영어를 썼는데 자기도 그래야겠다며 전공 외 분야인 ‘화성학’을 집필했다. 돈이 없어서 자비로 출판을 못하고 복사본으로 강의를 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 친구는 기타와 베이스기타, 건반에다 자신의 화성학 이론을 접목시켜 연주를 해내는 친구이다. 그 친구를 보면서 굉장한 도전을 받는다.

 

  요나는 비록 한 번 실패하였지만 두 번째는 순종하였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평가받는 에이브러햄 링컨은 사업에 2번 실패했고 정치에 입문해서도 9번이나 낙선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노예 해방을 이뤄낸 위대한 대통령이 됐다.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웨스트 포인트 사관학교에 응시했다가 2번이나 떨어진 후에야 입학할 수 있었다. 미국 역사상 4번이나 대통령 재임에 성공한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치명적인 소아마비에 걸렸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용기로 전 미국인들을 경제공황과 제 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로 이끌어 낸 지도자가 되었다. 승리는 포기하지 않는 자의 것이다.

  세계를 제패했던 징기스칸 시대의 몽골인들은 가장 추운 날에 성인식을 거행했다. 왕복 80km에 달하는 영하 수십 도의 매서운 눈보라 길을 소년들은 말을 타고 달려야만 했다. 세찬 바람을 이겨 내는 강인한 의지력을 몽골인들은 자식들에게 심어 주고자 했던 것이다.

 

 

  여러분, 이제껏 여러분이 살아오면서 실패한 경험을 떠올려보라. 여러분이 지은 죄로 인한 상처를 떠올려보라. 과거에 얽매여서 아직도 헤어나오지 못하는, 상황과 환경에 갇힌 아직도 헤어나오지 못하는 물고기 뱃속의 요나가 혹시 여러분은 아닌가? 고정관념과 이기심과 자존심과 욕심과 온갖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찬 여러분의 문제들은 여러분을 더 다듬어가시는 하나님의 도구이심을 요나를 통해 정화시키라!

 

  911테러를 감했던 그래서 한번에 자신의 이름을 전세계에 각인시켰던 오사마 빈 라덴...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세계무역센터를 아예 붕괴시켜 버린 ‘슈퍼 개인’...이런 인간을 슈퍼 개인이라고 부른다. 세계화와 정보화가 빈 라덴 같은 인간에게 초능력을 부여해 준 것이다. 빈라덴도 인터넷의 탁월한 사용자였다. 98년 케냐와 탄자니아 주 내 미 대사관 폭탄 테러도 이메일로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9.11 테러를 실행한 아랍 테러리스트들도 미국 내의 조종학교에서 비행기 조종 훈련을 시켰고, 50여 명에 달하는 이들 관련자들이 캐나다 등을 통해 손쉽게 미국에 입국했다. 세계화의 물결 가운데 그들이 비행기 납치에 썼던 무기도 칼 뿐이었고, 국방성과 세계무역센타를 붕괴시킨 무기도 미국 땅에 있는 비행기였다. 즉 정보만을 가지고 테러를 감행한 것이다.

 

  일개의 테러리스트도 이렇게 간단한 정보와 브레인으로 사고를 치는데 우리 하나님은 오죽하시랴?

하나님은 난데 없는 물고기를 이용하셔서 요나를 통해 사고를 치셨다.

 

 

 여러분이 바로 그 사고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가? 하나님께 붙들린 ‘슈퍼 개인’!!! 말이다.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사용하시옵소서”

 

 

 

마무리....

우리는 요나서 3장을 짧다면 짧게, 굵다면 굵게 살펴보았다. 우리의 인생을 알기 위해선 하나님을 알아야만 한다

 선지서의 진짜 주인공은 선지자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 선지서의 본질적인 질문은 바로 ‘하나님은 누구신가?’이다. 오늘 우리가 본 본문도 동일하게 그 질문에 답하고 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우리는 계획을 세우고 안 되면 도중에 취소하거나 수정하고 다시 계획을 진행시켜 나간다. 우리 인간에겐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다. 요나에게 임한 하나님의 두 번째 소명과 말씀은 전혀 새로운 어떤 계획이 아니었다.

 

단지 ‘일어나 가서 외치라. 선포하라!!!’였다.

그것은 일종의 반복이었다.

 

 

하나님은 자기 계획 때문에 상황을 변화시키지 아니하신다.

계획한 그 프로젝트를 관철시키시기 위해 ‘그 사람’을 꼭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계획된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요나를 꼭 사용하셨던 것처럼 기필코 여러분들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은 바로 우리의 과거와 현재, 더 나아가 우리의 미래의 끝을 다 보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논리로 설득되지 아니하신다. 우리가 그의 논리에 이제라도...이제라도...이제라도 순종하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의 말씀에, 그의 계획에 이제라도...이제라도...이제라도..순종하여야만 한다.

 

 

 

 

 

✈...찬양선곡...

 

Again 1907. G

깨끗한 손 주옵소서. G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Ab

 

 

✈...기도제목...

 


1) 고고학적으로 니느웨는 아직까지 발굴되고 있는 가운데 있다. 분명한 것은 요나가 사역할 이 당시의 앗수르는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 곳을 “저 큰 성읍”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단순히 도시의 규모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국세와 관계 있는 말이다. 만약 단지 규모만 크고 그 국력이 쇠약했다면 “그 큰 성읍”이라고 불리울 수 없었을 것이다. 니느웨는 그 둘레가 약 96Km정도 되는 큰 도시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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